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CGV 어플 원본 이미지 다운로드플로리다에서 듀런티는 57세에 생을 마감한다.
가레스 존스는 내몽골에서 체포되어 30세 되는 생일 하루 전에 총살당한다.
영화의 끝...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여느 영화들처럼 영화 뒤에 실제 어떻게 결론이 났는지 보여주는 자막이 나옵니다. 씁쓸함과 함께 이런 결말이 나오니 더욱더 현실적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상의 많은 이야기들에서 영웅을 만들고 수많은 영웅이 있다는 것은 현실에서 현실에 있는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서 일어난 현상이라고 봅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나 바람에 대하여 정신적으로 위안을 얻고자 하는 것도 영웅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이유 중 하나라고 봅니다.
문학 속 영웅(고전소설, 현대소설, 드라마, 영화 등)들은 모두 특별한 능력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힘은 현실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와 제약을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힘입니다.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육체와 정신 모두 억압당합니다. 이런 상황 속, 정신이라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다양한 영웅들을 만들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찾는 것(독서, 영화 관람)은 현실에서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감정적 위로를 받는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영웅 이야기(문학)를 즐기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여담으로 인간은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하여 이질감을 가지는 성향 있다고 봅니다. 초등학생 4학년을 대상으로 이야기 만들기를 할 때, 창작한 인물이 괴롭힘을 받는 상황을 학생들이 설정했습니다. [동화책처럼 사소한 다툼과 해결을 바랐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보는 영상이 자극적이기에 학생들이 만든 이야기 내에 폭력적인 갈등이 들어갑니다.] 구성의 조건을 맞춰야 하기에 괴롭힘을 받는 이유를 제시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다른 모습'때문에 인물이 괴롭힘을 받는다는 투표 결과에 근거해 이야기를 만든 일이 있습니다.
화상을 입으신 분들의 인터뷰에서 외모 차이를 가지고 차별하시는 분들에 대한 어려움을 말씀하십니다.(그 외 겟 잇 뷰티 등의 안타까운 사연 참조) 이를 근거로 인간은 자신과 다른 모습에 대하여 이질감을 느끼는 속성이 있다고 봅니다. 한편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서 극 중에서 차별받는 영웅이라도 관객은 그 인물에 대하여 친근함을 느낍니다. 이는 극 중에 보이는 평범한 인간과 같은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이나 악당이란 문제 앞에서 어려움을 겪는 모습이 일반 사람들과 유사하기 때문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또한 앞서 말한 현실에서 할 수 없는 일들을 대신하는 감정적 위로를 주기에 이질적 존재인 영웅에 대하여 호감이 드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상상력을 더해서 생각해 보면, 가레스 존스처럼 특별한 능력이 없는 사람도 그러한 영웅들의 이야기를 듣고 영향을 받아서 현실에서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가 영화 중에서 유년시절 알게 된 시를 인용하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그 시를 들면서 다른 이야기들도 함께 전달받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 지녔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그가 올바름을 추구함에 있어 듀런티의 마약파티와 같은 유혹을 뿌리치고 진실을 대가로 하는 부유한 삶도 포기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한편 동네 꼬마들이 거짓말쟁이라고 조롱하는 상황에서 삶을 마감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마음속에 지닌, 이야기 속 인물들의 위안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야기는 가레스 존스란 외교부 고문(조지란 인물이 핵심 책임자)이 스탈린의 국가 경영에 대하여 문제가 있음을 느끼고 영국 정부에 그 상황에 대한 대응이 필요함을 언급합니다. 당시 스탈린은 새로운 체제에 대하여 실험하여 공동 농장, 무상 '교육과 병원' 등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크렘린 궁은 파산을 했는데 스탈린은 파산하지 않고 계속 이 체제에 대한 실험을 합니다. 게다가 성공적이라고 모스크바에 파견 나간 언론들이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납득할 수 없었던 존스는 문제를 제기했으나 다른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혼자만 다른 의견을 낸다고 외교 고문 자리에서 해임됩니다. 해임이 되며 마지막 부탁으로 그는 자신의 상관에게 모스크바로 갈 수 있게 도와주길 청합니다. 상관은 존스에게 그동안 노고를 생각해 추천장 하나를 줍니다. 그리고 존스는 자신의 생각에 대한 증거를 찾으러 모스크바로 향합니다.
모스크바에 도착했는데 무엇인가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비자를 발급받는데 소련에서 좋은 호텔을 잡아 준다고 합니다. 그 고급 호텔 도착해 체크인하는데 2일만 예약이 되었고 남은 기간은 영국 회사가 호텔을 전세 내서 쓴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연히 본국(영국) 회사 사람을 만나 물어보니 자기네 회사에서 호텔 객실을 전부 대실 한 일이 없다고 합니다. (언론 통제 때문에 외국인들을 모두 모스크바 내 통제된 호텔에서 묵도록 조치했으면서 정보가 새 나가지 않으리라 기대하는 것이 이상합니다.)
