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먹을 때, 손을 움직이는 작업을 할 때, 게임을 할 때 심심하기에 무엇인가를 틀어 두게 됩니다. 기왕 틀어 두는 것 영어 실력이나 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틀어 두는데 그렇게 우연히 틀다가 어느덧 하던 일을 멈추고 재미있게 보는 다큐입니다.
72종의 위험한 동물들(라틴아메리카), 72종의 귀여운 동물들, 72종의 위험한 동물들(아시아) 등 왜 72종을 선별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72란 숫자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을 수도 있겠지만 단서가 없어서 의문을 일단 뒤로 밀어 둡니다.
이 시리즈를 보면서 관심이 가는 부분에는 하던 일을 멈추고 관심이 없는 부분은 그냥 흘립니다. 그러던 중에 기억나는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위험한 동물 중 지거병을 일으키는 모래 벼룩(chigoe)이 있다고 합니다. 이 벼룩은 모래에 살면서 사람들 발을 파고들어 살을 파 먹고 숙주 안에서 짝짓기를 하고 암컷이 알을 품어 커졌을 때 벼룩이 파먹은 부위가 썩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상처 난 부분이 함몰된 후에야 외부에 보이고 치료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 벼룩의 크기는 1mm이기에 처음 벼룩이 체내에 들어왔을 때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벼룩에 물린 할머니는 치료할 당시에 벼룩이 1천 마리 이상이 체내에 있었다고 합니다. 체내에서 살이 섞어 가니 나중에는 발과 손을 절단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한편 놀라운 것은 1천 마리 이상의 벼룩이 몸속에 있어도 연로하신 할머니께서 계속 살아계셨다는 것입니다. 이 벼룩에 의해서 상처로 감염되면 죽거나 사지를 절단해야 하는데 반대로 생각하면 가장 약했을 것이라 생각되는 할머니의 생명력은 죽음을 버틸 만큼 다른 차원으로 강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면 할머니께서는 죽음과 가까이 있어서 오히려 죽지 않고 견디시다 치료를 받으신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출처: CNN. 모래벼룩 제거하는 모습
이 영상에서는 모래 벼룩은 가난과 교육하고 관련이 있다고 제시했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했습니다.
가난은 위생용품 구비나 주거 환경에 영향을 주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육은 '교육받지 않아도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라는 생각으로 연결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보통 문명이란 것과 거리 있는 자연 친화적 삶을 사는 부족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 설명을 들어보니 가난은 신발을 살 돈이 없음을 뜻하고 교육은 위생에 대한 관념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육이란 화두가 제 시선을 붙잡게 된 시작점으로 생각됩니다.
가난은 해결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라 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무엇인가 주고 생산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 소비만 하기에 가난을 자연스럽게 벗어나기 어렵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 생산을 할 기회를 주고 소비되는 것을 줄여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교육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교육이 쓸모없다고 욕을 먹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모님이 교육을 받지 못해 어렵게 사회에서 자리 잡으셨다면 자식만큼을 공부를 시키려는 듯합니다.
