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미쓴 일단 해봐 Aug 26. 2023

건축사와 한바탕 했다

공손한 태도는 나를 만만하게 대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에요

사실 나는 순하다, 착하다 이런 말을 듣고 사는 성격이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며 화를 잘 내지도 못한다. 가급적이면 좋은 마음으로 원활하게 지내고 싶어 한다.


직장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이런 성격이 주는 폐해(?)를 겪기도 했는데

착한 마음으로 일하는 것과 주관 없이 끌려다니는 것은 다르므로

나름의 선을 만들기 위해 마음이 불편한 과정도 많이 겪었다.


설계사무소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담당 건축사는 능글능글한 40대 남자였다.

그는 설계와 인허가가 2개월 반이면 완료될 거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6개월을 썼다.

그래도 나는 일이 진행되고 있음에 감사했고, 어쩌다가 전화라도 한 번 하려고 하면 최대한 공손하게 바쁜 시간을 빼앗지 않으려 노력했다. 미팅할 때마다 작은 선물이라도 들고 갔고, 때마다 카톡 선물을 보내며 늘 애써주어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비슷한 시기에 같은 건축사를 통해 진행하는 다른 현장들이 착공을 한 시점에

아직 인허가도 나지 않은, 늦은 속도뿐이었다.




어느새 내가 받은 대출 금리는 7.5%까지 치솟았고,

불필요한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납득할 수 없는 금융비용이 늘어만 갔다.

그렇다고 할 말 못 하고 꾹 참고 기다리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여러 차례 일정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바뀐 것은 없었다.


알고 보니 다른 현장을 먼저 해주느라

설계사무소의  업무처리 순서에서 우리 현장이 맨 뒤로 밀렸음을 알게 되었다.

공손하고 친절한 나의 태도가 그들에게는 편하게 일처리 해도 되는 '만만함'으로 해석된 것이다.


사진: Unsplash의engin akyurt, Unsplash의Marcos Paulo Prado


그래서..

이제 친절함의 시간은 끝났다.


1. 나는 소중한 내 돈을 쓰고 있으며, 선의로 대했다.

2. 실수가 있어도 참았지만 결과는 늦은 일처리였다.

3. 이런 대우를 받고도 순순히 돈을 다~ 주면 나는 바보다.

4. 바보가 되지는 말아야겠다.


이런 결론에는 쌓이고 쌓인 불신이 있다.

대표적인 몇 가지만 기록을 위해 남겨둔다.


1) 건축심의에 탈락하고, 다음 심의 순서에 포함되지 못하여 1개월 더 소요
2) 재심의 완료 직후 인허가를 접수하겠다고 하였으나 추가 3주 소요
3) 인허가 서류와 완료 공문을 건축주에게 전달도 하지 않음
4) 인허가 서류를 접수했다고 한 날짜와 실제 접수 날짜가 다름(구청 확인)
5) 면허세 고지를 확인하니 그제서야 날짜를 가린 공문 캡처본을 보내줌
6) 착공서류에 필수적인 구조감리를 빠트렸음
7) 착공서류가 여러 차례 보완 요청을 받게 하여 또 시간 소요


이슈가 있을 때마다 어필을 해보아도

전화를 받는 순간에만 '죄송합니다'라고 말할 뿐, 변한 것은 없었다.

4월 초에 인허가가 완료된 후 5월 초에는 착공이 될 거라고 기대했지만

6월 초가 되도록 착공은 이뤄지지 않았고

면허세 미납과 구조감리 생략 등 말도 안 되는 사소한 이유로 구청으로부터 착공신고가 반복적으로 반려당했다.


이제는 확 다르게 대할 수밖에 없다.




제대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전화로 강하게 컴플레인을 했다.

이런 식이라면 나는 남은 설계 잔금을 줄 수 없다고 통보했다.

특히 담당 건축사에게는 너무 실망스러웠다. 지난 몇 차례의 실수도 눈감아주었고, 나보다 잔금일정이 급한 다른 건축주들의 존재를 알았기에 내 것만을 재촉하지도 않았는데 말이었다.


물론 지나고 보니 부탁받지 않고 고마워하지 않는 배려는 배려가 아니라 바보가 되는 길인데.. 나도 이렇게 또 하나를 배워간다.


설계사무소 대표는 설계와 인허가를 하다 보면 이 정도 유동적인 일정은 어쩔 수 없지 않냐는 식이었다.

담당 건축사는 처음에는 중요하게 대응하지 않다가,

중간에서 중재를 해주신 멘토님의 말을 듣고 나서야 겉으로나마 미안한 것처럼 전화를 걸었다.

사과의 표시로 자신들이 지정한 업체와 구조감리 계약을 맺으면

견적보다 150만원 저렴하게 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사진: Unsplash의Camylla Battani, Unsplash의engin akyurt


그동안의 잘못을 150만원에 퉁치고

이거 줄테니 앞으로 조용히 있으라는 식의 대응에 기가 찼다.

그러면서 착공 지연의 책임을 슬쩍 시공사로 몰아갔다.

쓸데없이 늘어난 시간 때문에 추가로 감당하는 이자만 얼만데,

계속되는 불성실한 태도에 더욱 화가 났다.


150만원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자

그들은 자신들이 나를 달래는 노력은 거기까지라는 듯이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마침 이틀 뒤, 착공계가 나오면서

내 컴플레인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참나..


멘토님은 앞으로 사용승인에 이르기까지

아직은 설계사무소와 같이 일해야 할 부분이 남아있으니 그래도 관계를 너무 해치지는 말자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전해주셨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물론 그러지도 않았지만, 감정적으로 대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제 시간이 지나서 감정이 다 내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침착하게,

내가 입은 손해와 그들에게 '호구 건축주' 였던 시간, 그리고 늘어난 비용만큼은 보상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기는?

설계비 잔금뿐이다.


지금 당장 감정싸움을 할 필요는 없다.

몇 달이 지나고 완공 후 설계 잔금 과정에서 충분히 표현하려고 한다.


사진: Unsplash의Jonathan Daniels


[덧] 대부분의 건축사 분들은 성실히 업무를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혹시나 업계의 관행이거나 초보 건축주로서의 미숙함 때문에 폐를 끼치지 않을까 무던히 조심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3개월 넘게 추가 소요된 기간은 수천만원의 금전적 손실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모질지 못하여 큰 일을 저지르지 못하겠지만, 저 자신에 대한 존중 차원에서라도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읽으신 분들께 불쾌한 글이 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착공하기 참 좋은 날씨인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