이후 모스크바 뉴욕 타임스 지부장이자 퓰리처 상을 받은 월터 듀런티를 찾아가 자신이 히틀러를 최초로 인터뷰했듯이 스탈린을 인터뷰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을 청합니다. 듀런티는 모스크바에 있는 뉴욕타임스 지부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듀런티는 한 나라의 지도자를 만나기는 어렵다면서 거절합니다. 대신 자신이 주최하는 파티에 오라고 초대합니다. 그리고 모스크바에 오기 전 통화하다 갑자기 통화가 끊긴 친구 기자의 죽음도 알려줍니다. 모스크바에서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후 존스는 듀런티의 파티에 참가해서 모스크바 밖으로 취재 갈 수 없다는 정보를 파티 참가자를 통해 얻었습니다. 그리고 파티장을 나서는 중 여기자 브룩스를 만나고 그녀와 몇 번의 만남과 이야기 끝에 죽은 친구 기자의 수첩과 정보를 얻었습니다. 언론인은 모스크바를 나갈 수 없게 통제된 상황, 죽은 친구의 마지막 취재 계획지는 우크라이나였습니다. 그래서 존스는 이곳에 갈 계획을 세웁니다.
자신의 상관(조지)이 써준 추천장의 문구를 조작하여 전임 외교 고문이었음을 숨기고 현재 외교 고문인 것처럼 스탈린에게 접근합니다. 스탈린은 영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소련의 실상을 숨기고자 감시를 붙여 거짓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존스는 스탈린의 재정이 건재하며 루블화의 가치가 여전히 유효한 상황에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고자 영국에서 모스크바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진실을 보기 위해 감시를 피해 호화로운 기차에서 일반 사람들이 타는 다른 기차로 옮겨 탑니다.
기차를 타고 분위기는 이상하지만 별생각 없이 안도하며 가방에 싸온 과일을 까서 먹습니다. 과일 껍질을 버리는데 기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그 껍질을 먹으려고 달려듭니다. 이에 존스는 놀라고 아이들은 그에게 먹을 것을 청해서 존스는 먹던 과일을 줍니다. 존스는 위장을 위해 옆사람의 옷을 돈 주고 사려고 하지만 이미 돈의 가치가 없는 상황이기에 빵 한 덩이와 털외투를 바꿉니다. 이미 소련의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존스가 보는 현장은 참혹합니다. 여기저기 얼어 죽은 사람들이 즐비하고 얼어 죽은 이들을 짐처럼 수레에 싣습니다. 엄마가 얼어 죽어서 혼자 남은 아기도 이 시체 수레에 함께 짐짝처럼 얹습니다. 빵 한 덩이를 위해 주먹질이 오갑니다. 그리고 죽은 오빠의 인육으로 어린 남매들이 배를 채웁니다. 우크라이나에 취재 오기 전 잠시 들린 듀런티의 파티에는 술과 마약 그리고 추운 소련에서 난방을 너무 해서 속옷만 입고 있어도 되는 상황입니다. 이런 모스크바 안과 밖의 대비는 정상적이지 않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영화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중간중간 삽입하였습니다. 그래서 스탈린이 모스크바 삶을 위한 재화들의 강탈과 평등한 삶을 위한 '혁명'이란 이상으로 속이는 모습을 소설과 함께 생각하도록 했습니다. 동물농장에서 동물들이 평등한 삶을 위해 인간을 쫓아냈지만 돼지가 권력을 잡고 개들을 이용해 본인들만 부유하게 삽니다. 그리고 다른 동물들을 굶주림 속에서 통제합니다. 이 이야기처럼 스탈린과 그의 측근들만 부유한 삶을 지내고 모스크바 밖에서는 기아로 죽어갑니다.
존스는 빵을 배급하는 곳에 가서 언제부터 기근이 심각했는지 취재하는 도중 스탈린의 부하들에게 잡혀서 스탈린 앞에 섭니다. 스탈린은 그에게 본 것들에 대하여 거짓말을 할 것을 요청하고 진실을 말하면 여섯 명의 영국 기술자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합니다. 이에 존스는 영국으로 돌아와 진실을 말하고 여섯의 자국민을 죽일 것인지, 나무껍질을 벗겨 먹으며 취재할 때 만난 인육까지 먹는 굶주린 타국의 수십만 명을 살릴 것인지를 고민합니다. 고민 끝에 더 많은 타국의 사람들을 살리기로 결심하고 진실을 말합니다. 이 진실을 들은 소설가 조지 오웰은 충격을 받습니다. 자신이 생각한 이상적인 세계의 실현을 위한 시행착오는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실상은 너무나도 참담했기 때문입니다. 영화이기에 남매가 자신의 형제의 시체로 수프를 만들어 먹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이는 여러 취재 내용 중 한정된 상영 시간에 담고자 선택된 사례일 것입니다. 아마 더 안타까운 사연은 많았을 것입니다.
