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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꽁치킬러 Feb 07. 2022

채식주의자와 삽니다

스위스와 한국에서의 채식 생활 

스위스인인 남편은 한참 꼬꼬마시절인 5살에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86년생이니 30년 넘게 채식주의자로 살고있는 셈이다. 계기는 이러하다. 

당시 스위스 많은 유치원들이 그랬듯, 남편이 다니던 유치원도 인근 농장으로 소풍 겸 나들이를 갔다. 마당에서 농장의 가축들을 구경하다, 헛간 쪽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호기심이 생겨 헛간 문을 열어본 5살의 남편은 보지 않아도 좋았을 장면을 보고만다. 농장에서 키우던 돼지의 멱을 따고 있었던 것. 

낙농업이 발달한 스위스에서는 농장 대부분이 소, 돼지, 닭을 키우고, 우리나라도 그랬듯 농가에서 직접 돼지를 잡는 건 매우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유독 예민했던 5살 아이의 눈에 공중에 매달려 꽥꽥 소리를 지르며 죽어가는 돼지의 모습은 너무나 큰 충격과 공포였고, 남편은 엄청난 트라우마에 빠지고 말았다. 

그 날 이후, 집에서 고기로 보이는 요리가 올라올 때마다 남편은 시부모님께 물었다. "이거 뭘로 만든 거예요?" 시부모님으로부터 돼지고기나 쇠고기 요리라는 답을 들으면 남편은 그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샐러드나 파스타만 먹었고, 그렇게 30년 이상을 꾸준히 채식주의자로 살아왔다. 

채식은 '풀떼기'로 취급하는 한국의 분위기, 그리고 바닷것을 즐겨 먹었던 집안 특성 상 성인이 될 때까지 채식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었던 나는 2011년 캐나다로 유학을 가면서 홈스테이 가정을 통해 서양의 채식 세계를 알게 됐다. 내 홈스테이 맘은 동물성 식품 섭취가 불가피한 상황(어쩔 수 없는 행사나 명절 등)에만 섭취하는 '플렉서블 베지테리언'이었고, 그래서 그 집 식탁에는 버터 대신 마가린, 우유대신 두유, 고기 대신 두부가 자주 올라왔다. 아이들을 위해 가끔 고기를 요리하지만 대부분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는 홈스테이 맘과 채식 이야기를 나누고, 그의 음식을 먹으면서 채식주의자의 생활에 익숙해진 나는 남편과의 첫 데이트에서 남편이 채식주의자라고 밝혔을 때에도 놀라거나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고기를 매우 좋아하거나 많이 먹는 식성이 아니었던 점도 한 몫 했다. 그렇게 함께 캐나다의 채식 맛집을 찾아다니면서 채식은 내게 더욱 친근해졌고, 덕분에 스위스로 이주해서도 일주일에 3~4일은 채식을 실천하며 채식주의자와 어울려 살고 있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스위스를 비롯한 이곳 유럽 국가에서는 채식주의자로 사는 게 전혀 어렵지 않다. 모든 식당은 종류를 불문하고 채식주의자를 위한 메뉴를 적어도 한 가지 씩은 구비하고 있다. 워낙 채식주의자가 흔해서, 추구하는 채식 형태(채식주의자는 동물성 식품을 전혀 먹지 않는 비건/유제품과 달걀은 먹는 락토 오보/생선과 해산물까지 먹는 페스코로 크게 나뉜다)에 따라 메뉴에 비건인지, 락토 오보인지도 그림과 함께 친절히 표시해주어 선택이 편리하다. 이러니 남편과 일반 식당에 가도 따로 채식 요리를 부탁할 필요 없이 남편은 채식주의자 메뉴에서, 나는 일반 요리 메뉴에서 고르면 된다. 동물의 안녕을 생각하여 뜨거운 물로  가재를 삶아 죽이는 요리법을 금지한 국가답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채식 식당도 바로 스위스에 있는데, 1898년 문을 열어 현재도 운영 중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채식 식당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하우스 힐틀>이다. 

취리히 도심에 여러 분점을 갖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채식 식당 <힐틀>

워낙 규모가 크고 인기를 누리는 식당이다보니 자신들만의 노하우와 레서피를 담은 요리책을 발간하고, 요리에 쓰이는 양념, 재료들을 따로 판매하기도 한다. 고기, 생선이 한 점도 들어가지 않은 식물성 식재료만으로만 만들지만 육식주의자가 먹어도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맛있고 기발한 요리들이 많다. 

