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CGV 어플 원본 이미지 다운로드 시작은 우주선입니다. 그 안에는 두 명이 타고 있습니다.
지구로 귀환하던 중 우주선이 갑자기 덜컹거립니다.
지구에 착륙한 우주선에서 무사히 내린 것은 한 명뿐입니다.
장면은 청문회장 같은 공간으로 변합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어린 소녀의 심리를 치료하는데 물에 1분이나 넣어 질식사할 뻔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치료가 되었어도 어머니가 주인공(여의사)의 처벌을 원해서 검찰에 기소할 것인지 병원 자체의 징계로 끝날 것인지 결정하는 상황입니다. 상황이 이러해도 여의사는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했다면서 추가 항변이 없습니다. 이를 멀리서 한 남자가 지켜봅니다.
그 남자는 여의사에게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일에 조언을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여의사는 병원에서 해고되기 전에 조언받을 환자를 병원으로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장교라면서 박사에게 함께 갈 것을 청했고 박사(여의사)는 함께 가기로 합니다.
(사회적 관습에 따라 여의사로 기술합니다. 성인지 관련 의무 연수를 많이 들어서 현대 시대 기준으로 사회적 관습을 따라 여의사와 같이 칭하는 것이 문제가 있음을 인지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주인공을 데려온 사람은 군인이었습니다. 민가에서 떨어진 황무지에 군사시설을 관리하는 총책임자였습니다. 그는 주인공에게 시설의 비밀을 알려줍니다. 그 비밀이란 우주선 불시착 사고에도 살아남은 대원이 사실은 외계 생명체의 숙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숙주인지 공생관계인지 논란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군인은 우주 비행사의 몸속의 외계 생명체를 무기화하길 희망하고 숙주인 남자 주인공은 살아남길 원한다는 점입니다. 남자 비행사는 자신이 외계인이 위 속에서 지내다가 새벽에 입을 통해 체외로 나왔을 때 활동한 내용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 외계인은 인간이 공포를 느낄 때 증가하는 '코르티솔'을 먹고 산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발견한 시설에서는 살인이나 아동 범죄를 저지를 죄수를 외계 생명체에게 먹이로 제공합니다. 그러면 그 생명체는 인간을 바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코르티솔'이 충분히 나오도록 공포감을 준 뒤에 뇌를 먹습니다.
이런 생명체를 체내에 넣고 있던 비행사는 외계인이 경험한 것을 모두 공유하기에 자신이 한 행동과 시설의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여의사이자 박사)은 외계인의 숙주가 된 비행사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그가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시설에 있으면 치료받기보다는 외계인을 통제하여 무기화하는 실험에만 사용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국 쫓아온 장교와 전투가 일어나고 장교는 죽고 여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이 구해줘서 살아남는 결말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외계인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외계인에 대하여 긍정적인 경우는 ET나 트랜스포머, 슈퍼맨 등이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적 요소는 외계인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소통이 가능하기에 외계인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이야기가 나아간다고 봅니다.
반면 외계인에 대하여 부정적인 경우는 에일리언, 프레데터, 이 영화(스푸트닉)가 있다고 봅니다. 이런 유형의 영화의 공통점은 외계인들과 소통이 불가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외계인들은 특정한 본능에 따르도록 설정하여 그 규칙을 파악하며 인물들이 대응하게 합니다. 외계인과 상호작용하지 않고 대상으로 관찰한 후에 대응하는 방식입니다.
외계인이 영화는 이야기 진행에서 외계인이란 설정을 통한 예상하지 못한 행동과 특성을 보여줘 보는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한다고 봅니다. 이는 경험해 보지 못한 내용과 상상력을 활용하는 방법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은 우리의 고전 문학에서도 사용했습니다.
과거에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서 중국 여행과 관련 정보를 일반 사람들은 얻을 수 없었습니다. 중국 여행을 가는 길에 목숨을 잃기도 하고 보다 안전하게 가려고 국가 규모인 사신단과 함께 움직이기도 했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현실과 거리감 있는 이야기(고전소설)를 하는 과정에 중국 배경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편 환상의 세계(귀신, 도인, 지하 나라 등)를 제시하는 경우도 그 방향성이 비슷하다고 봅니다. 과거에는 외계인이란 존재에 대하여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 시대에 읽는 사람이 알기 어려운 중국이나 환상의 세계를 제시한 것이 오늘날 외계인이란 확인할 수 없는 존재를 활용해서 흥미를 유발하는 것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세분하여 소통이 가능한 외계인을 설정한 경우는 서로 다름을 조금 더 세밀하게 들어가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고 봅니다. 반면 소통이 불가능한 외계인에 대해서는 표면적 관찰을 통해 특성을 발견해 가면서 흥미를 유발하고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고 봅니다. 이 과정에서 외계인이 인간을 종족 번식이나 먹이로 생각하여 대등할 수 없는 관계를 설정합니다. 그리고 이 바탕에는 이성이 아닌 본능적 존재로 보기에 소통 가능성이 매우 낮은 배경을 설정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설정에서는 이 관계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흥미가 유발된다고 봅니다.