현실은 상상의 세계가 아닙니다. 진실과 정의가 언제나 승리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실과 정의를 희망하고 이를 지키고자 노력합니다. 가레스 존스의 진실은 뉴욕 타임스의 권위와 퓰리처 상의 위엄을 지닌 월터 듀런티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듀런티는 모스크바의 부유한 삶과 진실을 바꾼 거짓을 말했습니다. 그의 거짓은 진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을의 어린아이들까지 가레스 존스를 거짓말쟁이라 했고 존스는 불합리한 상황에 무력감을 느꼈는지....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쟁이라 놀려대는 아이들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뉴욕 타임스 이외 다른 신문사들도 가레스 존스가 거짓말을 했다고 거짓을 보도합니다.
존스는 고향에 있는 작은 신문사에서 조용하고 침울하게 보냅니다. 그러던 중 뉴욕 타임스의 경쟁 신문사의 대표가 자신의 고향에서 휴가를 보낸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를 찾아갑니다. 그 대표는 가레스가 말한 신문 기자의 죽음과 그가 경험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근거로 뉴욕 타임스와 싸우기로 결정합니다.
다행히도 경쟁 신문사의 권위를 활용하여 가레스 존스란 개인은 진실을 세계에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악행에 대한 값을 치르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월터 듀런티는 플로리다에서 노년을 보내다 생을 마감하고 우리가 바라는 올바름 없이 현실은 끝을 맺었습니다. 월터 듀런티의 (저널리스트의 명예인) 퓰리처상은 여전히 취소되지 않고 수상한 그대로라고 합니다.
신문 방송학과가 있지만 그 학과를 나온다고 기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자는 국가가 지정하는 어떠한 자격 과정이나 시험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될 수 있는 직군입니다. (기존 언론사부터 개인이 인터넷 신문사로 등록하는 경우 등) 아마도 인간 세상의 모든 분야를 다뤄야 하고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은 진실을 전달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소속된다면 어떠한 영향력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레스 존스는 언론사 소속 기자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존스처럼 언론사 소속보다는 자신이 조사한 내용을 전달하는 기자들(유뷰브 활용)이 더욱 신뢰를 받는 시대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 판단은 그 정보를 받는 사람들이 합니다. 거짓을 보는 순간에 판단을 잘못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올바른 방향을 찾아가고자 하는 노력이 이어집니다. (일반인이 반박 자료를 담은 게시물을 작성, 당사자의 SNS 게시물 비교 등)
가레스 존스의 이야기는 지금도 이어진다고 봅니다. 거짓을 전달하는 사람들은 올바름에 대해 접할 기회가 적어서 월터 듀런티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또는 시작부터 월터 듀런티를 목표로 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세계적 수준으로 진실이 거짓이 되는 역사를 본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현실의 이야기는 우리가 듣고 읽는 이야기처럼 상냥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현실은 올바름을 상관하지 않는데 가상의 이야기는 왜 올바름을 추구하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퇴고 중 갖게 된 생각으로 작성하는 여담입니다. 현재 사회적 분위기를 근거한다면 줄거리 제시 중에 '여기자'가 아니라 기자 브룩스라고 적는 것이 더 옳은 제시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이는 기자란 직업에 대하여 일부 단체들에서 문제 삼는 성차별적 인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 두고 읽기를 해서 사용할 당시에 대한 정확한 의도는 기억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 영화 중에 존스와 브룩스 사이 미묘한 감정도 한 부분을 차지했고 그것을 떠올리며 적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의 건의사항 수렴 중에 여선생님(50대)께서 말씀하실 때 여성은, 남성은이라는 방식으로 발언하신 것도 문제가 되어 사과를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인식에 대한 구분점이 사라지는 것을 좋은 방향이라고 한다면... 그 과정도 (좋은 의도에 맞춰) 조금은 상냥해졌으면 합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구분 짓지 말자고 알려주는 지식들을 별도 강의로 배우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성과 관련된 부분에 대하여 민감성이 이전 시대보다 높아진 사회라고 봅니다. 그래서 그 민감성이 우선시 되어 여선생님의 세대에 대한 배려는 없고 성차별에 대한 기준이 우선 적용된 듯합니다.
이전 '나이팅게일'에서 백인 여성 죄수와 흑인 남성 원주민(노예 계층. 망가나는 노예는 아님)이 서로의 인종과 사회적 계층(망가나는 노예는 아니었기 때문) 차이로 인한 문제는 '인간'이란 더 넓은 기준점으로 포용되었습니다. 우리의 일상 중 문제들에 대해서도 일부는 고쳐나가면서 그 방식에 대하여 상냥해졌으면 합니다. 예를 들어 건의 사항에 대하여 전교생이 모인 상황에서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하여 자신이 받은 상처에 대하여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방법보다 익명으로 문제를 제기한 학생의 의견을 공유하고 해당 발언을 나이가 있으신 여선생님께서 하실 때마다 학생들이 '선생님'하고 신호만 주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변화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 과정은 조금 상냥해졌으면 합니다. (기왕이면 남성과 여성과 같은 이분법보다는 '인간'이란 조금 더 큰 범주로 접근했으면 합니다.) 퇴고 중 '여기자'라고 쓴 부분에서 그것이 성차별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를 생각하며 적은 여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