식당 뿐 아니라, 동네 슈퍼마켓만 가도 콩을 이용한 대체육 제품이 매우 발달되어 있다. 

스위스 슈퍼의 양대산맥, 콥coop과 미그로Migros에서 파는 채식 소시지 & 채식 돈까스 

대체육 종류도 무척이나 다양해서, 소시지나 돈까스 같은 기본 제품은 물론 닭가슴살 모양을 본딴 스테이크, 진짜 불맛이 나는 햄버거용 패티, 고기와 비주얼에 차이가 없는 콩 다짐육, 생선 식감 스틱, 당근으로 만든 가짜 훈제연어 등 선택의 폭도 넓다. 채식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 채식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거부감 없이 다가갈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게 특징이다.    
이처럼 언제, 어디서나 채식을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인지라 채식주의자가 '유난을 떤다'고 눈총 받을 일도 당연히 없다. 

그렇게 자유롭고 편안하게 채식주의자로 살던 남편은 한국인인 나와 결혼한 뒤 한국을 방문하면서 난관에 부딪히는 일이 많아졌다. 대부분의 식당이 채식 메뉴를 구비해 놓고 있지 않은데다, 채식에 대한 개념도 아직 잘 잡혀있지 않아서 채식주의자라고 하면 단순히 '요리에서 고기만 안 보이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채식주의자에겐 눈에 보이는 고기 뿐 아니라, 육수나 젓갈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고기나 해산물도 문제다. 당연히 고기 국물로 맛을 낸 냉면이나 된장찌개는 먹지 못하고, 많은 한국인들이 '채식음식'이라고 생각하는 김치조차 젓갈 때문에 먹지 못한다. 다채로운 먹거리 역사는 물론 바다와 평야, 산을 모두 갖춘 자연환경 덕에 식재료가 풍부한 미식 국가 한국이지만, 채식주의자에게는 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는 일부터가 고난이다. 그나마 제일 주문이 쉽고 식당 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음식이 비빔밥 뿐이라, 한국 여행 중 비빔밥만 4일을 내리 먹은 적도 있다. 도시에서는 피자, 파스타 등 대체할 수 있는 음식도 많지만, 바닷가 인근 소규모 여행지의 경우 회덮밥, 바지락 비빔밥, 홍합미역국, 물회 등 해산물이 들어간 것만 있어서 맨밥에 초장만 뿌려 먹은 적도 많다. 우리나라처럼 식재료가 다양하고 먹는 것에 진심인 국민들도 없건만, 채식주의자가 살기에는 아직 팍팍한 환경이라는 사실이 난 너무도 안타깝고 아쉽다. 고기 전문점이나 회 전문점을 제외하고 식당마다 채식주의자가 먹을 만한 메뉴 하나씩만 구비해줘도 내국인, 외국인 채식주의자들이 훨씬 더 만족스러운 식문화를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현재 우리나라는 '기분이 저기압일땐 고기앞으로 가라'는 우스개, 1인1닭, 고기를 찬양하는 음식 프로그램 등 점점 더 고기 소비를 권장하고 당연시하는 분위기로 흘러가는 것 같다. 고기를 먹지 않으면 까다롭고 불편한 사람이라는 정서가 형성되다보니 채식을 실천하고 싶어도 주변의 눈치 때문에 용기내지 못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난 다채로운 식재료와 유구한 음식 전통을 지닌 대한민국의 식문화가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특히 한국은 다른 국가와 차별화된 '사찰음식'이라는 매력적인 채식 문화가 존재한다. 사찰음식은 세계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한국만의 고유한 채식 문화다. 맛과 멋, 건강을 모두 만족시키는 세계 최고의 비건 채식요리가 바로 사찰음식이다. 이처럼 멋진 채식 문화를 가진 우리나라에서, 더구나 단군 이래 가장 잘 먹고 잘 사는 현재 다들 고기만을 미식의 최고봉이라고 여기는 사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지금처럼 고기를 폭발적으로 소비하다보면 기후 변화도 앞당겨진다는데, 굳이 채식주의자가 되지 않더라도 스위스처럼 채식이 자연스럽게 일상화된 분위기가 이루어지면 국가적으로도 큰 이득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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