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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잡담] 나이팅게일

by 기록
출처: CGV 어플 원본 이미지 다운로드(

새해 마지막 연휴를 혼자 조용히 보내기 위해 1월 3일 조조 영화로 나이팅 게일을 봤습니다. 액션 영화 '뱅가드'는 개봉일에 보았기에 그것을 제외하면 영화관에 남은 영화가 '나이팅게일'이었습니다.


영화는 극 중 시나리오 영역으로, 문학에서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문학 작품을 감상하는 맥락과 영화를 보는 방법이 비슷하다고 봅니다. 영상이란 매체 특성을 고려하여 시나리오를 읽을 때, 영상의 장면을 상상하며 읽습니다. 또한 읽는 중에 대사와 행동에서 의도를 찾으며 감상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직접 영화를 보면 이렇게 지식적인 부분을 점검하며 보기 어렵습니다. 영상은 글과 달리 감각 기관에 직접 제시되고 일회성으로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에게 책 읽기 수업을 위해 원하는 책을 선택하라고 하면 자신이 본 드라마의 대본집을 고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밀의 숲'이나 '일진에게 찍혔을 때' '사이코지만 괜찮아' 등이 그 예입니다.

사소한 것부터 비교해 보면, 이들 대본집들은 일반 소설 책보다 5천 원 정도 더 비쌉니다. 그것이 찾는 사람이 적어서 그런지 아니면 창작 과정에서 더 어려움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미 드라마로 소비된 이후에 나온 대본집인데도 일반 소설보다 가격이 더 비싸다는 점이 보입니다. 드라마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와 작품 사이 관계를 생각한다면, 대본에는 드라마와 달리 간접 광고가 없어서 간접 광고비만큼 일반 소설보다 비싼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또는 드라마로 쉽게 볼 수 있는데 대본집을 찾는 것은 마치 여행지에서 사진을 남길 수 있는데 추가로 여행을 회상하기 위한 기념품을 구입하는 것처럼 대본집은 하나의 기념품 역할을 해서 보다 높은 가격을 책정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가와 극 작가는 공통적으로 이야기를 다룹니다. 반면에 사회에서 받는 영향력 차이로 창작하는 환경이 다르다고 봅니다. 소설가는 사회 속에서 문제 되는 장면들을 잡아서 이야기로 세밀하게 풀어내고 그 과정은 대부분 혼자서 진행합니다. 이와 비교해 극 작가는 창작을 끝낸 순간 영상으로 촬영되고(쪽대본 등) 다수에게 방송으로 전달이 됩니다. 그리고 작품에 대한 반응도 빠르게 받아 다음 이야기에 반영합니다. 소설가와 비교해 자신의 작품에 대한 반응을 빠르게 만날 경로가 항상 열려 있습니다. 또한 장소, 배우의 일정, 사회적 분위기 등 이야기 진행에서 단순히 상상력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중에도 특히 시청률(독자)의 영향을 소설가에 비해서 많이 받을 듯합니다. (단, 현재 새롭게 형성된 웹소설의 경우는 극 작가 분들과 차이가 적어졌다 봅니다.)


읽는 과정도 다릅니다. 드라마와 영화는 보는 과정에서 영상이 제공해주는 장면을 시각과 청각을 활용하여 수용하는 것이 주된 방법입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영상 중 인물 이외의 부분(소품 배치 등)에 중요한 이야기를 이끌어갈 단서가 있음을 읽고 깊게 봅니다. 반면 누군가는 읽어내지 못해서 이야기의 삐걱거림에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더 근본적인 차이는 소설은 읽는 사람이 상상해서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면 극에서는 이미 영상으로 세계가 만들어져서 보인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나이팅게일은 호주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래서 호주 테즈매니아 지역의 자연 풍경. 노예제도가 있던 옛날의 거리 풍경 등을 상상할 필요 없이 모두 보여줍니다. 반면 글로 읽었다면 독자는 영상으로 보여주는 세계와 다른 모습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예. 조앤 k 롤링의 새로운 작품 아카보그의 삽화는 아이들이 그린 서로 다른 아카보그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같은 글을 보고 서로 다른 상상을 했기 때문입니다. 21년. 1월 뉴스 검색)


