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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잡담] 귀멸의 칼날과 코난

by 기록

1월 마지막 주에 친구를 만나기 전 시간이 남아서 근처 영화관에 갔습니다.

다른 영화들은 이미 봤기에 주로 스트리밍 서비스로 보던 애니였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도록 영화관에 가서 애니를 보기로 했습니다. '귀멸의 칼날'이라는 애니였습니다.

이 애니에 대한 정보를 처음 접한 것은 등장인물 중 '혈귀가 된 동생 코스프레'를 하기 위해 미모가 뛰어난 여성이 대나무를 입에 물은 사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만화로 보다가 멈춘 경험만 있습니다.


다행히도 시리즈 애니의 경우는 '이야기 구조(최종 보스를 향해 비중이 적은 악당부터 물리 침)'를 지니고 있기에 이해에 특별히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이야기의 진행은 기차에서 사람들이 사라지는 문제를 해결하라는 명령을 받고 주인공의 팀이 파견됩니다. 파견지에서 불을 다루는 능력을 지닌(=염) 상급자(주)를 찾으라고 합니다. 포스터에 나온 금발의 인물이 불을 다루는 능력을 지닌 염주입니다.

주인공팀은 물의 능력을 쓰는 주인공, 번개 능력을 쓰는 노랑머리, 짐승의 힘을 쓰는 돼지 탈을 쓴 세 인물이 있습니다. 이들은 기차에서 염주와 만납니다. 그리고 잠시 후 기차를 장악하고 있던 꿈을 조종하는 혈귀의 함정에 빠집니다. 혈귀는 결핵이 있거나 아내와 자식과 사별하는 등 현실의 괴로움을 피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만족할만한 꿈을 꾸게 합니다. 그래서 그 꿈속에 계속 있고 싶은 사람들은 인간임에도 인간을 해치는 혈귀 편에 서서 주인공팀을 공격합니다.

공격하는 방식은 많은 이야기에서 활용한 화소(이야기의 작은 구성 부분)입니다. 주인공이 원하는 꿈을 보여주고 그 유혹을 이겨야만 꿈에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노랑머리와 돼지 탈은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염주는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지만 생존 본능이 있어서 무의식 중에 자신을 공격하는 아이를 제지합니다. 주인공은 혈귀가 된 동생의 도움으로 꿈에서 깨어납니다. 주인공의 활약으로 염주와 다른 일행도 꿈에서 깨어나고 기차를 거점으로 삼은 혈귀를 물리칩니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계속 좋은 꿈을 꾸고 싶어 혈귀를 돕는 열차 직원'의 흉기에 부상을 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직원을 원망하기보다 용서하고 오히려 이해를 해 줍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가 했는데... 혈귀 조직의 간부가 갑자기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를 염주가 막아섭니다.

간부 혈귀는 염주에게 혈귀 조직에 들어오라고 권유를 합니다. 그 간부는 무인이었는데 무를 수련하는 것이 너무 좋아서 인간의 한계를 넘고자 혈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과 함께 수련하기를 원해서 실력 있는 인간인 염주에게 혈귀가 되도록 권합니다. 염주는 이를 거부하고 싸웁니다. (혈귀가 된다는 것은 피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고 이는 살아가면서 인간을 해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밤에만 다녀야 합니다.) 염주는 이제 막 성장하는 단계이기에 혈귀 간부가 버겁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 했지만 혈귀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본인도 치명상을 입습니다. 혈귀는 해가 뜨면 죽기에 새벽녘에 떠오르는 해를 피해 도망을 갑니다. 도망가는 혈귀 간부를 잡으려는 주인공은 혈귀 간부를 놓치면서 소리칩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불리한 밤에 싸우는데 도망가는 혈귀는 비겁하다고 외칩니다. 목숨이 달린 일이기에 이런 말을 듣고도 혈귀 간부는 도망칩니다. 그리고 치명상을 입은 염주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염주가 싸운 이유는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주가 탄 기차의 승객 200명 모두 죽지 않고 부상으로 끝났습니다. 본인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자신의 뜻을 관철한 모습은 교과서에서 제시하는 미의식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도달하기 어려운 정신을 보여주니 숭고미가 느껴지면서 좋은 인물을 잃은 것에서는 비장미가 느껴지고 심지어 염주가 뜻한 바를 잠시나마 현실에 실현시키니 우아미도 느껴집니다. 이런 복합적인 아름다움 때문인지 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들의 극장 내 분위기는 일반 영화를 보면서 감동하는 사람들의 분위기와 같았습니다. 그리고 애니는 영화와 표현 방법만 다르지 인간이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하여 분명하게 탐색하고 더욱 상상력을 요구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극장판 애니를 보면서 영화와 다른 애니 특유의 분위기 조절 특성을 보았습니다. 인물의 멋진 모습과 특성을 보여주고 싶다면 그림체 자체가 매우 화려하고 정밀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편 인물이 우스운 모습을 보이거나 맥이 빠지는 장면에서는 그림체도 간소하게 변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특정 활동과 관련해서는 효과를 나타내는 선들이 자연스럽게 보입니다.(눈에 보이지 않을 공기나 소리 등의 움직임 등) 배경을 제시할 때는 직접 촬영한 것인지 그림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정밀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애니가 영화와는 다른 다양한 표현 기법을 활용하여 몰입감을 주는 것을 체감했습니다. (반면 다음날 코난을 보면서 그림의 정밀성 차이로 몰입감이 떨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1월 두 편의 애니가 동시 개봉하여 비교할 수 있는 기회는 우연히 얻은 특별한 상황이자 경험이었습니다.)


