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메가박스 원본 이미지 다운로드. 재즈 연주가가 되고 싶지만 매번 채용에서 떨어지는 조.
학교에서 비정규직 재즈 강사로 일을 하다가 정규직 고용 기회가 옵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재즈 연주가로 고용될 기회도 함께 찾아옵니다.
좋은 일의 연속이지만, 고민의 시작입니다.
자신의 곁에 있어주신, 어머니가 바라는 안정적인 삶이냐(아버지도 재즈 연주가로 생활력이 부족하셨습니다.) 아니면 자신의 꿈인 재즈 연주가가 되느냐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조는 어머니께 비밀로 하고 재즈 연주가가 되기로 결정합니다. 연주 기회를 잡아 기쁘고 흥분된 상태였습니다. 그런 상태로 길을 급하게 가다 맨홀에 빠져 죽음의 세계로 갑니다. (현실은 맨홀 주변에 안전장비를 해 둬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한 장치이니 그냥 넘어가 봅니다.)
조는 이마에 두 줄의 주름이 생길 때까지 꿈을 위해 홀로 살아왔습니다. 살아오는 중에 좋은 인연도 있었지만 재즈 연주가가 되겠다는 꿈을 좇느라 주변을 돌아볼 여력이 없어서 헤어진 상황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쫓으며 살아온 인생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원하던 공연을 앞두고 맨홀에 빠져 사후 세계로 갑니다.
문학은 작가가 인간을 관찰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한 것들을 추려 상상해 낸 세계입니다.
작가는 사회 속에 살아갑니다. 따라서 작가가 만들어 낸 상상의 세계라고 해도 사회의 모습이 일정 부분 반영되기 마련입니다. 이 애니에서도 그런 이유로 사회와 문화가 담겨있다고 봅니다.
최근 성혼 사례도 적은데 이혼 사례는 과거보다 높게 나타납니다. 저조한 성혼율에는 조와 같은 사람의 도움(?)도 있을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상황에서 만나면 좋을 텐데... 사회에서 요구하는 조건들이 있어 그에 맞는 환경을 갖추느라 가정을 이루지 못한 상황입니다. 이는 애니 제작 국가만이 아니라 한국에도 해당되는... 지금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의 어머니 세대에서는 아버지가 재즈 연주가로 살아가도 어머니가 생계를 해결하기에 가능했습니다. 이는 어머니 세대에서는 환경 조건이,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영향력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또는 그 시대에는 사회적 영향력에 휘둘리지 않는 포용력이 큰 인간이 많았다는 관점으로 접근해 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시대가 변한 것을 알기에 자신은 부족한 아버지를 포용하셨지만... 자식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재즈 연주가가 되지 말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정규직 재즈 교사가 되라고 하십니다.
한편, 극 중에서 조는 자신의 꿈을 좇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는 성공적인 무대를 보여 줬습니다. 이는 그가 비정규직 교사라는 표면적 모습 이면에 계속 노력했음을 증명합니다. 그가 재즈 피아노를 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 22에게서 지구 통행권을 받아 현실세계로 왔지만 다시 22를 찾아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지구 통행권을 돌려준 후 자신의 죽음을 택하는 모습. 이는 표면(사람 채용하듯이 점검하는 기준 등)으로는 알 수 없는 모습입니다. 함께 하면서 알게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특성을 중시하는 시대라고 합니다. 하지만 조가 보여주는 개인의 고유한 특성을 보지 않습니다. 개성을 중시하는 시대라고 하지만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의 고유한 특성을 보기 전 단계에 물건 고르듯이 일정한 기준이 존재합니다.
