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비(悲)스토리
이는 비리비리하고, 비트적거리던 저의 눈물겨운 첫 출근 비(悲)스토리입니다.
때는 2014년 봄. 아침 6시, 광화문에 있는 첫 직장 사옥 앞입니다.
이 날은 신입사원 연수가 끝나고 부서배치를 받는 날이었습니다. 새벽 내내 어떻게 하면 부서원들에게 첫인상을 좋게 가져갈 수 있을지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이상적인 첫 출근을 상상하느라 잠을 설쳤습니다. 덕분에 이 날 내가 이 건물에서 가장 빨리 출근도장을 찍었을 것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Scene #1. 침대에서 크랭크인한 첫 출근 망상
부서선배가 저를 사무실로 안내를 해주는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엘리베이터에서부터 다정한 이 선배는 간단히 부서 내 분위기를 브리핑하고, 유의해야 할 사항이나 내가 맡게 될 업무를 넌지시 알려줍니다. 난, 그럼 이렇게 너스레를 떨지요.
“선배님의 수족이 될 각오가 되어있으니, 언제든 편하게 업무지시를 내려주세요”
그래,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린 친목을 나누지♪ Yo.
16층, 드디어 도착입니다. 사무실 유리문을 상쾌하게 박차고 들어가면, 선배가 능숙하게 부서원들의 주목을 유도합니다. 그래, TV에서는 보통 그러는 것 같더라 구요. 그럼 저는 부서원들에게 일단 90도 각도로 박력 있게 인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전 이 회사가 다소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직장문화임을 미리 알고 있는 센스 있는 신입사원이니까요. 우렁차게 통성명을 하고 야심 차게 출사표를 내던집니다.
“다소 처음엔 부족하더라도 시간과 열정을 바쳐 배우겠습니다. 얼른 제 몫을 해내는 인재, 듬직한 동료가 될 터이니 믿어주십쇼!”
담백한 포부도 준비했습니다. 완벽합니다. 이어서 조촐하게 박수소리가 터집니다. 싹싹하고 인상 좋은 신입이 들어왔다는 칭찬도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 보통은 그러더라고요. 앞에서 한마디 하면 박수치는 건 당연하잖아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다음 장면은, 부장님과 티타임으로 이어집니다. 간단한 차와 함께 부장님의 사회생활 꿀팁과 조언, 그리고 원하는 인재상에 대한 훈화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다소 지겨울 수 있어도 진실성 있어 보이는 리액션은 필수로 장착해야 합니다. 그래야 앞으로 회사생활을 조금 편하게 할 수 있으니까요. 미리 부장님의 주요 업적, 추진사업을 파악해 두었으니 중간중간 양념처럼 능력을 칭찬해 드리기로 합니다. 또, 막내는 이런 맛이 있어야 하잖아요.
자리로 돌아오면 업무매뉴얼을 고시공부 하듯 꼼꼼하게 읽어야 합니다. 뇌를 풀가동하여 업계용어를 빠르게 파악하도록 해야 하지요. 취업 합격결정 이후 다시 쓸 일이 없을 줄 알았겠지만, 이 때야 말로 마지막으로 머리가 힘내주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다 오 가던 부서원들이 매뉴얼 잘 보고 있냐고 관심 어린 시선으로 말을 붙여주신다면, ‘쉽지 않다’며 ‘선배님들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의 포문을 연 다음, 벼락치기 한 용어를 언급하며 이건 것들이 궁금하다고 여쭤보면 이것이 백점만점짜리 신입직원의 태도라 혼자 상상해 봅니다.
‘그래, 이렇게 신입사원의 첫날을 보내는 거야!’
그렇습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상상한 ‘청춘물’ 버전의 첫 출근 풍경이었습니다.
하지만, 누가 그랬었던가요, 현실은 다큐라고. 실제로 제가 마주한 경험은 흡사 ‘블랙코미디’이자 ‘공포물’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Scene #2. 노 필터 환장 첫 출근기
한동안 강당에 멀뚱멀뚱 앉아있었습니다. 적막과 뻘쭘 사이. 동기들은 벌써 거의 다 부서선배들 손에 이끌려 각자의 부서로 떠났습니다. 몇 명 안 남은 상황입니다. 다행히, 동기오빠와 같은 부서에 배치를 받아 덜 외로웠습니다. 곧이어 헐레벌떡 뛰어오는 옆 부서 선배. 제가 배치받은 부서에선 오늘 사정상 아무도 못 온다며, 옆 부서로 배치받은 동기와 함께 우리를 대신 사무실로 안내해 주기로 합니다. 옆 부서 선배는 본인도 못 올 뻔했다며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사회생활은 챙겨주고 그런 거 없어요, 각자도생입니다.”
