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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 Jan 21. 2024

먹는 행위를 통해 서늘한 질문을 던지는 '클럽 제로'

<클럽 제로> 스포일러 없는 리뷰

새로운 선생님


이 영화의 주인공은 미스 노백(미아 바시코브스카)다. 새로운 일을 시작한 미스 노백. 엘리트 학교의 구성원으로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다. 학생들에게 건강한 식습관을 전달하는 것이 그녀의 목표다. 다방면으로 채운 수많은 수업 도구들. 이 미스 노백의 풍부한 준비성은 학생들의 주목을 끌었다. 노백의 수업을 듣는 아이들. 수업을 듣는 이유는 각기 다양했다. 누구는 장학금을 받고 싶었고, 어떤 아이는 다이어트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소한 이유에서 학생들이 청강하게 된 시작한 이 수업은 점점 더 광기를 표출하기 시작한다. 아연실색하는 부모님과 선생님들. 하지만 이것이 무색하게 수업은 저 멀리로


콘크리트 유토피아


이 영화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보고(씨네랩 감사합니다!) 가장 먼저 떠올린 작품은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한국인에게 서려있는 집에 대한 강박을 소재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면서 집에 대한 이야기와 어떤 영화로서의 맥락이 서로 겹쳐 보인다.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 <클럽 제로>는 먹는다라는 소재와 ‘그 어떤 영화’로서의 맥락을 겹치고 있다. 특히 여주인공 미스 노백이 아이들에게 갖는 이미지가 그런데, 인물들이 갖고 있는 결함을 노백이 채우는 듯한 묘사가 이 맥락으로서의 이미지를 더 한층 강화시킨다.


이런 비유가 그냥 단지 있어 보이려고 넣은 건 아니다. 물론 엄태화, 제시카 하우스너 감독님에게 진짜 ‘그냥 넣으셨나요’ 물어본 것은 아니지만, 글쓴이는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지적하는 것이 집이 그만큼 한국인들에게 필수적이라는 비유를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클럽 제로> 역시 마찬가지다. 먹는다는 행위를 인간의 어떤 모습과 대비하고 싶었는지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유는 인류의 필수조건을 충족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현대인들에게 '먹는 것'에만 한정 짓는 것이 아닌 맹신과 불신을 다뤘다는 점에서 중요한 설정이 되는 것이다.


이 다른 텍스트(맥락)를 가져온 감독의 의도는 시각적인 측면과도 이어진다. 이 영화는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잘 짜인 미장센으로 이루어져 있다. 웨스 앤더슨이 이런 동화 같은 이야기를 짜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야기의 근거에 미장센을 두는 것이다. 이 이유는 웨스 앤더슨이 관점에 대해 다룬 영화들을 만들었기 때문에, 아름답게 묘사하는 것도 중요한 연출 방식이었다. 이런 식의 비유가 1대1로 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미장센이 이야기의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는 유사한 점이 있다고 느껴진다. 이 영화를 우화같이 연출해야 이 맥락과 닿는 부분이 있는데, 이 맥락으로 읽는 것의 토대가 되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어떤 책 몇 권이 떠오른다.


사운드의 힘


이 영화에서 강박적인 미장센도 인상 깊지만 그거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사운드다. 이 영화는 시/청각적으로 관객을 압박한다. 감독의 연출력이 빛을 발한 경우가 되는 것이다. 특히 '험~'하는 소리는 여러 관객에게 인상 깊을 것이다. 왜 이 장면들이 기괴할까? 이는 감독이 영화의 소리들을 전부 장악했고, 그 나름대로 통제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청각적인 측면에서는 감독이 섬세한 분인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소리를 넣어야 관객이 기괴하게 느끼고 영화의 생동감도 살릴 수 있을까 고민한 섬세한 연출력 덕분이기도 하다.


또 위에서 쓴 바와 같이 청각적인 것만큼이나 시각적인 요소에 집중하기도 했다. 이는 웨스 앤더슨 같은 강박적인 미장센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먹는 행위를 어떻게 묘사했는지도 주의 깊게 볼 만하다. 이 역시 영화의 모든 언어를 통제한 감독의 연출력이 강점이 되는 부분이다. 반대 측면에서 약간 역겹다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인데 <더 웨일>을 생각하면 쉽게 머릿속에 이 모습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서늘한 질문


이 영화에서 약간 현실성이 없다고 느낄만한 부분이 있다. 바로 아이들이 아-무 의심 없이 미스 노백에게 현혹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부분이야 말로 영화의 핵심이다. 이 영화는 앞에서도 적었듯 하나의 우화처럼 연출했다. 우화처럼 연출했다는 점은 이야기에서 우리 인류의 모습을 일반화하겠다는 의미다(<별주부전>에서 게으른 인간상에 대해 이야기했던 바와 유사하게). 아이들이 가진 각기 다른 결핍과 이를 주체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모습이 이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바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보시면서 '이건 핍진성/개연성의 문제 아닌가?'라고 생각하시는 것보다 '감독이 왜 이런 장면을 넣었을까'라고 생각하시는 걸 추천한다. 


문과생에게 미적분 같은 느낌


이렇게 <클럽 제로>는 우화 같은 이야기로 라이프스타일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는 예술영화가 우리에게 다가가는 방식을 단적으로 드러냄과 동시에, 이 영화가 가진 어려움을 내포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영화 분명 쉽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나 <보 이즈 어프레이드>처럼 고난도의 예술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그 두 영화만큼이나 굉장히 심오하고 난해하게 느낄 부분도 몇 있다. 이 장면에서 그냥 일반적인 예술영화를 기대하고 간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글쓴이는 영화를 좀 보는 사람에게 오히려 추천하고 싶다. 사실 이 영화는 예술영화가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예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난해할 수 있어도 꼭 보면 좋을 영화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의 힘에 강세를 뒀기 때문에 뭔가 다른 구멍도 느껴진다. 이 영화의 기술적인 부분이, 특히 촬영과 관련된 부분이 깔끔했다고 보긴 어렵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먹는 행위와 우화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방식은 감독의 의도가 느껴진다. 그런데 촬영에서 시각적으로 보기가 편하지는 않았다. 이 역시 기괴한 시청각적인 요소의 일부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굳이 이 부분에서까지 이런 표현법이 들어갔어야 했는가? 는 의문점이다. 영화에서 날것의 흔적이 난다는 것이, 미장센의 완성도가 뛰어나지는 않았다는 관점에서 비판하고 싶은 부분이다. 감독님에게 '의도가 있었나요' 물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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