애니(만화)라고 가볍게 볼 내용(주제)도 아닙니다. 주인공은 일관되게 선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악당은 분명하게 혈귀 집단입니다. 이러한 동화적 구성을 취해서 선과 악 중 관람객이 선한 편에 서서 극을 보도록 구조를 만듭니다. 그런데 그런 중에 변화를 줍니다. 바로 주인공의 동생입니다. 주인공의 동생은 인간이었다가 혈귀가 된 인물입니다. 동생은 자신의 과거인 인간에 자신의 존재(정체성)를 두기에 혈귀들과 싸웁니다. 이 부분에서 주인공의 동생과 혈귀들 사이에는 차이를 보여줍니다. 혈귀들 또한 인간이었지만 자신의 선택으로 혈귀가 된 것이고 주인공의 동생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혈귀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극 중에서 인간들은 인간이지만 현실의 고통을 잊을 꿈을 꾸기 위해 200명의 승객을 해치는 혈귀 편을 들어서 귀살대(혈귀들에게서 인간을 보호하는 조직)를 죽이려고 합니다. 아주 단순한 선악의 구조를 만들어 두고 그 안에서 인간이면서 혈귀 편을 드는 무리. 혈귀이면서 인간 편을 드는 주인공의 여동생을 둬서 미묘한 고민에 빠지게 만듭니다. 단순한 선악 구도로 재미없을 이야기가 이런 변화 때문에 단순하지 않게 됩니다.


염주와 주인공의 선함에 대한 무조건적 지향도 응원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러한 인물 설정은 영화에서 취하기 어려운 인물 설정이란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현실 반영 정도, 반대로는 현실과 괴리 정도를 생각할 때 영화는 현실과 관련성이 큰 반면 애니는 현실과 관련성이 영화보다는 적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용적 측면이 아닌 형식적 측면입니다. 영화는 허구를 바탕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보여주는 모습은 허구의 내용을 영상이란 가시적인 대상으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반면 애니는 허구를 바탕으로 하면서 가시화시킬 때 현실과 거리감이 있는 표현방법(그림)을 씁니다. 인물들의 생김새부터가 그러하며 움직임에 대하여 보이지 않을 궤적을 그리는 등의 상징물을 활용합니다. 그리고 이런 장치들로 인하여 상상하게 만듭니다.


귀멸의 칼날을 보고 나서 극장에서 상영하는 애니에 대한 인식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오랜 기간 인기를 얻어 장편의 시리즈를 자랑하는 코난을 다음날 보러 갔습니다. 그런데 귀멸의 칼날을 볼 때와 다르게 큰 스크린 앞에 저 혼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기가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코난: 귀멸의 칼날 이전부터 나온 시리즈를 생각할 때 2만 명의 누적 관객은 실망스럽다.
귀멸의 칼날: 코난과 동시 개봉을 했는데 누적 관객이 12만 명으로 코난의 6배이다.