개인의 특성에 대한 인정이 없고 성혼을 위한 과정에서 환경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환경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파혼하는 일이 많고 이는 SNS가 발달한 현대 쉽게 접하는 사례입니다. 주변에서도 가장 큰 장애물이 환경 조성(직업, 주거 등) 임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성혼 이전인 만남을 갖기 전에도 환경은 중요합니다.(N포 세대란 용어 등장 배경을 참조)
애니를 현실로 확장함은 환상성을 즐기기 위한 목적을 바탕으로 한다면, 감상 과정에서 불편함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21년도 개봉한 이 애니에서 인물 설정은 사회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사회의 모습과 너무 거리가 먼 인물이 나온다면 작품에 대한 공감 대신 거부감이 작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현대 사회 1인 가구의 모습을 조에게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꿈을 좇고 환경의 조건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를 만날 수 없는... 그 부족함이란 조 내면의 심리적 부분일 수도 있고 상대가 희망하는 조건에 미달하는 부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방향이 되었든 결핍에 대한 수용이 없는 상황에서는 만남이 이뤄질 수 없고 우리 사회도 현재 그러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어머니 세대와 같은 포용이 적어서 만남은 어렵고 이별은 쉬운 시대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결핍을 인정(수용) 하기보다는 새로운 것을 밖(환경)에서 찾는 속성의 작용이라고 봅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다고 해서 꼭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경제적으로 부유하다면 경제적 문제로 인한 갈등을 사전에 차단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삶의 주인이 아님을 고백하는 것이라 봅니다. 만남과 성혼에 있어서 환경에 휘둘릴 것에 대한 '해결. 의지. 없음.'의 고백이라 봅니다. 이런 상태에서 결혼을 하니 환경이 변하면 환경을 지배해야 할 중심인 당사자도 환경에 흔들리고 자연스럽게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환경 변화를 원하니 그 결론은 그런 환경을 찾는 이혼으로 이어진다고 봅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런 내부 사정에 대해서 과거에는 두 개인 사이 문제였다면 지금은 사회적 문제가 되어 이를 신문기사에서 접하는 것을 넘어서 예능과 다른 작품(드라마, 영화 등)에도 점차 소재로 쓰이고 사회에서 이런 현상을 자연스러운 일로 수용하고 관심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문학이 상상의 세계를 보여주지만 다루는 내용들이 작가가 있는 현실의 반영입니다. 이를 생각한다면 문학 속 모습이 사회의 모습을 일정 부분 반영해서 그려낸 것으로 문학을 통해 사회의 모습을 일정 부분 받아들여도 큰 문제는 없을 듯합니다. 영상 속 조의 '꿈이냐 안정적인 삶이냐 누군가와 만남이냐 자신의 삶을 유지하느냐'는 '현대 1인 가구가 늘어나는 사회'와 인간이 아닌 그 '주변의 환경을 중시하는 문화'의 암묵적 반영이라고 봅니다.
탄생의 세계에 오면 어린 영혼들이 있고 이들을 관리하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양자 세계의 존재들이라고 간단히 언급만 합니다.
이 영혼의 세계에서 성격을 부여하는 공간으로 임의 지정해서 보냅니다.
이는 사람마다 너무나도 다양한 성격을 선천적인 것으로 표현하고 싶은 듯합니다.
이렇게 여러 성격을 임의로 받은 후에 마지막 하나를 채우면 영혼의 세계에서 지구로 갈 수 있는 통행증이 생깁니다.
이 마지막을 채우기 위해 많은 멘토들이 있습니다.
그 멘토들은 죽음의 세계로 가기 전 새로 태어난 영혼들에게 통행증의 마지막 칸을 채울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이 멘토들은 (일반 영혼들이 아닌) 위대한 업적을 쌓은 사람들이 담당을 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애니 내에서 주제와 모순이 있다고 봅니다. 별도로 언급하고자 합니다.) 이런 위대한 업적을 쌓은 인물들(위인)들도 수천 년 동안 22(마지막을 채우려는 영혼, 다른 영혼 호명 숫자와 차이가 남을 보면 영혼의 세계 처음부터 삶에 대한 의욕이 없었음을 추측할 수 있음)의 마지막을 채워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22가 마지막 채우기를 거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영혼의 세계를 다루는 부분에서는 뛰어난 영상미와 '양자'란 부분에 눈길이 갔습니다. 문학과 세계의 관련성으로 '해저 2만 리'란 소설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처음 만든 핵 잠수함 이름이 소설의 잠수함 이름과 같은 노틸러스호란 점입니다. 문학이 현실에 영향을 준 이 사례와 반대로 현실이 애니에 영향을 준 사례로 보입니다. 이제는 애니에서도 자연스럽게 '양자'란 과학의 요소를 보여주는 느낌입니다.
영혼의 세계 이후 이야기는 많이 보이는 '이야기 구조'입니다.
