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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 Oct 14. 2024

악이 기지개를 켜다 말고 갑자기 퇴근한다면

<악이 도사리고 있을 때> 스포일러 없는 리뷰


 

악이 도사리고 있을 때


이 영화의 주인공은 형제 페드로(에지킬 로드리게스)와 지미(데미안 살로몬)이다. 살인사건을 추적하고 있던 형제. 맨 정신으로 볼 수 없는 시체가 여기저기서 보인다. 잔혹하게 살해된 시체에 경악하는 형제. 형제는 연이은 살인사건의 원인을 찾아보기로 한다. 멀리 가지 않아 도착한 결론. 마을 안에 악령이 있다는 말을 듣는다. 본거지로 찾아가 보기로 한다. 한 할머니의 집에 찾아간 형제. 노인은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악령에 씐 채로 썩어가고 있었다. 끔찍한 모습. 형제는 노인의 아들 우리엘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한다. 하지만 악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퇴장하지 않는다. 금기를 어기는 사람들 때문에 서서히 봉인이 풀린다. 서서히, 그리고 잔혹한 지옥도가 형제를 기다리고 있다.


진짜 도사리고 있을 때


이 영화에서 잔인한 장면을 활용하기 위해 사용된 연출방식은 흥미로웠다. 전면에 나타나는 것은 템포조절이었다. 구체적으로, 이 영화는 끔찍한 장면이 나타나는 데 있어 규칙이 없다. 카메라가 영화의 배경을 멀리서 찍는다. 시점쇼트로 형제의 관점이 영화의 카메라가 된다. 여기서 형제가 인식하는 대상을 보여주고 싶으면 사체를 그냥 카메라 안으로 들어오게 연출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아래에서 위로 형제와 사체를 함께 보여준다. 이게 되게 별 거 아닌 연출 같아 보이지만 이 영화가 가진 태도를 함축하고 있다. 악을 대단하지 않게 묘사한다. 그런데 제목 그대로 인물들 근처에 도사리고 있다. 시선을 위에서 아래로 돌리기만 해도 악이 드러나고 있다는 단면을 보여준 것이다.


영화가 처음으로 보여주는 비극에서도 이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초반부에 해당하는 장면인데, 카메라에 영화의 핵심인물 중 하나 루이스와 그의 아내, 그리고 동물이 있다. 동물을 살해하려는 루이스. 아내가 루이스를 만류한다. 이유는 금기를 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위 세 문장만 읽으면 영화가 ‘루이스가 금기를 어길 것인가’에 대한 서스펜스를 만들 거라고 예상하기 쉽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예상을 세련되게 빗겨나가며 초장부터 기선을 제압한다. 구체적으로, 루이스가 선택하는 과정이 굉장히 짧았다. 그리고 그 이후 상황을 짧게 보여주는 게 아니라 테이크를 최소한으로 잡았다. 금기를 어길 것인가에 대한 딜레마가 영화 후반부에도 이어지는데 이것에 비하면 이 과정이 굉장히 짧다. 이 연출이 후반부의 서스펜스에 있어 ‘언제부턴가 도사린 악이 우리를 덮칠지도 모른다’라는 공포감을 주기 충분했다. 또 이 장면을 촬영하는 방식도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의 핵심인 ‘선을 넘는다’라는 점에 있어 거리를 두고 대상을 포착한 것이 종반부 다다르기에 충분한 초석이 됐다.



하지 말라는 걸 하는 편


영화의 핵심 테마는 금기다. 금기라는 테마가 두 가지 맥락에서 작동하고 있다. 첫째. 플롯에서 금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가 플롯을 끌고 가는 방식은 과제를 연이어서 주는 것이다. 악령이 씐 우리델을 어떻게 처리할 지부터 시작한다. 이 우리델을 둘러싸고 있는 금기가 있다. 이 금기에 금기를 물어 서서히 영화가 이야기의 품을 넓힌다. 이것은 영화가 장르적인 문법을 그대로 승계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특히 영화가 2부로 넘어가면서 이야기의 흐름을 바꾸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인물을 둘러싼 형제의 개인적 일화가 특별하다. 살짝 작위적인 것 같지만 일반적인 선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밀도 있는 설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인물은 심지어 영화 내에 다른 금기를 제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누군가의 입을 통해 금기가 제시된다. 한 가지만 빼고 말하는데, 이 인물이 그 빼먹은 하나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영화가 금기를 다룬다는 테마를 충실하게 이행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시각적으로도 영화가 금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꼼꼼했다. 이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열광할 것 같으면서도 '이거 별로야' 싶은 것이 같다. 바로 폭력성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호러영화가 있다. <쏘우> 시리즈,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큐브> 같은 영화다. 이 영화(내지는 시리즈)들의 공통점. 다 큰 성인이 나온다는 점이다. 이건 할리우드 내지는 전 세계의 영화시장이 룰처럼 지킨 것이다. 사실 굳이 이 룰 외의 무언가가 필요하기도 했지만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윤리적으로 '굳이 아이들까지 폭력에 노출시킬 필요가 있을까' 싶은 것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이 <악이 도사리고 있을 때>는 이 금기를 널뛰기한다. 이게 영화의 전체적인 톤과 이질적이면 굉장히 비겁해 보이기 쉽다. 단순히 자극적인 톤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이라면 감독이 미학적으로 뭘 고려했는지 전혀 느껴지지 않을 테니까. 이 영화는 후반부 폭주하는 이미지와 플롯을 보여주기 위해 전초를 잘 깔았다. 그리고 앞 문단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줄거리부터 금기를 다뤘기 때문에 소모적이지 않다. 글쓴이가 이렇게 써도 이 영화를 보고 싶은 여러분은 쉽게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 외로, 나름 창의적인(?) 잔혹함을 보여준다.


