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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 May 03. 2021

이 모든 뻘짓거리를 사랑할 수 있다면

<컨택트>

부르릉. 문자가 왔다. 필름카메라 인화가 완료됐다고 한다. 아이디를 찾고 비밀번호를 입력한다. 이번 필름으로 두개째다. 보여줄 사람이 딱히 있는것도 아니었다. 이 필름카메라를 나에게 준 사람은 내 사진에 관심이 없을거다. 뭐 그럴수도 있지. 내 사진이 궁금한 사람은 오로지 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필름로그 사이트에 로그인해 인화된 사진을 확인했다. 이것저것 많이도 찍었다. 이 사진을 찍었을 땐 벛꽃이 아름답게 핀 날이었다. 밤거리에 핀 꽃들도 찍었고, 사람들 하하호호 하는 모습도 먼 발치서 찍었다. 이건 괜찮지만 다른건 올리면 안되겠어. 나름 자체 심의를 거쳐서 몇 장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누가 사진을 좋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누르진 않았지만 그래도 반응이 있어 뿌듯했다. 집에 도착했다. 인스타그램 알람이 뜨는 휴대전화를 닫고 노트북을 켰다. 사진을 큰 화면으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첫번째 필름이 있는 문서로 들어갔다. 사진 한 장이 보였다.


눈이 오는 사진이었다. 버스에서 내리고 나서 바로 찍었던 사진으로 기억한다. 근로장학생이 2주도 남지 않았던 날이었다. 눈이 많이도 왔다. 난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 카메라를 열었다. 좋아. 이 날을 기억하면 참 좋을거같아. 찰칵사진 한 방 찍었다. 집에 들어와 방으로 가자마자 옷 한벙이 보였다. 난 이 겨울 어느날 셔츠 한장을 버리려고 했었다. 이건 20대 초반의 내가 자주 입던, 심지어 좋아하던 반팔 셔츠였다. 이 옷을 버려야만 했다. 아직까지도 집에 있는 이유가 뭔지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났다. 이 덕에 머리에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어느 순간의 나를 꺼내왔다. 셔츠를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얼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났다. 한심한 내가 떠올랐다. 씨발. 대체 왜 그랬지. 알고 있다. 이제부터 잘하면 된다는걸.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나 자신에게 한번 더 말했다. 미래를 볼 수 있다면 내 뺨이라도 쳤을거야. 이건 판타지 SF소설같은 소리다. 미래를 본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알면서도 난 같은 곳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수백번 되뇌이는 자문자답이다. 내일 일을 미리 알 수 있다면 후회없는 내가 될 수 있을까?



<컨택트>는 질문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플롯은 드니 빌뇌브의 감독이 일반적으로 갖고있는 전개방식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어느 날 도착한 외계인에 대비하는 이안과 루이즈 두 사람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마지막에 관객에게 선택지를 돌린다. 즉,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내용을 잇다가 반전으로 메세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반전이 나오기 전까지는 외계인이 나와 공상과학적인 영화가 될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아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언어와 사고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반전을 통해 '너의 삶을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내가 생각에 감독이 이 메세지를 전달하려고 한다는 이유가 있다. 또, 외계인과 언어라는 소재를 활용한 이유도 분명하다. 언어의 속성을 생각해보자.


언어는 사람과 사람사이를 잇는 소도구다. 누가 누구에 대해 자기의 의사를 전달하려면 그걸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서로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단어가 없다면 대화가 잘 안될 것이다. 만약 내가 프랑스 한가운데에 뚝 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대화가 쉽지 않을 것이다. 2021년 지금의 내가 아는 불어라곤 '마드모아젤'과 '봉주르'밖에 없으니까. 잘 하지는 못하는 영어를 쓰지 않는 한 외국에서 소매치기 당하기 쉽겠지. 그렇다고 해서 내가 프랑스를 잘하면 현지인들과의 대화가 쉽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니다. 보다 쉬워질 순 있어도 한국어 의사소통보다 어려울 건 마찬가지다. 난 이런 언어의 성격이 이 영화의 메세지와도 많이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미래를 알고 나서도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와 언어는 공통점이 있다고 보는 쪽인 셈이다.


