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팬텀
<오페라의 유령>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다. 가면을 쓴 슬픈 천재, 그의 사랑, 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는 감정. 그러나 뮤지컬 <팬텀>은 이 오래된 서사를 한 인물의 내면으로 깊이 파고들며,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얼굴을 꺼내 보여준다. 그는 유령이 아니라, 한 번도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한 존재였다. 사람들의 눈에 들지 못한 얼굴,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감정, 살아 있는 채로 지하에 유배된 한 사람. 무대는 그를 다시 존재하게 만들었다.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빠르게 그 세계의 호흡에 감겼다. 무대는 자주 전환되었지만 하나의 숨결처럼 부드럽게 이어졌고, 공간은 물리적인 배경이 아니라 감정의 지층처럼 쌓여 있었다. 지하의 어둠과 무대의 찬란함, 분장실의 그림자와 파리의 거리 풍경까지, 그 각각의 장면이 단지 시각적 장치가 아니라 팬텀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기억과 내면의 조각처럼 다가왔다. 그토록 많은 장면이 있었지만, 그 어떤 전환도 과하거나 덜하지 않았다. 이야기의 호흡과 감정의 높낮이에 맞추어 무대는 유려하게 펼쳐졌고, 그 위에서 우리는 한 인물의 외로움과 아름다움을 따라 걷게 되었다.
무언의 장면은 때때로 언어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한다. 팬텀의 부모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는 장면은 대사 한 줄 없이 발레 듀엣으로 그려졌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고, 함께 춤추고, 운명이 어긋나고, 결국 이별을 향해 나아가는 흐름은 단지 아름다운 안무를 넘어선 서사 그 자체였다. 인간의 몸이 그토록 정교한 감정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무대 위에서 움직이던 두 사람의 몸은 하나의 악기처럼 조율되어 있었고, 마치 그 몸이 이야기의 언어처럼 감정을 연주하고 있었다. 언어가 닿지 못하는 곳까지 도달하는 감정의 형식, 그것이 바로 춤이라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공연의 긴장과 비극 사이, 마담 카를로타라는 인물은 균형의 축처럼 존재했다. 이날 이 역할을 맡은 리사 배우는 설정을 능숙하게 뒤틀어냈다. 원래는 크리스틴보다 부족한 가창력을 지닌 인물로 그려져야 하지만, 그녀는 그저 ‘덜 부르지 않았다’. 오히려 뛰어난 가창력으로 관객의 기대를 흔들고, 능청스럽고 유쾌한 연기로 그 틈을 채웠다. 지나치게 우스운 인물이 되지도, 진지한 인물로 고정되지도 않은 그 중간 어디쯤에서 리사는 독보적인 균형감을 보여줬다. 마치 유쾌함도 무게감을 가질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듯했다. 그날의 무대에서, 내가 가장 자주 눈을 두게 된 인물은 그녀였다.
<팬텀>이 단지 슬픈 이야기로 머물지 않았던 이유는, 음악 덕분이었다. 23인조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음의 층위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을 밀어 올리는 하나의 파동이었다. 크리스틴의 목소리는 단지 아름다웠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지닌 투명한 결심과 슬픔의 흔들림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기에 인상 깊었다. 팬텀의 노래는 멜로디라기보다 독백에 가까웠고, 그의 음성에는 이 세상과 자신 사이에 놓인 깊은 골짜기가 들어 있었다. 음악은 감정의 울림이 되어 극 전체를 감쌌고, 무대 위 인물들과 객석의 숨결이 어느새 하나로 섞이는 느낌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극장을 나설 때, 팬텀은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도 그의 얼굴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말하지 않았지만, 음악과 춤, 침묵을 통해 진심을 전했다. 그토록 고요하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슬픔을 건네는 사람을, 누가 유령이라 부를 수 있을까.
어쩌면 <팬텀>은 묻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존재에게 ‘괴물’이라는 이름을 붙이는가. 그리고 그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얼마나 쉽게 익숙해지는가. 결국 이 공연은 존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바꾸는 이야기였다.
그는 끝내 가면을 벗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무대 위에서, 우리는 가면 너머의 진심을 보았다. 그것은 유령의 얼굴이 아니라, 가장 인간적인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