다음으로는 내용면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원더우먼, 뱅가드, 나이팅게일이 최근 일주일 사이에 본 영화입니다. 나이팅게일의 영화의 성격은 분명히 두 영화와 다른 색을 지녔다고 봅니다. 호주 테즈매니아를 배경으로 여주인공의 가족이 살해된 마을에서 론스톤으로 가기까지의 복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 포스터를 보면 많은 평론가들이 극찬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평가 관점과 달리, 호주의 역사. 영화 정보에 대해 많이 모르는 위치에서 영화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환상성의 정도에서 세 작품은 차이가 있습니다. 원더우먼> 뱅가드> 나이팅게일 정도로 현실 반영 정도를 기준으로 나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더우먼은 초능력을 지닌 가상의 인물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이 영화를 보면서 현실 반영 정도에 대하여 문제를 삼지 않습니다. 뱅가드는 퇴역 군인을 모은 사설 경호업체의 활약상(중국 중심 사상의 홍보)을 담은 영화입니다. 따라서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지만 능력이 뛰어난 인물들이 나와 환상성을 어느 정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나이팅게일은 우리 주변에서 보이는 총을 이용해야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보통 인간이 나옵니다. 작가가 만든 것이지만 세 작품 중 가장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습니다.


이야기란 인물이 활동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중심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인물의 성격이 다르다면 이야기도 달라지고 감상 방법도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나이팅게일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호주에서 아일랜드 출신 두 부부가 죄인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미모가 뛰어나서 그 지역을 담당하는 장교의 노리개가 됩니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려면 통행증이 필요합니다. 남편은 통행증이 있습니다. 그러나 장교가 그의 부인에게는 3개월이 지나도 통행증을 발급해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아이를 낳은 이후로 계속 성적 노리개로 활용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 장교는 싸우게 되고 이를 진급 담당자가 봅니다. 그동안 많은 이유가 축적되다가 이 일도 보게 된 담당자는 진급 불가 판정을 내렸습니다. 장교는 여인의 남편 앞에서 여인을 강간하고 남편은 총을 쏴 죽이고 아기도 죽입니다. 장교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후 자신의 진급을 항의하기 위해 다음날 인사 결정권자가 있는 론스톤 마을로 출발합니다. 그래서 여인은 복수를 하고자 이들을 쫓아갑니다.


영화평 중에서 강렬하고 사실적이라고 하는 표현이 있는 이유는 성적인 부분과 여주인공이 살인을 하는 부분에 근거한 평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강간을 하는 장면에서는 여주인공이 남편과 아이 그리고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지 못하고 남자가 가하는 압박에 따라 몸이 흔들립니다. 표면적으로 저항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주인공은 죄인의 신분으로 자신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육체에 가해지는 폭력은 물론이고 정신적 폭력까지 버텨내고 있다고 봅니다. 아이를 출산한 이후 지속적으로 장교가 관계를 요구하고 이에 응해야 했습니다.(죄인의 신분, 통행증 필요의 이유) 그런데 그 이후 집에 가서 아이를 보고 남편을 보고 남편이 따뜻하게 아침에 깨울 때 일어나는 죄책감. 이는 정신적으로 행복해야 할 것을 행복해 할 수 없는 폭력의 작용이라고 봅니다. 주인공과 남편, 아기가 있는 아늑한 집에, 장교는 없지만 장교가 휘두른 폭력의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의 따뜻한 말과 아기의 미소 띤 시선에서 아픔(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 부분과 극 중 장교를 총으로 쏠 기회가 있는 장면에서 어긋남이 보입니다. 아마도 감독은 여주인공과 같은 폭력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으로 추측됩니다. 그 이유는 이후 복수극에서 세 명의 남자를 죽이기 위해 쫓아갔는데 셋 중 하나는 죽이고 두 명은 죽이지 않고 포기하려는 장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두 명 중에는 남편을 죽이고 아기를 죽게 만들었으며 자신을 성폭행한 장교가 있었습니다. 그 장교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여주인공은 오히려 도망치다 장교가 쏜 총을 팔에 맞습니다. 이는 한 명을 칼로 수차례 찌른 후에 개머리판으로 얼굴을 짓이겨 죽인 이후의 상황입니다. 이미 사람을 잔인하게 죽인 경험이 있는 선을 넘어버린 사람이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앞에서 겁을 먹었다는 것은 이해가 어려웠습니다. 영화 시간이 남았으니 이야기를 더 이어가기 위해 가장 악한 인물을 살려주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과연 작가 자신이 당한 이야기라면 총을 들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인물을 앞에 두고 도망가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할 것인가가 궁금해졌습니다.

