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법인 K에서 5년째 근무하고 있는 김비서 대리. 김대리의 눈으로 로펌 비서의 하루를 들여다본다.
여느 아침처럼 출근 카드를 찍고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지금은 08:45. 옆 자리 과장님은 아직 출근 전이다. 변호사님들도 출근하려면 아직 멀었다.
내가 모시는 변호사님은 세 분. 연 변호사님(54, 남)은 파트너, 공 변호사님(36, 남)은 4년차 어쏘, 차 변호사님(30, 여)은 1년차 어쏘다. 대체로 비서 1명 당 변호사 2 ~ 3명을 모시는데, 파트너 1명에 어쏘 1명이거나, 어쏘 2명만 모시거나, 나처럼 파트너 1명에 어쏘 2명을 모시는 경우다. 어쏘들은 파트너보다 문서작업이나 잡무가 많아서, 어쏘를 모시는 비서들도 덩달아 할 일이 많아진다. 어쏘 2명에 파트너까지 모시는 나는 다른 비서들보다 더 바쁜 편이다. 하지만 월급은 똑같이 받는다.
파트너와 어쏘가 무엇인지는 여기에 koreanlawyer-americanlawyer.tistory.com/10
각 변호사님들 방에 들어가 불을 켜고 컴퓨터에 로그인을 해두었다. 10시쯤 되어야 출근들 하시겠지만 그래도 미리 해둔다. 다른 파트너 변호사님이 지나가다가 불 꺼진 방을 보고 '뫄뫄 변호사 아직도 출근 안했어?' 라고 하실 수도 있는데 그러면 내가 모시는 어쏘 변호사님들이 나중에 곤란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로펌에서 변호사들은 10시쯤 출근하는 게 상례지만, 파트너 변호사님이 그보다 일찍 출근해서 어쏘를 찾는 경우가 종종 있다.
09:00가 되자 옆 자리 과장님이 출근하셨다. 과장님은 우리 회사에서 10년 넘게 근무하신 베테랑이다. 과장님은 입사 이후 아이 2명을 낳으셔서 1년씩 총 2년 육아휴직을 하신 때 말고는 계속 회사를 다니셨다고 한다. 우리 직업의 장점은 육아휴직과 정년이 실제로 보장된다는 점이다. 과장님은 매일 아침 친정 어머니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출근하신다고 하는데, 나도 결혼하면 저런 모습일까?
09:50쯤 1년차 여자 어쏘 변호사인 차 변호사님을 찾는 전화가 왔다. 클라이언트다.
"네, 차 변호사님실입니다."
"아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저 뫄뫄 상사의 박 사장입니다."
"차 변호사님 잠깐 자리 비우셨는데요, 메모 남겨드릴까요?"
사실 아직 차 변호사님은 출근하지 않았지만 클라이언트의 전화이므로 잠시 자리를 비우셨다거나, 회의 중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아~ 변호사님 아니구나~ 그럼 그냥 내가 이따 다시 전화하겠다고 해."
내가 변호사인줄 알고 처음에는 존대를 했다가, 비서인 걸 알게 되자 반말을 한다. 모든 클라이언트가 그런 건 아니지만, 가끔 이런 일이 생기면 기분이 나쁘다. 클라이언트니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
마침 차 변호사님이 출근하시길래 전화왔었다고 말씀을 드렸다. 변호사님은 나한테 꾸벅 인사를 하고 택시 영수증을 주시면서, 피곤한 얼굴로 방으로 들어가신다.
로펌에선 밤늦게 퇴근하는 변호사들에게 택시비를 대준다. 차 변호사님도 다른 1년차 어쏘들처럼 매일 새벽에 퇴근하신다. 택시 영수증을 보니까 어젠 02:00에 퇴근하셨네 ... 1년차 변호사님들은 처음 입사할 때는 다들 얼굴이 반짝반짝하고 생기넘치는 모습이지만, 몇 달이 지나면 다들 좀비가 되어 카페인과 니코틴으로 쩌들게 되는 것 같다.
오늘 점심은 4년차 남자 어쏘 변호사인 공 변호사님이 사주신다고 한다. 가끔 내가 모시는 변호사님들이 나와 과장님에게 점심을 사줄 때가 있는데, 그런 날은 주로 호텔 식당이나 스시집에서 밥을 먹는다. 공 변호사님 담당은 나지만 과장님까지 초대된 이유는 과장님이 내 얼터너티브 Alternative 비서이시기 때문이다. 내가 휴가를 낸다거나 병가 중이면, 나 대신 과장님이 우리 변호사님들을 책임진다. 과장님이 휴가를 내는 경우에도, 내가 과장님 대신 과장님의 변호사님들 일을 봐드린다. 서로가 서로에게 얼터너티브다.
그래서 변호사들의 비서역할은 엄격히 말하면 나 혼자만 하는 게 아니고 내 얼터너티브 비서인 과장님도 하기 때문에, 변호사님들은 나 뿐만 아니라 과장님에게도 잘 부탁한다는 의미 정도로 점심을 사는 것이다. 사실 숨어있는 이유는 변호사와 비서가 1:1로 식사하면 서로 어색하고 불편해서 또다른 사람 한 명을 일부러 끼워넣는 것 같기도 하고 ...