 사람은 학습효과라는 걸 가지고 있다. 물론 미래를 정확하게 예언하는건 불가능하지만 인간이기에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수는 있다. 이렇다고 해서 상처가 없는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사람은 무엇을 잃어버리며 산다. 예를 들어보자. 가스라이팅과 왕따에 무너진 사회성때문에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사람이 괜찮았다는걸 알 수도 있다. 정신없이 게임만 하다 부모님이 나이드는 걸 놓칠수도 있다. 이런 회한이 남는 인간은 늘 무언가에 미안해하며 아쉬워한다. 어쩔 땐 혼자가 되기도 하고, 많은걸 잃었다는 공허함에 스스로를 돌아보기도 한다. 그러다보면 허무해지기 쉽다. 난 이 허무함이 언어와 삶의 공통점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사는지 또 무얼 말하는지는 그렇게 중요한게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내 마음을 할퀴고 날 떠나갈 수도 있다. 누군가와의 연애는 필연적으로 헤어지기 마련이고, 또 결혼에 성공한다 한들 언젠가 혼자가 되는게 당연하다. 우리의 삶에서 배운 것들이다. 이 뿐일까? 내가 한국말을 유창하게 한다고 해서 같은 한국사람들과 말이 잘 통한다는 보장이 없다. 25살의 내가 이 글을 올린다고 해서 유명 영화평론가들처럼 큰 명성을 누리지 않을거란것도 잘 알고 있다. 내가 경험한 삶은 그랬다. 난 모든걸 다 알면서도 같은 선택을 했다. 더 성숙해지거나 모자란 선택을 한다고 해서 결과가 크게 달라지는건 없었다.  삶의 모든건 두번 세번 아니 더 많은 빈도로 반복된다. 난 이미 잃어버리거나 혼자가 될 거라는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미래를 알았다고 해서 내가 무언가 더 나은걸 골랐으리란 보장이 없다. 토익공부 아무리 해도 LC에서 소나기가 내리는것과 비슷하게 말이다. 그래도 포기하기 싫은 것이 있었다. 난 알면서도 유럽에 있다 온 것도 사실 한국으로 돌아오면 끝이다. 대단한 사람이랑 친해져서 싱글벙글해도 간단한 의사소통 문제로 관계가 틀어질 수도 있다. 고작 20여년밖에 살지 않은 나지만 난 지금까지의 생을 바탕으로 내 결말을 알고있는 셈이다. 난 아마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매일을 후회하고 아쉬워할 것이다. 사실 언어와 삶 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사의 모든 순간은 다 닮아있을지도 모른다. 감독이 그런 삶의 요소들 중 두개를 뽑아 영화로 만든거지 작품의 메세지는 그렇게 어려운게 아닐수도 있다. 우리의 삶은 이런 허무함의 연속이다.


영화는 이 허무함에 그래서 뭐?라고 답한다. 미래를 전부 알고도 앞으로 나아가는 주인공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다시 삶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 때의 모든 선택지를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해서 상대방과 같은 언어를 쓴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미래를 가정한다. 만약 내가 이것들을 다 알았더라면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었을까. 그 때 그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게 아닌데. 난 정말 미안한게 많은데. 미안할 필요 없는 인간에게 신경쓰다 정작 손을 내밀어야 하는 사람을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마저 든다.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걸까? 루이즈도 마찬가지다. 온갖 언어 달달 외워도 미래의 남편과 또 같은 팀의 팀원과 대화가 어렵기도 했다. 주인공이나 우리나 미래를 대상하기 위해 과거를 공부하며 인생을 살아가지만 사실 그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전제일지도 모른다. 인생에 정답이란 없다. 있다 하더라도 난 이미 결과를 알고 있으니 과거와 미래의 나를 사랑한다는건 애초부터 불필요할수도 있다.


아니다. 이 영화는 '그 말은 전제부터 틀려먹었다'라고 답한다. 그건 우리의 인생이 선형적이라는 기준을 깔아야 말이 된다. 삶에 목적지란 것이 있을까. 없다. 난 그랬다. 나에게 있어 인생은 비선형적이었다. 무언가를 하나 이루면 다음 목표를 이루고 싶었다. 비선형적인 원이 되어 매 순간 같은 걸 반복하고 있었던 셈이다. 왜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냐고? 마음을 열지 않으면 불가능할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분명한 목저지를 이미 안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의 나를 사랑하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더 성장한 나도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었고 그 과정에 있어 날 즐겁게 해준 것들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소통과 대화도 마찬가지다. 사람에게 마음 닫고 살았을 때의 난 대화가 힘든 사람이었다. 세상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난 잘 듣는 사람이 됐다. 언제부턴가 미래를 알고있다고 해서 과거 뒤에 숨어버리는건 내 자신에게 못할 짓이라는걸 깨달으면서 말이다. 난 모든걸 알면서도 같은 선택을 했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이런 나에게 '너 이거 다 알면서도 그렇게 살 수 있어?'라고 질문했다. 내 대답은 네.다. 당연히 누구에게 상처준 일이 있다면 나는 뜯어 말려서라도 최소한의 사과를 했을 것이다. 마음이 괴로웠던 때도 어찌저찌 잘 넘겼을 것이다. 난 이것들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언젠간 무언가와 대화할 날이 올 거라고 믿는게 나의 미래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난 이 영화가 마음을 열고 나에게 다가와준 것이 고마웠다. 주인공 루이즈처럼 내가 잃었던 것을 반추하게 도와줬으니까. 그리고 그것들이 내 미래에도 반복될 것이라는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어떤 선택을 해야 무얼 얻을 수 있는지를 설명해줬으니까. 과거를 뒤엎는 가정은 절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매순간 반복되는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해서 우리 인생이 다 똑같은것은 절대 아니다. 어쩌면 시작과 끝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중요한건 현재다.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는 걱정이 아니라. 내일 일을 미리 안다고 해서 후회없는 내가 될 수 있을까? 아니. 후회하는 우리도 이젠 받아들일 때가 됐다. 영화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의 우리를 받아들이고 타인을 이해하는것이야 말로 원처럼 둘러쌓인 우리 인생에서 고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란걸 넌지시 알려주며 말이다.


처음엔 너무 잔잔해서 잘 들어오지 않았던 영화를 왓챠를 통해서 다시 봤다. 드니 빌뇌브의 영화는 두번 세번 봐야 좋다. 내가 좋아하는 에이미 아담스가 더 작품활동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 SF장르지만 그 어느때보다 철학적인 메세지가 있었다. <인터스텔라>와 비교되는 경우가 많은데 난 두 작품 다 훌륭하기 때문에 컨택트를 예시로 인터스텔라가 깎아내려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따뜻한 작품을 봤다. 영화를 보며 다시 한번 명심했다. 목적지를 찾아가며 살지 말자.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현재를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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