한정된 정보를 가지고 굳이 해석을 해 보자면 주인공은 출산 이후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성폭행당할 때 받은 장신구들을 론스톤 마을에서 판매하려고 내놓는데 그 수가 한두 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근거로 한다면 정신적으로 새겨진 폭력의 상처 때문에 도망쳤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장교와 비교해 자신이 죽인 소위는 여주인공의 아이를 실수로 죽인 것과 개머리판으로 여주인공의 머리를 가격한 것 이외에 장교처럼 악행을 저지른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소위는 장교와 병장처럼 여주인공을 강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소위는 고통스럽게 죽이고 장교는 죽이지 못하고 그로부터 도망을 쳤습니다. 이는 장교에게 받은 장신구의 수만큼 고통을 받았기에 그 두려움이 커서 소위를 처리한 것처럼 대응하지 못한 것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강제로 성관계를 하고 화대처럼 장신구를 줍니다. 또한 자신만을 위한 노래를 부르라고 합니다. 총에 대한 제약이 없던 시대임을 고려한다면 물리적 힘의 차이 때문에 여주인공이 굴복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자신의 소중한 일상과 아기 그리고 남편이란 행복이 깨지지 않기 위하여... 통행증만 발급받으면 죄인의 신분이라도 다른 마을로 가서 새 출발 하겠다는 희망만으로 버티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그런 견디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는 것은 포기가 아닌 희망을 위한 몸부림이라 생각됩니다.


그렇게 술집 허드렛일을 하고 장교에게 당하면서 살아가던 중 어느 날... 남편은 3개월이나 참았다며 장교에게 아내의 통행증 발급을 간청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통행증을 발급해 주지 않자 남편은 당일 저녁에 술을 마시고 항의를 하러 갑니다. 그 과정에서 장교와 남편 사이 싸움이 일어납니다.

영화의 시대가 노예제도가 있던 과거의 호주였습니다. 그래서 장교는 죄수인 남자와 싸우고 죄수 하나 통제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진급 평가 온 상관에게 진급 불허 판정을 받습니다.

장교는 자신의 진급이 불허된 이유가 자신이 부하들을 잘 통솔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싸운 것은 진급 불가에 대한 하나의 원인일 뿐인데 이를 납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죄수 부부의 집에 쳐들어가 남편이 보는 앞에서 여주인공을 강간합니다. 이에 분노한 남편이 장교를 죽이려고 목을 조르니 밀쳐낸 후 총으로 쏴 죽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따라온 병장에게 여주인공을 강간하도록 허락합니다. 병장이 여주인공을 강간하는 동안 아기는 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장교는 자신을 따라온 소위에게 아기를 조용히 시키라고 합니다. 소위는 지금 눈 앞에 일어나는 일들의 충격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이성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시켜야 한다는 것만 생각해서 아이를 벽에 찍었고 아기는 죽었습니다. 여주인공은 아이를 출산한 이후 치욕스럽게 장교에게 몸을 빼앗기고 노래하라고 하면 노래하는 정신적 폭력이 지속되었지만 참았습니다. 그렇게라도 가족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진급에 탈락했다고 화가 난 장교 때문에 다 잃었습니다.

여주인공은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아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깨어난 다음날 여주인공은 마을 판사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지만 죄인의 말이기에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사회적 제도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음을 알게 된 여주인공은 직접 복수를 하기로 결심합니다.


이 부분을 보면서 합법적인 수단이 없을 때 일상을 벗어남을 보았습니다. 여주인공은 법(사회)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음을 알게 되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편이 3년간 노력해 구입한 말. 총을 들고 집을 나섭니다. 이렇게 나서는 여주인공을 본 친구는 막아도 안되니 조금이라도 도움되길 바라며 길잡이로 흑인을 데려가라고 합니다. 길잡이에게 부탁하는 상황인데 '야(BOY)'라고 부르며 돌을 던집니다. 그러자 판자로 만든 작은 상자 같은 집에서 사람이 나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에 흑인은 의뢰를 받지 않으려고 하지만 선금 1실링. 론스톤에 도착하면 1실링을 추가로 준다고 하여 길을 나섭니다.

