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동 May 05. 2021

결국 변하지 않는건 외로움 뿐

<토니 타카타니>

어. 그래. 그럴 때 있지.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었다. 에이. 그래서 영원한게 있나. 생각은 다 바뀌는거 아냐? 당연하지. 너무 걱정하지마. 나도 그게 그렇게 될거라고 생각 못했는데 어찌됐건 다 이뤄지더라. 다 잘될테니까 신경 쓰지 마. 수화기 반대편으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밝아서 다행이었다. 너 예전에 어디 아프다고 하지 않았나? 아. 지금은 괜찮다고? 다행이네. 아무튼 생각 많이 하는게 그렇게 좋아보이진 않더라. 난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예전에 했던 전애인 이야기. 내 20대동안 바뀌었던 처지에 관한 이야기. 별의 별 소재로 대화가 이뤄졌다. 그래도 너 많이 발전했다. 너만한 사람이 없긴 하지. 과분한 칭찬에 멋쩍게 웃었다. 그럼 다음에 봐. 전화를 끊었다. 발전한 사람이라. 휴대전화 전원을 아예 끄고 책을 손에 잡았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이었다. 소설 안엔 여자주인공이 나온다. 제발. 선생이 저를 서울로 데려다 주세요. 여주인공은 남주인공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남자는 이 부탁을 거절한다. 아내가 있었기 때문에 여자의 말을 들어줄 수 없었다. 그렇게 부탁을 거절하고 남주인공은 안개 가득한 도시 무진을 떠난다. 소설은 안개가 가득한 도시의 모습을 묘사한다. 주인공이 떠나고 난 후는 보여주지 않는다. 소설을 끝마치며 문득 궁금해졌다. 이게 만약에 내 주변의 이야기로 치자. 여자주인공은 어떻게 될까? 남은 시간동안 남자주인공의 빈자리만 느끼다가 시간을 보내게 될까? 남자는  선택을 후회하진 않을까? 책 읽고 나면 늘상 하는 잡생각이었다. 사실 지방에서 살다가 서울로 올라온다고 해서 원하는 인생이 짠하고 이뤄질리는 없어. 그럼에도 여주인공은 사람이기 때문에 혹시나에 기댔을거야. 여주인공이 어떻게 될 것 같느냐고? 난 책이 던지는 질문에 안개같이 막연하게 답했다. 그냥 그렇게 살다 가지 않을까. 어차피 남자주인공같은 사람은 이 소설책에서 한 사람밖에 없을테니까.   비슷한 상황이 떠오르면 계속 생각나겠지? 그럼 남자들에게 비슷한 말을 계속 하거나 직접 서울로 올라가거나 둘중 하나를 택할거야. 어떤 존재가 있다 없어지는 건 상대를 내 일상속에서 지워버리는게 익숙해진다는 점에서 씁쓸한 일이었다. 무진의 안개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토니 티키타니>는 부재에 관한 영화다. 러닝타임이 짧다. 1시간 30분이었다. 적당한 길이의 단편소설을 읽으면 이정도 시간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영화는 이를 반영하듯 영화라기 보다 책을 읽는것처럼 진행된다. 책을 읽다보면 3인칭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은데 영화 전반에 걸쳐 들리는 나레이션은 이를 연상시키며 영상을 한장한장 넘기는 것 같은 느낌을 더해준다. 촬영한 카메라의 시선이 일반적인 영화와는 다르다는 것도 특이점이다. 옆에서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화를 연출해서 얻는 이점은 하나 더 있다. 주인공 토니의 일생을 표현하는데에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토니는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 만든 이름이다. 일본이름도 영어이름도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이름의 처지와 비슷하게 어느곳에도 속해있지 못해 외로웠던 주인공은 어렸을때부터 또래 애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였다. 이렇기 때문에 그는 혼자인 것에 그렇게 불만이 없었다. 타인이 보면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었으며 매사가 혼자였던 삶에 한줄기 희망이 들어온다. 완벽한 이상향의 여인 에이코를 만나 사랑에 빠진 것이다. 에이코와 함께라면 늘 행복했던 토니. 외로움덕에 쓸쓸하지 않았던 인생에 처음으로 고독이란걸 느끼게 된다. 에이코가 날 떠나면 어떡하지. 이런 잡다한 고민에 속이 썩던 그는 에이코에게 청혼한다. 결국 결혼에 골인한 둘은 그렇게 행복하게 살 거라고 생각했다. 그 뿐이었다. 너무 많은 의류를 사들인다는 생각에 아내에게 소비를 줄이자고 했던 조언이 예상치 못한 비극이 됐다. 토니는 새로운 삶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선택할 겨를도 없이.