조가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현실세계에서 영혼 세계로 들어가는 사람들(영적 능력이 높거나 관심 있는 이들)의 '도움'으로 현실세계로 왔지만... '실수'로 22의 영혼이 조의 몸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조의 영혼은 그 옆에 있던 고양이 몸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인간 세상이 처음인 영혼 22와 자신의 저녁 공연에 참여하기 위한 조 사이의 여러 이야기들을 보여줍니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영적 세계에서 만났던 간판맨을 찾아갑니다.(그는 영혼의 세계에서는 자유로운 선장이지만 현실에서는 쉼 없이 간판 돌리기에 '몰입'해야만 하는 사람입니다. ) 그는 영혼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인접하는 저녁시간에 영혼을 옮길 수 있다고 알려줍니다.
희망이 생긴 조는 저녁 공연 참석을 위한 준비를 합니다. 고양이인 상태에서 22에게 좋은 옷을 꺼내 입히고 머리를 하고 바지가 찢어져서 아버지의 양복을 물려 입는 등 그 과정에서 소소한 이야기들이 있고 22는 이 과정이 모두 처음이라 특별함을 느낍니다. (자세한 것은 영화를 보시고 느끼셨으면 합니다. 누구나 아는 주제를 다루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방법에는 영상의 촬영 기점, 행동과 대사 등이 작용하여 개개인마다 느끼는 감동이 다를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녁 공연을 위해 다시 몸을 바꾸려는 순간 22는 자신이 경험한 하루에 만족감을 느끼고 몸을 돌려주기 싫다는 마음에 갑자기 도망칩니다. 도망치는 중에 영혼 세계에서 영혼을 회수하러 온 존재에게(양자적 존재) 조와 22 둘 다 영혼 세계로 다시 돌아갑니다. 영혼세계에서 조는 22의 마지막이 통행증 조각이 채워진 것은 자신의 음악에 대한 열정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22는 자신이 경험한 감정이 처음이기에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것임을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다가 조에게 자신의 지구 통행증을 던지고 어디론가 가버립니다.
조는 22의 통행증을 받아서 현실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토록 기대하던 재즈 공연을 마칩니다. 무엇인가 차오르는 감동을 느꼈지만 공연 후에는 공연 전과 같은 간절함이 사라졌습니다. 오랜 기간 먼저 무대에 섰던 선배가 말합니다.
바다에 가겠다고 간절했던 물고기에게 그 옆에 있던 물고기가 말합니다. 네가 있는 곳이 바로 바다라고. 공연 무대에 서서 재즈 연주가로 인정받은 순간 조에게는 이전과 같은 감동을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마치 22가 조의 몸을 빌려서 떨어지는 단풍나무 씨앗과 하늘을 보면서 느낀 감동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조는 22에게 목표가 없는 삶에는 열정도 감동도 있을 수 없다며 22가 통행증의 마지막 조건을 얻은 것은 자신의 음악에 대한 열정 때문이며, 통행증은 자신이 받아야 한다고 했던 것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주머니에는 22가 조의 몸을 빌렸을 때, 의미 있다고 생각해서 모은 물건들이 있습니다. 이발을 하면서 먹은 막대사탕, 거리 음악가에게 나눠준 빵 조각. 옷을 수선하러 갔을 때 가져온 어머니의 실패(뭉치) 조의 몸과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본 나무 씨앗 등.... 조는 이들을 보면서 즉흥적으로 연주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깊은 몰입에 빠졌을 때 다다를 수 있는 영혼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 세계에 들어가니 '22'는 집착하면 변하는 검은 영혼이 되었다고 합니다. 조는 검은 영혼이 되어 '방황하고 타인을 거부하는 22'를 찾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함을 인정하고 그를 위로하고 22를 다시 평범한 영혼으로 돌려놓습니다. 조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22에게 지구 통행증을 넘기고 죽음의 세계로 가기로 결심합니다. 이에 영혼세계를 관리하는 양자적 존재가 수천 년 동안 영혼의 세계에 머물러 있던 22를 도와줬으니 특별히 다시 삶을 이어가도록 해 준다며 지구로 가는 별도의 통로를 열어줍니다. 이렇게 해서 22는 수천 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 태어나게 되었고 조는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이어서 살게 됩니다. 수천 년을 존재한 22나 수십 년을 살은 조 모두 새로운 삶을 맞이하게 되며 영화는 끝납니다.