그림이 귀멸의 칼날과 다르게 코난은 색감도 떨어지고 그림체도 현실과 거리감(배경 등 현실 몰입감을 줘야 하는 장면 등에 한정, 인물의 그림체는 현실과 차이가 분명하기에 제외)이 멀어서 몰입이 어려웠습니다. 애니 자체가 그림인데 그 그림 중 일부가 현실에 유사할수록 몰입도가 더 올라간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내용면에서는 귀멸의 칼날이 자신의 뜻을 지키고 다음 사람에게 자신의 선한 의지를 이어가는 내용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내용입니다. 반면 코난은 일본 문자와 일본 전통문화(텐구)를 활용한 추리이기에 한국 문화를 바탕으로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코난은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한 극장판이 아니라 기존 방영된 내용을 극장판으로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같이 개봉을 했어도 귀멸의 칼날이 더 많은 사람들의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귀멸의 칼날을 보면서 함께 보는 사람들이 감동하고 영화가 끝나고 극 중 장면을 가지고 즐겁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궁금한 점이 생겼습니다. 이 작품에서처럼 일본에서 제시하는 애니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지향해야 할 선에 대하여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려내는 과정이 매우 감각적입니다.(이야기의 구성이나 장면 중 바로 보는 위치 선정, 인물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 설정 등) 이 작품만이 아니라 '내 이름은'이나 더 이전 '원령공주' 등에서도 우리 일상 중 잊고 지내는 것을 상상력이 더 필요한 애니(현실과 다른 모습의 그림)란 형태를 빌려서(영화는 실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음) 생각할 기회를 줍니다. 한편 일본 영화도 인간에 대한 이해가 담겨 있기에 연출하는 장면들이 일상의 소소한 것들을 잡아내면서 보는 것만으로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많은 예능에서 활용되었던 '러브레터'와 같은 영화가 그렇습니다. 일본의 일상을 다룬 영화들은 인간에 대한 소소한 관찰이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에 대한 관심이 많은 일본 작품을 고려할 때 일본의 전쟁과 강간, 살인, 폭력, 강제 징용 등의 다양한 악행들에 대한 무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의 생각이라고 하기에는 국가적 차원(개인- 가정 - 집단 등의 수준을 넘어서는 단위)에서 취하는 입장입니다. 인간에 대한 탐구가 애니나 영화 등 다양한 문학 작품에서 나타납니다. 세세한 장면을 잡아 의미를 부여하고 확대하여 제시하는 것 그리고 그로부터 감동을 유발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이 이뤄질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 반대편에는... 다수의 의견이 모아야 형성되는 국가 차원의 입장에서는 인간에 대한 무시가 담겨있습니다. 인간으로 보지 않아야 취할 수 있는 행동들을 했고 그것에 대한 심적인 부담감(양심의 존재)도 없습니다. 이 애니를 보고 나서 참으로 의아했습니다. 인간이 복잡하여 두세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작품'들'에서 보여주는 세밀한 감수성을 일본이란 나라가 지니고 있다면 타인에 대한 배려와 자기에 대한 살핌(성찰)은 당연한 일일 것인데... 참으로 일본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같은 애니와 영화라고 해도 나라마다 특성이 있다고 봅니다. 드림웍스와 디즈니의 애니와 일본의 애니가 다르고, 일본의 영화와 인도의 영화, 한국 영화가 차이가 있습니다. 다만, 문화적 수용성 차이로 인하여 미국과 한국의 영화, 애니에는 앞에 국적을 붙이지 않지만 이런 특성 차이를 인식하기에 일본 영화와 애니, 러시아와 인도의 영화처럼 부를 때 명칭 변화가 있고 이는 이들 사이 차이가 있다는 인식의 반영이라고 봅니다.)


이 작품을 비롯하여 다양한 문화 콘텐츠들이 수출을 목적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1차적으로는 자국 내 소비이며 2차가 수출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을 보는 일본인들은 인간에 대한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지게 될 것인지 그들이 현재 아픔을 겪은 사람들에게 취하는 현실 세계에서 생각은 어떠할지가 궁금해졌습니다. 일상에서는 뒤를 돌아보다 실수로 팔꿈치로 타인에게 충격을 가하거나 내가 바닥에 잠시 내려놓은 물건에 타인이 걸려 넘어지면 미안해하고 사과하는데 이런 비의도적이고 문제 상황과 거리가 있는 상황에서도 심리적 불편함을 느끼고 사과를 합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탐구로 무엇이 선인지 알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작품으로 만들어 내면서 전쟁이란 큰 이름 아래 살인, 강간, 폭행, 절도 등 직접적인 문제 행동을 하고 무시로 일관하는 국가차원의 대응은 없는 상황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면서 귀멸의 칼날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에서 보여주는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하여 제시를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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