그래,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린 생존을 배우지♪ Yo.
16층, 드디어 도착입니다. 사무실 유리문을 상쾌하게 박차고 들어가니, 옆 부서 동기와 선배는 뒤도 안 돌아보고 본인들의 부서로 가버립니다. 낙동강 오리알이 이런 것일까요. 부서 안내판 앞에서 쭈뼛거리며 서있으니, 저 멀리서 총괄서무팀장님으로 보이는 분이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합니다. 그래도 굴지의 회계법인에서 굴러먹었던 동기오빠가 사회생활 선배라고, 걸어가는 길목에 앉아있는 부서원들에게 인사를 하며 앞장섭니다. 저도 따라 연신 굽신, 굽신거리며 따라갑니다. 하지만 다들 컴퓨터만 뚫어져라 바라볼 뿐 우리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여기는 이번에 온 신입사원들” (1팀장 말씀)
“아, 예, 반갑습니다.” (2팀장 대답)
팀장님들 사이의 대화만으로 저희의 소개는 조촐하게 끝이 납니다. 포부나 인사말은 괜히 준비해왔나 봅니다. 90도 인사만 몇 번을 했는지 모릅니다.
곧이어, 복도 끝에서부터 잔뜩 씩씩거리시며 쿵쾅쿵쾅 런웨이(runway)하듯 걸어오시는 부장님이 보입니다. 잔뜩 화가 난 표정이셔서 사회생활 초짜인 제가 봐도 지금은 인사할 타이밍이 아닌데 싶었습니다.(아마 이사님께 깨지고 온 것일 테지요) 소 도살장 끌려가듯 부장님 방으로 끌려가서,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부장님은 미간에 ‘인내 천(川)’자를 턱 그리시고는 동기오빠와 저의 프로필을 뚫어져라 바라보십니다. 먼저, 동기오빠에겐 이 회계법인 출신들이 콧대가 높다며,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자네에게 기대하는 바가 많다고 덧붙이십니다. 들어보니 부장님 말투가 다정한 스타일은 아닌 듯싶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를 안경너머로 지긋이 바라보십니다.
“자네는 학력도 그렇고, 회계사 자격증도 없으니 많이 열심히 해야겠다. 저기 인턴보단 나아야지”
처음 본 제게 난데없이 들어온 라이트 훅! 단발의 팩트폭행 공격에 넉 다운(Knock down). 멘털이 살짝 나갔습니다. 언급하신 저기 인턴은 서울대 출신이었습니다.
아득한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 제 자리를 안내받았습니다. 컴퓨터도 뭐고 아무것도 없이 하얀 책상이었습니다. 동기오빠가 능숙하게 정보통신실에 전화를 넣어보지만, 내일까지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루 종일 감옥에 온 듯 면벽수행을 해야 했습니다. 아무도 말 걸어 주지 않습니다. 부장님의 그 싸늘한 눈빛이 머릿속에서 몇 번씩 재생되었습니다. 이래서 독방이 더 무서운 겁니다. 앗, 근데 다행히 같은 팀 선배가 담배타임을 마치고 저에게 와서 말을 붙여주십니다. 관심만으로 감사해서 최대한 밝은 표정으로 응대했습니다. 그러자, 선배가 하는 말.
“인수인계는 컴퓨터 파일로 하는 거야. 이해 못 하면 능력 없는 거, 알지?”
여기까지가, 제가 기억하는 첫 출근의 날카로운 추억입니다. 그날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몸살이 난 듯 집에 도착하자마자 골아떨어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 입사 1년 차 내내 생 초보 신입사원으로서 모든 것이 서툴러 더 우왕좌왕했던 기억 투성이입니다. 자괴감으로 점철된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버텼습니다.
허은실 작가는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유도나 태권도는 가장 먼저 상대를 공격하는 기술이 아니라 자신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낙법’부터 배운다고요. 그리고 우리는 삶의 '낙법', 즉 틀리는 것, 비판받는 것, 거절당하는 것, 이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때 우린 고양이처럼 우아하게 삶에 착지할 수 있게 된다고요. 저도 이제는 시간이 지나 웃으며 관조적으로 첫 출근의 기억을 풀어볼 수 있습니다. 빛바래 과장되었을지 모르지만 그날의 오피스 활극은 술자리 '안주거리'로 종종 사용되기도 합니다. 입사 1년 차. 사회초년생으로 좌충우돌하던 그때, 부풀었던 기대와 다르게 현실은 시궁창이었던 나. 나의 무게조차 버겁다며 나뒹굴었던 처음의 나. 이는 다 인생의 ‘기본기’를 닦는 눈물겨운 과정이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