교육의 범위에 대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듯합니다. 영화에서 보던 6.25 시절에는 손을 씻고 고루고루 먹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교육 내용이었습니다. 지금은 먹을 것이 너무 많아서 어떤 것을 먹는 것이 좋은지를 교육합니다. 교육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대입이 생각나고 국영수사과 수업이 생각나는데 모래 벼룩 편을 보면서 교육이란 것이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시작하고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란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보통 생각하는 수업 형태의 교육을 받지 않고 자연에서 사냥을 하며 살아가는 부족들도 교육이 이뤄지기에 그들이 계속 생존해 나간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전까지 교육이란 수업의 형태에서 교과서를 가지고 있거나 교과서에 있는 것을 기반으로 현장에 체험학습 나가 그것을 설명하는 형태를 교육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교육의 범주에 대하여 사냥을 하며 사는 자연의 법칙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의 자연의 법칙에 대해 배우는 것도 교육이란 관점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평이한 일상 중 어떤 계기가 생각을 바꾸고 행동 변화의 시작이 됩니다. 제 경우 이 영상에서 모래 벼룩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는 분의 인터뷰 중 가난과 교육의 문제라고 한 부분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맨발로 모래에서 놀면 안 된다는 아주 단순한 것을 사지를 절단하는 사람을 보면서 알지만 주변에 흔한 일이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모래 위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그리고 신발을 살 돈이 없다면 맨발로 다니다가도 집에서는 청결을 유지하도록 청소를 하고 발도 씻도록 하는 아주 간단한 기초적인 위생교육을 하는 등. 교과서와 수업이 아닌 대상자의 일상을 지켜주고 그리하여 불행에 빠지지 않게 하는 교육의 그 시작점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연 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뛰면 다친다고 알려줬는데 혼자 신나게 뛰다가 밀거나 당겨서 열 수 있는 강화유리문 손잡이에 머리를 부딪히고 우는 것이 초등학생입니다. 비 오는 날에 미끄러지지 않게 걸으라고 해도 뛰다가 넘어져서 팔꿈치로 바닥을 찍어도 뛰는 것이 초등학생입니다. 이렇게 하지 말라는 행동을 통해 자연적인 벌을 받으면 그것을 기억하고 그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하는데 아이들은 같은 행동을 반복을 합니다.
(여담으로 이런 행동에 대하여 행동자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공동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문제 행동에 대하여 보건실에 데려가 후속조치와 이후 하지 말라는 언급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상황에 대한 관리까지가 현재 교육 현장에서 요구받는 교육의 수준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알지 못할 때 또는 알아도 실천하지 않을 때 개입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모래 벼룩으로 인해 지거병에 걸리는 아이들은 이런 자연 벌을 받기 전에 안전하게 환경을 조성하고 환경 조성이 어렵다면 아이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이 교육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신체 발달이 정신의 발달을 앞서서 신체 활동에 대한 본능적 욕구가 더 커서 본인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임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 3학년 짜리가 자기 가슴 높이의 진열장을 파구르 하듯이 손을 짚고 뛰어넘습니다. 너무 당황해서 침묵이 흐른 후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물으면 모르겠다고 합니다. 이런 유사 행동의 반복 사례를 통해 보면 성인도 컨디션이 좋으면 달리기 욕구가 생기고 운동을 싫어하는 사람은 걷기와 같은 야외 활동이 심리적으로 동요하듯이 아이들도 신체 능력이 뛰어나니 자연스럽게 신체 능력을 쓰고 싶다는 본능에 따른 것이란 잠정적 결론을 내렸습니다.)
영상을 보면서 주변에 모래 벼룩으로 사지 절단을 해도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고 맨발로 돌아다니고 씻지 않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 그리고 모래 벼룩 천마리 이상이 몸속에서 계속 번식해도 계속 삶을 이어가는 할머니 사례를 보면서 교육의 필요함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업에서 받는 교과서 내용만이 교육이 아니란 잊고 있었던 교육에 대한 생각과 그 범주를 달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벼룩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해충이라고 규정하지만 이는 인간의 관점에서 해충일 것입니다. 이 벼룩은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종들처럼 동등하게 우연히 생명을 부여받고(단세포가 수중에서 점차 발달해서 육지로 나오는 관점 등을 근거) 자기 나름으로 환경에 적응을 계속하고 가장 적합한 삶의 방식이 지금이라 결론 내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동물에 기생하여 살을 파고들어 알을 낳고 번식을 하는 것이라 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의 기준으로 위험한 동물이며 해충으로 규정한다고 봅니다. 