첫 상담 겸 맛보기 수업을 마치고, 선생님이 알려주신 준비물을 샀다. A4 크기의 크로키 스케치북, 어렸을 때도 써봤던 잠자리가 그려진 검은색 2B 연필 한 타, 10개짜리 찰 지우개 세트. 에코백에 준비물을 챙겨 수업 장소로 떠나니 어쩐지 마음이 들떴다. 미술용품만 든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쳐 메고 어딘가로 가는 날이 오다니. 내가 정식으로 미술을 배우게 되다니.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현실을 품에 안고, 어색하게 깎인 미술 연필을 쥔 채로 본격적인 첫 수업이 시작됐다.
얼굴부터 시작해서 눈, 코, 입, 귀, 손, 몸 순서로 그림 수업이 진행될 거라고 하셨고, 첫 날엔 스케치북에 구도를 잡는 것부터 얼굴 전체를 그려보는 걸 배웠다. 선생님이 먼저 시범을 보여주시고, 그 이후로는 다 내가 직접 그려보는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그리는 걸 봐주시면서 중간중간 수정할 부분을 알려주셨다. 그림 그리기는 머리로 생각하고, 손으로 그리면서, 귀는 열고. 입으로 떠들 수 있는 활동이었다. 선생님의 작업실에는 음악이 틀어져 있었고, 이따금 내게 좋아하는 음악을 여쭤보시기도 하셨다.
“음악 요즘에 뭐 들으세요?”
“저...밴드 음악 좋아해요!”
“오! 무슨 밴드요?”
“저 데이식스요!!!”
선생님은 데이식스 플레이리스트를 틀어주셨고, 수업이 (덕심으로) 한층 더 즐거워졌다. 미술 수업 BGM으로 데이식스의 Congratulations(이하 ‘콩츄’)가 나오다니. 선생님은 데이식스 노래 중에 콩츄가 제일 좋다고 하셨고 그 말에 친구의 최애 곡도 콩츄였다는 게 떠올라서, 손은 그림을 그리는 걸 멈추지 않으면서 입으로 더 신나게 대답했다. 저도요, 저도 콩츄 너무 좋아요!
수업은 총 2시간이었는데, 앞에 3-40분 정도는 오늘 집중적으로 그릴 신체 부위를 그리는 방법을 배우고, 나머지 1시간 30분 가량은 이렇게 그림을 그렸다. 음악도 들으면서, 도란도란 수다도 떨면서. 아무래도 그림을 처음 배우다 보니 초반엔 멀티가 잘 안돼서 소리의 공백을 채우는 건 선생님이셨다. 귀는 열어두고 그림을 그리면서 간간이 리액션을 했는데, 가끔 ‘아직 만난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선생님의 이야기가 솔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나도 덩달아 마음에 둔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이제 만화를 배우는 이유가 사라졌어요” 같은.
일정이 바빠서 첫 수업이 끝나고 2~3주쯤 후에 두 번째 수업을 듣고, 또 2주 뒤에 세 번째 수업을 들었다. 그 사이 만화를 배울 이유가 사라져 버렸는데, 공교롭게도 안부 인사를 하며 그 이야기가 나왔다.
“만화 편집자 희망하셔서 배우신다고 했죠?”
선생님의 질문에 잠시 고민했다. 솔직하게 다 말할까, 아니면 거짓말은 하지 않되 말하고 싶은 진실만 말할까. 원래 성격 같았으면 당연히 후자를 선택했겠지만, 왠지 이번에는 솔직하게 다 털어놓고 싶었다.
“선생님 저 사실... 요즘 편집자 수업을 듣고 있는데 편집자 일이 저랑 좀 안 맞는 거 같아서, 편집자는 안 하려고요!”
“왜요? 어떤 부분이 안 맞는 거 같아요?”
“편집자가 하는 일이 많더라고요... 야근이 일상이고, 책 만드는 과정 전체에 다 참여해야하고..”
“맞아요. 진짜 일 많죠...”
“전 막 그 정도로 책을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요...”
이렇게 말하고 후련함이 온몸을 감쌌다. “네, 저 요즘 편집자 수업 듣고 있어요.(마음은 곧 그만둘 생각이었다.)”처럼 말하고 싶은 진실만 말하며 나를 포장하지 않고, 온전히 솔직해지기. 선생님께 배운 건 그림만이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면서 다른 사람의 솔직함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런 선생님의 모습을 보며 솔직함에 면역이 됐다. 나도 한번 솔직함을 내뱉어 볼 수 있을 정도로.
“만화 편집자는 이제 안 되고 싶은데, 그래도 제 만화는 하나 그려보고 싶어요.”
처음의 이유는 사라졌지만, 계속 그려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림을 배우는 일은 그 자체로 재밌으면서도,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명상이 되는 것만 같은 매력이 있었다. 연필 깎기는 귀찮지만, 깎을 때만큼은 무념무상이 되어 연필심이 뾰족해지기만을 기다리며 칼로 갈고 또 갈고. 집에서 숙제 그림을 그릴 때, 형태를 맞추는 거에만 집중하게 돼서 잡념이 끼어들 틈이 없고. 선생님과 수업을 들을 땐, 손은 그림을 그리고 귀는 열어두고 입을 조잘거리는 그 시간 속에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돌봐지는 느낌이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환기해 주는 명상 같은 취미. 나에겐 줄곧 그런 취미가 필요했다.
(숙제로 그린 옆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