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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꽁치킬러 Mar 18. 2022

스위스에서 '용자'된 썰

-이름이 뭐예요?

"Wie heissen Sie?(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스위스에서 내 이름을 말해야 할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상대방이 못 알아듣고 되물을 확률이 100%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종하’다. 한국에서 주로 남자들이 쓰는 이름이다. 심히 가부장적인 시대와 집안에서 태어나 한평생을 가부장으로 살다 가신 아빠는 21세기에 만고 쓸데 없는 족보와 항렬에 집착, 자식 넷 모두에게 돌림자인 ‘종’자를 고집스레 붙여주셨고,  예쁨의 한계가 있는 ‘종’자 이름의 특성 상 결국 나는 여자 아이에겐 매우 흔치 않은 이름을 갖게 됐다. 얼마나 흔치 않았는지, 이름과 생년으로 회원을 검색할 수 있었던 싸이월드 시절 내 이름과 같은 여성 동명이인이  대한민국에 단 한 명도 없을 정도였다. 
 덕분에 초, 중, 고, 대학교를 거쳐 직장인이 되어서까지 별명은 ‘쫑’과 ‘쫑마늘’을 벗어나지 못했고(사람들 상상력의 한계일까), ‘종화’, ‘종아’로 잘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보다 더 많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나름 유니크한 내 이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흔한 이름보다, 나름 중성적이고 개성도 있는 내 이름에 은근한 자부심도 느꼈다. 
 문제는 해외에 나가면서부터였다. 영어로 Jongha로 표기하는 내 이름은 외국인들에겐 너무나 생경한 철자 조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2003년 미국에서 일할 때는 부르기 쉬운 영어 이름인 ‘유니스(Eunice)’를,  2011년 캐나다에서 공부할 때는 좋아하는 영어 이름인 ‘재스퍼(Jasper)’를 썼다. 때에 따라 성인 ‘킴(Kim)’을 영어 이름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서양문화권에도 있는 이름이고, 무엇보다도 부르기 쉬워서 이름이 뭐냐는 되물음을 받을 필요가 없어 너무 편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머리가 굵어지자,  ‘내 자신에게도 낯선 영어 이름 대신 한국에서 부르는 내 한국 이름을 그대로 썼어야 했는데’하는 후회가 찾아왔다. 이름은 곧 내 정체성이기도 하잖은가. 그래서 ‘이제 어디서나 자랑스럽게 내 한국 이름을 말해야지!’라는 각오로 남편의 나라 스위스에 정착했다. 
... 그런데 각오는 각오일 뿐이었다. 독일어권인 스위스에 오니 망할 ‘J’가 발목을 잡았다. 
 독일어에서 J는 영어와 달리 ‘ㅈ’발음이 아닌 ‘ㅇ’발음이 난다. 영어의 ‘Yes’에 해당하는 독일어 ‘Ja’ 는 ‘자’가 아닌 ‘야’로 발음해야 한다. 법학을 뜻하는 독일어 ‘Jura’ 는 ‘주라’가 아닌 ‘유라’로 발음하는 식이다. 
 이처럼 평생 J를 ‘ㅇ’으로 발음해 온 이곳 사람들에게(시가 시구들 포함) Jongha로 표기하는 내 이름은 당연히 ‘종하’가 아닌 ‘용가’였고,  개인의 발음 선호도 취향에 따라 ‘용자’, ‘용하’, ‘종자’, ‘종가’...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었다.  스위스에서 이런 식으로 용자로 거듭날 줄은, 나도 정말 몰랐다.
 결혼한 지 8년이 돼 가지만 우리 시누이와 아주버님을 비롯, 그들의 배우자들은 아직도 내 이름을 한국식으로 정확히 발음하지 못한다. 거듭된 반복학습을 통해 ‘용’이 아닌 ‘종’으로 발음해야한다는 사실까지는 깨우쳤으되, 그 이상은 이들 능력 밖이다. 인내심을 발휘해가며 한 오십 번 정도 맞는 발음을 가르쳐 주었으나, 만날 때마다 초심으로 돌아가 있다. 그래서 이들에게 나는 여전히 ‘종가’로 불린다. 이들로부터 이름을 불릴 때마다 나도 몰랐던 종갓집의 정통성을 세포 어딘가로부터 일깨워야 할 것만 같다. 
 그나마 오래, 자주 만난 편인 시가 식구들조차 이러니, 처음 만난 이웃이나 지인들에게 자기 소개를 할 때는 정말  괴롭다. 아무도 내 이름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한다. "...미안한데 이름이 뭐라고?" "'종하’라고." "...아, 미안한데 너무 어렵다, 하하(어색하고 민망한 웃음)."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그 만남이 파할 때까지, 내 이름을 기억하거나 (감히) 외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스위스 웹사이트 스위스 인포(swiss info)에 따르면, 스위스에서 가장 흔한 여자 이름은 마리아, 안나, 우르술라, 산드라, 루스 등이고, 남자 이름은 다니엘, 페터, 토마스, 한스, 크리스티안이라고 한다. 
주변에 이 이름을 가진 친척과 지인이 최소 하나씩 다 있는 걸 보면 수긍이 가는 통계 결과다.
스위스 사람들은 ‘튀는’이름을 싫어한다. 남들과 다른 색다른 이름을 갖는 데 대해 두려움이 있다. 물론 카톨릭 뿌리가 깊은 서양 문화 특성 상 이름 대부분이 성경 출신이기 때문에 작명의 한계가 있기도 하다. 
그나마 요즘에는 상황이 많이 바뀌어서, 이런 클래식한 이름들 대신 영어 문화권과 공유될 수 있는 다국적 이름이 대세인지라 미아, 노아, 리암 등이 밀레니얼 아기 이름으로 큰 인기를 누린다.  


 서양 문화권에서는 무조건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라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한국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이 아니다. 스위스에서는 아내가 결혼 후에도 남편의 성으로 바꾸지 않고 자기 성을 유지할 수 있다. 나같은 국제 결혼 부부 경우에도 ‘영희 김 뮐러’ 이런 식으로 한국 성과 남편의 성을 동시에 가질 수 있었다(지금은 한국 성이나 남편 성 중에서 하나만 택일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거꾸로 남편이 아내의 성을 따르는 것도 당연히 가능하다. 여기서 알게 된 한 한국 분의 스위스인 남편은  한국인 아내의 성을 따라 ‘김’으로 성을 바꾸었고(‘토마스 뮐러’에서 ‘토마스 킴’이 됨), 둘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에게도 모두 한국인 아내의 성을 물려주었다. 이런 케이스가 적지 않다. 그러니 서양 문화권에서 결혼한 아내가 무조건 남편 성을 따른다는 오해는 버리자. 


여튼, 하필 J가 들어가는 어려운 이름을 가진 나는 스위스에 사는 한 이름 질문을 받을 때마다 두 번 이상 발음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다. 이제 너그러운 마음으로 여유롭게 진짜 ‘용자’의 애티튜드를 보여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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