자신이 태어나서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이어가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이러한 인간 중심적 해석에 대한 의문은 저만이 아니라 봅니다. 이미 많은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악당(이것도 인간 기준이라 봅니다. 지구 입장에선 구원자일 수도 있습니다.)들이 제시하는 근거가 인간은 지구에 있는 어떤 생물보다 가장 지구를 빨리 많이 파괴하는 생물임을 제시합니다. 이는 일반 사람들보다 삶을 성찰하는 것에 민감한 작가분들이 일반인들과 다른 관점에서 보고 의미 있다 생각한 부분을 제시한 것이라 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제시한 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서 작품으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공유된 작품을 보고 또 다른 작가도 그 생각에 동조해서 인간을 멸망시키려는 이유로 인간이 지구의 자원을 함부로 사용하고 함께 살아가는 생물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들을 근거로 작품을 제시하는 것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작가만이 아니라 이와 유사한 작품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은 그 이야기에 공감하는 독자들도 있어 수요에 맞춰 유사 작품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이라 봅니다. 이런 작품들에서 악당(인류를 멸망시키려는 존재)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그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악당이 말한 지구를 멸망시키는 존재가 인간이란 것을 내심 인정하고 누가 악당인지 약간의 혼란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악당이 죽음을 맞이하지만 지구가 죽음을 향하는 길이 멈춰진 것은 아님을 알 고 있습니다. 현재 수십억의 사람들 중 일부가 그것을 알기에 지구를 살리자는 환경 운동을 하지만 그것도 지구를 살리는 것이 아닌 지구의 파괴 정도를 늦추는 활동임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생태계 순환을 시키지 못하는 물질들을 만들어내고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빌려서 본다면 해충인 모래(지거) 벼룩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지거병은 지구의 입장에서는 인간이란 개체수를 줄이려는 방식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구의 입장에서는 어떤 생물이든 상호 연관을 가지고 있으며 일정 개체수가 많은 것은 인간의 입장의 정의가 아닌 지구 입장에서 문제가 되는 일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래 벼룩이 환경에 맞게 적응하고 모래에서 사니 먹을 것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육식을 택하고 육식을 해야 하는데 사람들의 개체가 늘면서 그 대상이 자연스럽게 인간이 되었다는 해석도 해 봅니다.
어떠한 관점이든 모래 벼룩은 그저 자신이 태어난 본성대로 살고 있고 이것에 대하여 해충이고 위험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인간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72종 동물 이야기에서는 현실과 환상을 섞은 드라마나 환상적인 세계를 더 많이 가미한 애니와는 다르게 실제 우리가 사는 세계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몰랐던 세계의 일부를 알려주기에 재미가 있습니다. 특히 위험한 생물들 이야기를 듣는 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도시란 공간에서 인간 중심적으로 환경을 안전(?)하게 만들어 자연의 위협을 차단한 상태라고 봅니다. 이런 안전한 공간 속에서 온전히 자연의 세계를 보여주면서 그 안에서도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전갈, 뱀, 악어 등의 모습을 보여주며 일상 중 경험하기 어려운 공포의 감정을 떠올려 준다고 봅니다. 이런 공포의 감정은 평이한 일상을 살아가는 인간이란 동물에게 밀어 두었던 본능을 자극하고 이것은 평소에 잠시 꺼두었던 감정의 스위치를 올리는 것이라 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부러 익사이팅 스포츠를 체험하는 직접적 방식과 달리 간접적인 방식으로 일상에서 결핍된 무엇인가를 채우는 방법이란 생각이 듭니다.
단순 작업을 하거나 게임을 하면서 무서운 동물 시리즈를 틀어 두는 것은 좋지만 이것이 사람이 다치는 상황이나 피를 보여주거나 질병에 걸린 상황을 보여 주기에 밥을 먹으면서 보기에는 많이 불편합니다. 왜 밥을 먹을 때 잔인한 것들을 보면 식욕이 떨어지거나 기분이 나쁜지에 대해서 설명한 글을 본 적은 없습니다. 우선은 현상적으로 그런 경험을 하며(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밥을 먹는다는 것은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활동이며 동물들이 먹이를 먹을 때 빼앗기지 않게 주변을 살피고 안전한 환경에서 먹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인간에게도 깊이 새겨진 것이라 봅니다. 브레인 차일드(네플 리스)를 볼 때 인간이 느끼는 맛 중에서 신맛에 대한 놀라는 반응은 음식을 보관하기 어려웠던 시기 상하기 전의 상태에 대한 신호로 각인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쓴 맛은 독에 대한 각인이 거부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방향성을 가지고 해석해 본다면 밥을 먹으면서 위험한 동물 72종과 같은 프로그램을 보는 것은 안전한 상황에서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활동을 하는 것에 거부감을 주고 식욕을 낮추기에 꺼려하는 것이라 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와 반대 성격인 귀여운 동물 72종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