22를 보면 수많은 멘토(테레사 수녀, 링컨, 무하마드 알리 등 일반인이 도달할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이들)들에게 배울 기회를 얻었고 수천 년의 시간을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극 중에서는 아이의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존재의 시간을 가지고 어른과 아이를 나눈다면 22는 어른이고 조는 어린 아기입니다. 극 중 설정에서 영혼의 세계에서는 마음대로 목소리를 바꾸고 그렇게 인식하는 것뿐이라면 어쩌면 22를 보는 사람들의 인식이 22의 수천 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서 어린 영혼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조각 또한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장치 중 하나라고 봅니다.
이런 설정을 가지고, 일정 요소만 뽑아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수천 년을 존재해 온 22는 과연 아이일까 어른일까란 점입니다. 극 중에서 둘은 친구 사이이기에 이를 나누는 것이 무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둘의 관계는 '알려주는 자와 배우는 자'로 시작합니다. 이런 조건들을 근거로 생각했을 때, 22는 조보다는 많은 것을 알고 있기에 어른으로 봐야 한다고 봅니다. 그의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었기에 '인생'이라 볼 수는 없지만 존재 이후로 나름의 존재 방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 방식을 가지고 있는 22에게 과연 많은 멘토들이 의미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멘토들이 각자의 삶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뤘다면, 22는 그런 업적을 이룬 다양한 멘토들을 수천 년 동안 만나왔기에 멘토들의 위업에 위축되지 않고 자신이 경험한 멘토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대응하지 않았을까 상상을 해 봅니다. 그런 22였기에 오히려 위대한 삶을 말하지 않고 수수한 한 인간의 삶을 살아낸 조의 삶이 오히려 더 영향력을 준 것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멘토들은 자신의 업적 분야를 22에게 전달하려는 장면들의 삽입을 근거로 함)
추가. 영화 주제와 상황 설정의 모순에 관하여
조가 영혼의 세계에 다시 22의 통행증을 돌려주기 위해 돌아왔을 때, 영혼 관리자(양자적 존재)들은 멘토들이 흔히 어떤 목적의식을 멘티 영혼들에게 심어줘야 한다고 오해하는 문제를 언급합니다. 이 부분은 소울이란 영화에서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만 들면 된다는 삶의 소중함을 주제로 한다면... 위인들을 멘토로 설정하는 것은 주제와 배치되는 상황 설정이라 봅니다. 이 애니에서 멘토들은 뛰어난 학자, 운동선수, 노벨상 수상자들입니다. 만약 삶의 소중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죽음의 세계로 가기 전에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 멘토들을 조금 더 평범한 사람을 섞어서 설정하는 것이 전체 흐름에 맞지 않았나 싶습니다. (평범한 영혼은 멘토가 될 기회도 없이 죽음의 세계로 넘어갑니다.) 이 또한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위한 장치라서 전달하고 싶은 내용을 위해 이야기 중에 튀어나온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또는 사회 속에 있는 작가의 생각이 은연중에 드러난 것은 아닐까 합니다.
소울 오리지널 티켓참고. 중앙선데이. 주경철의 문학으로 본 역사 <8> 상상이 현실이 된 잠수함 ‘노틸러스호’ 발췌
바다는 누구의 것도 아닌 자유인의 세계라고 네모 선장이 주장하지만 이 작품의 내용 자체가 이미 그것과는 다르게 그려져 있다. 바다는 더 이상 각국의 투쟁에서 비켜나 있는 곳이 아니다. 이전에 강대국이 대지를 분할하고 통치하듯이 과학기술을 앞세운 강력한 국가가 곧 바다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 작품이 나온 바로 얼마 후 미국의 유명한 해군 전략사가인 앨프리드 머핸(Alfred Mahan)은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일찍이 쥘 베른은 노틸러스호를 가지고 해저 세계를 선점하는 꿈을 꾸었지만, 실제 세계 최초의 핵잠수함을 건조하여 바다를 종횡으로 누빈 것은 미국이었다. 그 잠수함은 이 소설에 나오는 잠수함의 이름을 따라 노틸러스호라 명명됐다.
추가. 조에 대하여 사회를 반영한 생각은 개인의 좁은 시각으로 제시한 한 의견일 뿐입니다.
최근에 브런치 추천 도서로 메인화면에서 '독박육아'란 용어를 쓴 글이 3일 정도 게시된 일이 있었습니다. 혹시나 좁은 시각으로 쓴 내용이 불편함을 드릴까 걱정되어 첨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