소통이 불가능한 외계인을 다루는 영화의 안에는 '무지에 대한 두려움'을 활용한다고 봅니다. 무지에 대한 두려움은 예측 불가능함이 원인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온 세상이 하얗다. 바둑이도 좋아서 이리저리 뛴다'와 같은 문장을 읽었을 때, 읽는 사람은 눈이 왔다는 것을 추론해 낼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 바둑이와 함께 있다고 하니 어린아이를 상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침에 담배 피우러 나왔다 풍경을 보는 사람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주어진 상황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추론을 합니다. 또한 최근 화상 회의를 통한 업무가 많아지면서 그에 따른 피로도의 원인이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볼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과 작은 딜레이까지도 우리 뇌가 인식하는 것에서 피로함을 느끼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이런 사례들을 근거로 할 때, 인간은 의식적 행동을 하는 경우와 하지 않는 경우 모두 현재 있는 상황을 바탕으로 추론(예측)을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동적인 추론으로 정보를 습득할 때 안정감(예측 가능함에서 유발되는 감정)을 느끼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에는 이러한 자동적인 추론이 불가능하기에 불안감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이 불안감은 느끼는 감정이기에 그 원인을 분명하게 규명하긴 어렵겠지만, 우리의 신체 일부를 다쳤을 때 통증이 자연스럽게 발생하거나 불편함을 느끼는 것과 같이 정신적 측면에서 자연스럽게 유발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소통이 불가능한 외계인을 다룬 영화의 재미 중 하나는 '무지에 대한 두려움'이고 또 다른 재미는 외계인과 싸우거나 관찰하면서 그 두려움을 하나씩 해결(외계인 특성에 대하여 알고 처치하는 과정)하는 것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개인적 의견이지만 소통이 불가능한 외계인 영화의 경우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장면이 당연히 많을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소통이 가능한 외계인이 나오는 경우 인물과 인물 사이의 생각의 대립과 절대적으로 큰 힘을 가진 외계인 악당으로 인한 삶과 죽음이란 두 가지 선택지가 제시됩니다. 하지만 소통이 불가능한 외계인 영화에서는 생각과 생각의 대립을 제시하기 어려우니 다양하게 인물들을 상처 입히거나 죽이는 과정에서 외계인의 특성을 파악하는 방식이 사용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삶과 죽음의 선택지)
영화에서 외계인을 활용하는 것은 창작을 쉽게 하고자 하는 하나의 장치라고 봅니다. 외계인이란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을 작가가 창작을 합니다. 이는 현실 세계의 논리를 무시할 수 있는 또 다른 논리적 장치라고 봅니다. 이렇게 현실적 조건(논리)을 외계인의 뛰어난 과학이나 초능력을 통하여 무시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외계인들만의 또 다른 논리를 만듭니다. 예를 들어 슈퍼맨은 크립토나이트라는 상상의 물질에 의하여 자신의 힘을 방해받습니다. 이렇게 만든 작중 논리만 지킨다면 슈퍼맨이 지구를 1초에 여러 번 돌거나 매우 큰 지반을 들거나 하는 등 비현실적 상황에 대하여 문제 삼지 않습니다.
스푸트닉은 에이리언 시리즈의 저예산 작품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극 중 흐름의 전환도 남녀 주인공이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서 이야기가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서 논리성이 부족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추천해 줄 수는 없는 영화였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간 보내기 정도는 좋은 영화였습니다.
첨언.
글을 쓰던 중 여의사와 '여'를 박사에는 붙이기 어색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는 사회적 관습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성차이에 대하여 불합리한 접근을 하는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의사는 다수가 남성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를 담고 있는 언어에도 당연 여러 의미 중에 의사는 남성이란 것을 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현대 여성 의사가 많아지니 의사와 여의사로 나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는 성차별적 접근할 것이 아니라 언어가 사회를 담아내는데 과거에 여성 의사로 진출할 길이 없었고 남아 선호 사상으로 학습기회도 주어지지 않아 사회에는 자연 여성 의사가 없거나 적었을 것입니다.
이와 비교하여 '여박사'라고 쓰려는 순간 매우 어색함이 느껴졌습니다. '박사'란 어휘가 매우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을 칭하며 '만물박사, 척척박사'처럼 일상에도 넓게 씁니다. 과거에 특정 분야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은 여성이나 남성이나 많아서 여의사와 달리 여박사라고 말하는 것에 이질감을 느낀 것은 아닐까 합니다. 반면 교수와 여교수는 자연스러운 느낌입니다. 이는 교수가 대학이란 특정 조직에 한정되어 쓰이는 경우가 많고 사회를 반영하는 언어의 특성상 초기에 여성 교수가 적었기에 교수라면 당연 남성이란 의미가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사회에 여성 교수가 없거나 적기에 교수란 개념에 여성 교수가 추가되면서 구분이 자연스럽고 이것이 박사와 다른 느낌이 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즉, 어쩌면 여박사란 말은 어색하고 여의사와 여교수라고 칭하는 것이 사회 현상을 담아내는 언어가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과정에서 드러난 현상이 아닐까 합니다. 박사이자 의사가 남자 여자 나오는 영화에서 줄거리 적는 중 의사라고 하여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 여의사와 의사라고 구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언어의 형성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이에 대하여 줄거리를 적으면서 의사(남)가 의사(여)에게라고 둘 다 '의사'라고 기술하여 혼란이 유발되는 것이 바른 일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