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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 Jul 06. 2021

올바르게 나 자신을 찾는다는 것은

<존 말코비치 되기>

과거의 나는 무언가에 홀려있었다. 기댈 곳이 없었다. 원래부터 안좋은 인간관계 능력에 위기가 불어닥쳤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기댔다. 고민상담하고 터놓고 이야기하고 이런게 아니다. 주위에 멋진 몇몇 사람들처럼 되고 싶다며 노력했다. 사실 이때의 나는 이게 무슨 마음인지는 알고있었다. 좋게 말하면 동기부여고 나쁘게 말하면 열등감이겠지. 주위에 이걸 말해주는 어른도 있었다. 난 이 분의 말을 깊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니 사실 이걸 받아들일만큼 난 철이 들지 못했다고 보는게 맞다. 난 따돌림을 당하기 전의 내 모습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타인에게 나를 보여준다고 했을때 난 그렇게 깔끔하지는 못했던거 같다. 깔끔한 사람이 어떤 느낌이냐면. 그러니까 타인과 나 자신 둘다와 친한사람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이 <존 말코비치 되기>는 나와 같은 시간을 보냈거나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추천하면 좋을 것 같은 작품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보라고 하고 싶다. 과연 나 자신은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인가. 내가 아니라 타인이 되었을때 세상이 그런 우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주는가. 과연 이런 우리가 행복하다고 볼 수 있는가. 건강한 자아란 어떤 것인가. 뭐 이런 실존적인 문제에 고민이 있는 분들을 위한 작품이다. 영화는 스스로 생각해 볼만한 것들을 던져준다. 내가 진짜 원하고, 내가 정말 찾아야 하는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를 우리와 함께 시작한다.



<존 말코비치 되기>는 자아정체성에 관한 영화다. 주인공 크레이그가 나온다. 크레이그는 그냥 별볼일 없는 꼭두각시 인형 예술가다. 그는 어느날 위기를 맞는다. 실업자가 된 것이다. 꼼짝없이 백수가 된 그. 아내 로티는 그에게 직장을 가지라고 조언해준다. 아내의 말을 듣고 구직활동에 나서고 취업에 성공한다. 어쩐지 나사가 하나 빠진것 같은 직장이지만 채용의 기쁨과 함께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매력적인 맥신을 만난다.

 

맥신은 자존감 높은 여자의 좋은 예시쯤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성격을 보여주듯 크레이그의 개수작에 '난 너랑 사귈의향이 없다'며 돌직구를 날린다. 하지만 아내가 있음에도 맥신에게 끌리는 주인공. 그렇게 맥신을 꼬시기 위해 전력투구를 하지만 별볼일없는 쭈구리에 심지어 아내까지 있는 크레이그에게 끌릴리가 없다. 그렇게 맥신과 사랑을 나눌 수 없음에 자학하는 하루를 보내다가 사무실 귀퉁이의 한 통로를 만나게 된다. 그 통로는 15분동안 당시 최고의 배우 '존 말코비치'가 될 수 있는 통로였다.


이 통로로 놀라운 경험을 한 크레이그. 아내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는다. 아내 로티는 호기심에 이를 체험하고자 하고, 이를 통해 존 말코비치로서의 삶을 15분동안 경험한다. 로티는 이 시간을 통해 자기가 여자보단 남자의 삶에 더 잘맞는다는걸 알게된다.  한편, 입이 가벼운 주인공은 맥신에게 이 통로를 발견한 사실을 털어놓는다. 맥신은 로티와는 다르게 굳이 이 통로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사업도구로는 괜찮을 것이라고 크레이그에게 제안하고 주인공은 이를 수락한다. 맥신과 크레이그의 동업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돌발변수가 생긴다. 새로운 정체성을 찾은 로티다. 로티는 존 말코비치로서의 15분을 통해 맥신과 사랑에 빠지고 맥신 역시(존 말코비치가 된 상태의)이 인물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니까 크레이그는 로티와는 결혼했지만 맥신을 마음속에 두고 있고, 로티는 맥신을 좋아한다. 반면 맥신은 로티 본체를 좋아하는게 아니라 존 말코비치가 된 그녀를 사랑하고 크레이그에게는 관심이 단 1가지도 없다. 이 얽히고 설킨 삼각관계의 결말에 대한 미스터리가 영화 종반부까지 쭉 이어진다. 영화의 메세지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내가 아닌 모습으로 사랑받는 주인공들을 보며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다.