변화무쌍


글쓴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리듬감이다. 구체적으로 이 영화는 보여주고 싶은 것을 힘주어 보여주지 않는다. <스마일> 같은 영화가 있다고 해보자. <스마일>은 저주에 걸린 사람들을 힘 빡 줘서 보여준다. 점프 스케어를 통해 사운드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기괴한 웃음으로 저주의 이미지를 강화한다. 아니면 <곡성>처럼 템포를 빠르게 전달하는 것도 호러영화의 문법과도 같았다. 이 영화는 반대다. 금기를 넘는다는 테마에 적합하게, 하지만 내내 빠르거나 느리지 않게 유효타를 적절하게 먹인다. 영화가 중후반부에서 템포가 루즈해지기 전까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끌고 갔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어디에서 자극적인 게 나타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인물들을 덮치는 것이다. 끝까지 이야기를 몰입시키는 힘이 영화의 장면을 기획하는 데 있다는 점이 '이 영화는 노작이다'라는 생각이 들기 충분하다.


편의적으로 기대다


이 영화에 대해 가장 아쉽다고 느끼는 것. 주인공이다. 주인공 페드로는 공포영화의 클리셰 그 자체인 인물이다. 다른 인물들은 금기를 넘니 마니 하는데 이 인물은 굉장히 안정적으로 편안하게 간다. 대표적으로 중반부. 이 인물이 공간을 두 번 옮긴다. 첫 번째로 공간을 옮길 때 이 인물이 누군가와 함께 동행한다. 이 일행을 구성하는 방식이 굉장히 안일하다. 이 선택은 영화의 톤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영리한 것이 핵심인 영화에 인물은 바보 같은 선택을 하기 때문에. 두 번째. 이 두 번째 공간 이동은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다(그렇게 감독이 의도했다). 변화무쌍한 리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 것과는 정반대로 이 장면에서 인물들에 감정이입할 토대가 빈약하다. 서서히 집중했다가 후반부의 광기로 이어져야 하는데, 중반부까지 쌓아놓은 플롯이 무의미해진 것이다. 이렇게 상투적으로 대처할 거라면 동생이 누굴 짝사랑했고, 이 인물이 현실적으로 처한 상황이 뭐인지는 아무 의미가 없다. 모티브를 내내 반복해서 보여주면 뭐 하나? 결과적으로 주인공이 그걸 거부했는데.


또 이 영화에서 마무리 짓기 위해 마무리지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주인공의 가족과 관련된 부분이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부분이 그렇다. 이 주인공의 어머니는 다른 캐릭터들과는 다르게 이질적으로 행동한다. 가령 형제는 이 마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고 있다. 어머니도 어렴풋이는 들었다. 그리고 예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악마의 존재에 알고 있을 것이다. 이걸 굳이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작위성을 덧붙이는 선택이었다. 뿐만 아니라 극후반부 이 인물의 행방을 보여주는 방식도 뒷심이 부족했다. 페드로가 굳이 이런 선택을 했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데, 다른 인물들에 비해서는 인과관계가 희미해서 대충 마무리지었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결정적으로 이 영화를 보면서 글쓴이가 한국 영화 팬이라는 것이 조금 얄궂게도 느껴졌다. 이 영화의 후반부는 특정 한국 영화에 영향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한국 팬들 입장에서는 이 영화의 후반부가 익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 단점은 치명적이다. 아드레날린을 최대치로 분비하며 질주하던 플롯이 후반부가 되어 '에이 이거 그거 아닌가'로 끝나기 때문이다. 


뭉뚱그린 악


전체적으로 흥미로웠지만 후반 마무리에서 힘이 빠졌다는 게 총평이다. 어떤 걸 생각하고 각본을 쓰고 이 영화를 위해 장르적인 문법을 어떻게 연구했는지 너무 잘 알 것 같다. 그리고 그걸 위해 파격적인 수위로 폭력을 묘사한 것도 나름 근거가 있었다. 그런데 영화가 후반부에 힘이 빠지다 못해 전면적으로 대치되는 선택을 해 중반부까지의 서스펜스가 얕아지는 선택지를 뒀다. 그래서 악이 도사린다는 게 설명하려다 말았다. 전지전능한 악의 존재가 중반부까지 계속 등장하다 갑자기 카메라를 반대편으로 돌렸으니 선택과 집중에 있어 실패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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