같은 백인이지만 장교는 영국인 여주인공은 아일랜드인이란 것과 죄수란 점에서 백인이란 인종 내에서도 차별을 받았습니다. 그런 차별 속에 살아온 여주인공은 흑인에 대한 차별의 시선을 가지고 동행합니다. 백인 내에서도 백인과 흑인 사이에서도 차별이 있습니다. 호주의 과거는 그러한 시대임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흑인에 대한 차별적 행동들 중 가장 큰 부분은 부르는 말이라고 봅니다. 이름을 부르지 않고 나누는 말에는 인간에 대한 존중도 없습니다. 그저 'BOY(야)'라고 부르는데 소년이란 뜻으로만 알았지 영화를 통해서 그 말이 인간에 대한 무시가 담긴 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호칭이 인간에 대한 인식의 태도를 보는 시작점임을 다시 확인하는 기회였습니다. 이 영화를 보기 이전에 '삼포 가는 길'이란 소설을 읽은 경험이 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두 남자와 몸을 팔다 도망치는 여자가 우연히 만나서 함께 길을 갑니다. 가는 중에 서로의 어려운 인생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들고 마지막에 몸을 파는 여인이 자신의 이름이 '백화(가명)'가 아니라 '점례(본명)'라고 말하면서 여인이 마음을 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소설입니다. 학습 활동에서는 여주인공의 이름에서 드러나는 분위기(순수함과 갈보(창녀) 사이 거리감)와 서로 다른 타인들이 유대감을 갖는 것을 찾도록 합니다. 이 소설에서 부르는 이름의 변화와 인물의 관계에 따른 내용을 보았는데 호주의 영화에서도 그러한 장면이 나온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일상에서도 어떻게 부르느냐는 부르는 사람의 생각이 반영된다고 봅니다. 가장 흔한 일이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게 아줌마라고 불렀을 때 예의 없는 사람이 되는 상황이라고 봅니다. (이와 비교해 동일 상황 남성에게 아저씨라고 했을 때 상대적으로 반응이 적은 이유는 20대 초반에 '군인 아저씨'라고 불리던 시기의 학습 작용이 아닐까 합니다.)


나이팅게일의 여주인공(클레어)과 흑인(이름:망가나, 검은 새란 뜻)은 처음에는 돈으로 맺어진 관계였습니다. 여주인공은 복수가 목적입니다. 흑인이 필요한 이유는 복수 대상 셋을 추적하기 위함입니다. 흑인은 돈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길을 가면서 여주인공이 마을의 삶 이외의 경험이 부족하여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입니다.(거머리 처리, 물에 빠짐, 총기 정비 등) 이에 경험이 많은 흑인이 도와주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백인과 흑인이란 표면부터 시작하는 차이. 그리고 죄인이라도 백인이란 입장과 노예 또는 하층 계층인 흑인의 관계는 점점 모호해집니다. 여정 중에 인종 차이로 인한 차별이 모호해지는 계기는 물에 빠진 여주인공을 흑인이 구해준 일이라고 봅니다. 물에 빠졌을 때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사회적 기준(백인 우월, 흑인 노예)이 생기기 이전에 생명에 대한 마음, 인간의 본질(하나의 생명)을 본 측면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봅니다.


또한 여주인공은 갓난아기를 잃은 상황이라 복수의 여정 중에 모유가 계속 나와 가슴이 아픈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도 흑인이 모유가 마르도록 도와줍니다. 이렇게 여정 중에 도움을 주는 것 또한 흑인과 백인, 주인과 노예, 높은 신분과 낮은 신분 등 사회적 요인이 아닌 '인간'이기에 돕는다는 문제 해결법(휴머니즘)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이라고 표현하지만 더 들어가면 동등한 생명을 가진 대상이란 생각이 바탕이 된다고 봅니다. 이 범주가 더 넓은 사람들이 환경운동가분들이고. 동물과 인간을 동등하게 보기에 인간의 삶에 불편이 가해져도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라 봅니다.) 이전에 '보이'라고 부르며 편견과 경멸의 시작부터 존재하는 사회에서 만들어준 갈등 관계는 영화의 끝을 향하며 상처 받은 '두 인간'의 관계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는 관계로 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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