나 역시 이 영화를 통해 나 자신을 돌이켜봤다. 앞에서 썼던 나의 어느 시기가 생각났다. 부정적인 인간관계에 갇혀 살던 나는 내 주위의 멋진 누구처럼 살고 싶었다. 그 태도가 주위사람들에게 쓰잘데기 없는 오해만 만든다는걸 알고 나서는 나 자신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끔 내 자신에게 묻는다. 이게 맞는걸까. 내가 원래 원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삶이 맞는걸까. 난 잘가고 있는걸까. 솔직히 지금의 나는 잘 모르겠다. 3년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드라마틱하게 변했다고는 생각하지만 내가 겪는 일이 크게 달라진건 없다고 느낀다. 취미에 스니커즈 수집과 여행에 독서가 다시 추가되고 또 필름카메라 들고다니기까지 생겨도 나는 나였다. 1997년 11월에 태어난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어쩌면 이곳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섬세하단 핑계는 소심한 모습으로, 센스가 좋다는 말은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말로 나는 나를 비난한다. 이 생각에 빠질때면 누가 나를 격려해줬으면 좋겠다.


 영화는 '잘하고 있다'며 격려하진 않는다. 영화 자체가 블랙코미디적 성향을 띄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스스로와 싸우고 있는 우리들에게 격려 대신 다른 예시를 보여주며 조언해준다. 이 예시는 앞서 말한 세가지 질문과 호응한다.  첫번째.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타인의 것을 빌린 삶이 과연 내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두번째. 그래서 얻은 관심과 사랑이 내 본질적인 무언가를 채워줄 수 있는가. 세번째. 내 자신이 타인에게 사랑받기 위해선 정말 선천적인거 뺴고는 답이 없나. 별것 아닌거 같지만 사실 사람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사실이다. 첫번째 질문에 답해보자. 이건 영화의 엔딩부분을 직접 보면 알 수 있다. 타인의 기준을 갖고와서 남을 재단하는 순간 그 사람이 아니게 될 것이다. 아마 그 타인을 따라하는 누군가가 되겠지. 두번째. 그게 내 인생의 무언가를 채워줄 수 있을 것인가. 이것도 이 작품으로 답할 수 있다. 내 인생의 기준이라는게 없는데 어떻게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까? 또한 세번째도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선천적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정말 필요한건 내가 내 자신을 이해하는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크레이그의 변화하는 처지와 레스터 박사의 친구들을 보자. 이 사람들의 본체는 사실 근본적으로 알 수 없다. 반대로 본체를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인물은 존 말코비치 본인과 맥신이다. 굳이 타인이 되서 자아가 변하는 상황을 연출하지 않는 두사람을 세상에게 사랑받는 인물로 설정한 것은 감독 스파이크 존즈와 각본가 찰리 카우프만이 분명히 의도한 바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일때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걸 찾기 위해 멀리갈 필요가 없다. 정말 소중한건 존 말코비치가 본인일때 즐기는 소소한 일상처럼 우리 주위에 소박한 것들일지도 모른다.


좋은 작품이다.  <이터널 선샤인>과 <이제 그만 끝낼까 해>의 역설을 좀 더 소프트한 버전으로 우리에게 건내는 영화였다. 이 작품 덕에 나도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인생 답이란게 나와있나. 그렇다면 내가 내 자신에게 문제를 건내주고 관문을 건너는게 오히려 더 나을지도 모른다. 우리 인생이 쉽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거의 대부분의 삶의 순간은 외롭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터널 션샤인>의 엔딩부 두 주인공처럼 'OKAY'라며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선택지가 있고, 또 능동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자존감이 낮거나 자아를 찾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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