여기까지의 이야기가 영화의 2/3쯤 된다. 난 영화가 말하려는 메세지가 남은 1/3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이 지점을 넘긴 영화는 아내 에이코의 부재를 채우기 위해 무언가 행동하는 토니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아내와 옷핏이 비슷한(실제 배우가 1인 2역을 한 것으로 보인다.) 가사도우미를 고용해서 부인이 샀던 의류를 입게 한다. 부인과 이미지가 비슷한 사람을 통해 처음 느낀 외로움을 채우고 싶었던 주인공. 이걸로는 택도 없음을 느낀다. 늘 혼자였을 땐 외로움을 몰랐는데 그녀가 떠나고 난 후에야 고독을 느낀 것이다. 이 이후에도 주인공과 까운 사람이 간암으로 상을 떠난다. 이 덕에 토니는 세상 아무도 찾지 않는 외톨이가 됐다. 영화는 아내의 옷장에 멍하니 있는 주인공을 보여준다. 안그래도 혼자인데, 아버지가 상하이의 어떤 감옥에서 누워있는 모습과 오버랩되어 처연하기까지 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아내와 닮은 가사도우미에게 전화를 하는 주인공 모습이 나온다. 따르릉 전화벨이 울릴 때 그녀는 옆집 아줌마와 얘기를 하고 있었다. 다른 일을 하느라 부재중이었기 때문에 통화는 실패한다. 영화는 그냥 그러고 끝난다. 완벽히 지운것도, 지우려고 노력하는 것도 없이 그냥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 이 사람이 이 사건으로 성격이 이렇게 변했다는 식의 서술도 없다. 사실 이 영화의 이런 화법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그 사람같은 인연은 온 지구를 다 뒤져 찾아봐도 하나밖에 없다. 이 작품과 무슨 관련이냐? 부재로 인한 외로움에 해결책같은건 없단 걸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내 모습이 보였으니까.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빈자리는 무엇일까 돌이켜보면 토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영화는 이런 나에게 또 우리에게 손을 내어준다. 우리를 일으켜세우기 위함이 아니다. 같이 쪼그려 앉아서 손을 잡아준다. 이 영화를 보면서 느꼈다. 난 이 이상의 인간이 아니구나. 나도 토니와 그렇게 별다를 바 없는 삶을 보냈구나. 몇년도 지난 일에 대해 후회하는 날이 많았다. 세상이 유달리 혹독할때도 하지 않았던 생각을 머릿속에 품고 사는거다. 누군가가 떠난 빈자리를 느끼면서 말이다. 난 지금 그걸 이겨내고 있을까?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날 떠난다고 해서 난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둘 다 아닌것 같다. 이젠 세상 눈치 안보고 산다지만 몇명은 솔직히 멀어진다는 게 상상조차 하기 싫다. 그게 강박이 될때마다 나에게 되뇌인다. 감사하며 살아라. 내가 누군가에게 무언갈 받는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상대가 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를 잃을 필욘 없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을 잊어버리고 살다간 세상에 혼자만 남는다. 이게 지금의 나에게 답에 가까운 솔루션인걸 뻔히 알면서도 어쩔때는 지나간 날에 아쉬워했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기에 이 영화가 좋았다. 이거 우리 모습인거 알아. 이런 메세지를 주고 싶었을 것이다. 감독은 공감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를 의도했다고 생각한다. 원작자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을 그대로 살린듯한 덤덤한 나레이션부터 앞서 언급한 '바로 옆에서 보는 듯한 카메라 구도'까지. 이 영화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외로움과 쓸쓸함이란 그렇게 큰 감정이 아니라 우리 일생에서 친구처럼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삶의 어느 한 부분을 도려내어 지극히 일반적인 이야기를 했던 것도 우리 삶 속의 외로움을 돌이켜보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한다. 맞아. 외로움이라고 하는거 사실 별 것 아니다. 그 사람 사정은 그 혼자만 알고 있다. 나도 그랬다. 아직도 한참 멀었고 지나치게 어린 인생이지만 내가 느꼈던 일상이란 밑빠진 독에 물붓기였다. 기준을 남에게 둘때도, 여유가 생겼을때도 나는 목적지 없이 달리기만 했던 것 같다. 이건 특히 누가 나를 떠날때 심했다. 뭔가가 없다는 걸 느낄때마다 일을 벌였다. 바쁘게 살면 잊을 수 있을테지. 방구석에 앉아 누구를 만나는게 아니라면 난 이 생각에 빠져 무언가를 후회하고 있었다. 안그래도 강박증이 있는 머릿속은 지독하게 나를 붙잡아 놓아주질 않았다. 찌질한 모습 다 버렸고 내가 아니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도 많이 했지만 몇가지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럴때마다 매순간 드는 생각이 있다. 아. 있을때 잘할걸. 이 빈자리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채울 수 없는거구나. 어른이 된다는건 이 회한을 받아들이는 것이구나. 내 노력만으로 인간관계가 유지되지는 않는다. 뻔히 알면서도 가끔은 나는 나를 혼냈다. 괜찮아. 이 영화를 보고 드는 첫번째 생각은 그것이었다. 이 영화처럼 누군가의 이야기를 잘 들어줄 수 있다면 그걸로도 좋은게 아닐까.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던 이유도 작품이 주는 쓸쓸한 카타르시스가 우리가 일상을 버티는 괜찮은 이유가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쩔 수 없다. 이 세상은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앞으로 예정된게 분명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게 25살의 내가 느낀 세상에 관한 모든것이다.

이전 15화 올바르게 나 자신을 찾는다는 것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