변호사들이 비서에게 밥을 사는 경우는 여러 가지다. (i) 변호사가 새로 입사했거나 새 비서가 들어온 경우처럼 서로 공식적으로 처음 인사하는 자리일 수도 있고, (ii) 큰 사건이 하나 끝나서 서로서로 그 동안 고생했다고 뒤풀이겸 밥을 먹는 것일 수도 있고, (iii) 누구 한명이 결혼하거나 회사를 그만 둘 때 축하 인사 또는 굿바이 인사를 하는 자리일 수도 있다. 오늘 공 변호사님이 점심을 사는 건 청첩장을 주시기 위해서. 변호사님은 우리 회사 클라이언트가 소개한 여자분과 결혼하신다고 한다.
젊은 남자 변호사님들에게는 소개팅이나 선자리가 많이 들어온다. 파트너 변호사님들이 아는 집안을 소개시켜주기도 하고, 클라이언트가 본인 가족이나 다른 혼처를 소개시켜주기도 한다. 남자 변호사님들이 새로 입사하면 파트너 변호사님들이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이 "결혼은 했나?" 뭐 진짜로 궁금해서 묻는 걸 수도 있지만, 대체로는 아는 사람 소개시켜주기 위해서 물으시는 것 같다. 내가 봐도 남자 미혼 어쏘 변호사님들은 (선 시장에서) 굉장히 인기가 많다.
반면 미혼 여자 변호사님들에게는 선자리가 잘 안들어온다. 아무리 사람이 괜찮아도 여자 변호사는 선 시장에서는 인기가 없는 직업인 건지, 클라이언트나 파트너 변호사님이 선을 주선하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우리 회사 여자 변호사님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 옛날 친구나 동창, 로스쿨이나 사법연수원 때 사귄 남자친구와 결혼하신다.
다 같이 커피를 마시면서 사무실로 돌아왔더니, 1년차 어쏘 변호사 차 변호사님이 법원에 증거를 제출한다고 하신다. 차 변호사님이 주신 증거서류 원본과 증거목록을 서로 대조해서 맞춰봤다. 지난 번 마지막으로 제출한 증거가 '갑 제14호증'이니까, 이번에 제출할 증거는 '갑 제15호증'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변호사님이 이번에 낼 증거목록에 '갑 제14호증'부터 쓰신 걸 보니 아무래도 실수하신 것 같다. 알려드렸더니 고마워하신다. 이런 때 일하는 게 재미있고 보람있다.
증거 원본을 스캔해서 회사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하고, 복사한 사본은 기록에 편철했다. 이제 증거 원본을 송무팀에 갖다주어 송무팀이 직접 법원에 제출하게 하면 된다. 몇년 전 내가 사원일 때만 해도 딜리버리 Delivery 직원이 없어서 내가 직접 송무팀 사무실에 가서 증거 원본을 전달했다. 그 덕분에 운동도 많이 됐는데, 지금은 딜리버리라는 직책이 새로 생겨서 딜리버리 직원들이 회사 내 서류나 물품을 대신 전달해준다. 그래서 이젠 회사 안에서 움직일 일이 많이 없어졌다.
아침에 대전 재판을 가셨던 파트너 연 변호사님이 돌아오셨다. 연 변호사님은 아랫사람을 잘 챙겨주셔서, 지방 재판을 가실 때마다 그 지방 특산물을 가끔 사다 주신다. 대전에 갔다 오시는 날은 튀김 소보로. 오늘도 두 상자 사오셔서 다른 비서들하고 나눠먹으라, 며 나에게 주신다. 사실 어떤 파트너 변호사님들은 개인적인 심부름도 많이 시키고 화가 나면 비서에게 소리도 치고 하는데, 우리 변호사님은 안그러셔서 정말 다행이다.
튀김 소보로를 먹고 있는데 파트너 연 변호사님이 나를 부르신다. 새로 업데이트된 회사 데이터베이스를 어떻게 쓰는지 잘 모르겠다고 하신다. 내가 얼마 전에 교육도 받았고 혼자 연습도 몇 번 했던 터라 자세히 알려드릴 수 있었다. 사실 오늘 자세히 알려드렸어도, IT에 익숙하지 않으시면 앞으로도 계속 나를 불러 물어보실 것이다. 어쩌면 내가 연 변호사님의 아바타가 되어 그때마다 내가 직접 자료를 찾아드려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게 비서의 일이기도 하고, 평소에 비서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주시기 때문에 기꺼이 할 수가 있다.
6시 퇴근시간이 다가온다. 내 직업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칼퇴근이 보장된다는 것. 오늘 저녁은 직원들끼리 모여 치맥을 한다고 한다. 과장님은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어 참석 못하지만, 난 가서 다른 직원들과 함께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려고 한다. 그리고 또다시 내일을 준비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