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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야매 Aug 23. 2019

빨간 국물을 먹는다는 것

내게 김치찌개가 갖는 의미에 대하여

우리집 김치찌개, 지금보다 더 끓여야 맛있다


내가 한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은 것은 몇 년 전 뉴질랜드를 여행할 때였다. 맛있는 음식이 너무나 많았다. 이국적이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선택지들 사이에서 메뉴를 고르느라 김치 같은 것은 생각날 새가 없었다. 한국에 돌아가기 전까지 최대한 다양한 음식들을 맛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함께 여행 중이던 일행들의 생각은 나와 같지 않았던 모양이다. 도착한지 3일쯤 지나자 하나둘씩 한국 음식을 찾기 시작했다. 얼마 못 가 우리 일행은 인근 한인마트를 향하게 됐다. 머나먼 타지에서까지 고춧가루가 들어간 음식을 기어코 찾아 먹어야 하느냐가 나의 솔직한 속마음이었지만, 그 머나먼 타지에서 굳이 일행들과 동떨어져 혼자 밥을 먹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기에 나도 그들 한식 원정대 틈에 끼어 제육볶음에 젓가락을 댔다.


그 이후로도 한식 파티는 종종 벌어졌지만 그때마다 나의 회의감은 이어졌다. 이윽고 나는 내 한식에 대한 갈망이 한국인 평균에 비해 다소 떨어진다는 결론을 얻어내기에 이르렀다. 맵고 뜨거운 음식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일주일은 매일 빨간 국물에 밥을 말아 먹었다는 친구들과는 다르게 나는 한국에 와서도 굳이 한식을 찾아먹지 않았다. 한식이 크게 그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랬던 내가 이번 여름, 1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공항 의자에 축 늘어진 채 인천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떠올렸던 음식은 엄마의 김치찌개였다. 고춧가루가 가득한 그 빨간 국물이 간절하게 먹고 싶었다. 할머니가 담근 김치에 돼지고기를 뭉텅 썰어 넣고 오랫동안 끓여낸 그 국물 한 숟갈이 그리웠다.


집에 도착했을 때 부엌에서는 김치찌개가 끓고 있었다. 식탁 위로 따뜻한 쌀밥과 함께 빨간 김치찌개가 올라왔다. 한 숟갈 국물을 떠 맛본 김치찌개는 나의 기억과는 조금 달랐다. 국물은 조금 더 시큼하고 건더기들 사이로 전에는 넣지 않던 양파가 보였다. 아마 평소보다 더 익은 김치의 상태와 엄마의 유튜브 재생목록을 점령한 백종원 레시피의 영향인 듯 했다.


그럼에도 나는 한술 만에 만족했고 행복해졌다. 빨간 국물은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나를 위로했다. 내가 그리워했던 것들은 국물 속에 모두 녹아있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도착할 시간을 계산해 냄비에 불을 올렸을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익은 김치의 시큼함이나 양파의 단맛은 낯설었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국물에 밥을 말아 한 그릇을 다 비웠다.


그릇을 비우면서 이 식탁에서 했던 바로 지난번의 식사를 떠올렸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날 저녁이었다. 그날도 메뉴는 김치찌개였다. 메뉴가 겹친 이유가 우연인지, 김치찌개가 엄마의 가장 자신 있는 레시피여서인지, 아니면 내가 가장 잘 먹는 한식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엄마는 그날도 뜨거운 불 앞에서 기어이 빨간 국물을 끓였다는 사실이다. 그 저녁에도 나는 그 맵고 뜨거운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아마 그 김치찌개는 나의 군입대 전 날에도, 학교 기숙사로 떠나기 전 날에도, 수능 전 날에도 그리고 별 일 없던 날 저녁에도 식탁으로 올라 왔을 것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그 빨간 국물을 떠먹고 자랐다. 내가 삼킨 그 국물들은 식도를 타고 내 몸 곳곳으로 들어와 피와 살이 되었다.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건 엄마의 찌개다. 나라는 인간은 엄마의 김치찌개로 만들어진 셈이다.


젊은 시절 한국을 떠난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늙어 치매에 걸리면 한국 음식만을 찾는다고 한다. 생의 대부분을 독일에서 독일음식만을 먹으며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에는 한식을 그리워한다. 수십 년의 기억이 흩뜨려지는 와중에, 역설적이게도 어릴 적 먹던 한국 음식의 기억만은 더욱 또렷해지는 것이다.


그들이 한식을 그리워하는 이유가 맵고 뜨거운 맛 때문은 아니리라고 감히 짐작한다. 비록 육신은 독일에 묻힐지라도, 한국에서 나고 자랐기에 그들 역시 김치찌개로 만들어진 인간들이다. 인천행 비행기를 기다리던 그때의 나처럼, 그들이 그리워한 것은 맛보다는 위로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기구한 타향살이의 마침표를 직감한 그들이 마지막까지 놓지 못한 그 빨간 국물 한술은 많은 맛을 품고 있으리라.


앞서 말했듯, 나는 한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한식의 맵고 뜨거운 맛을 좋아하기가 힘들다. 조금만 매운 것을 먹어도 땀을 흘리고, 뜨거운 음식은 혀 데는 것이 무서워 한참을 식혀 먹는다. 고춧가루 잔뜩 넣고 팔팔 끓이는 경우가 많은 한식은 나와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또 한식을 찾는다. 유난히 지치는 날이면 몸이 먼저 빨간 국물을 원한다. 땀을 흘리면서 먹고 후후 불어서 먹는다. 한식의 맵고 뜨거운 맛이 내 취향이 아닐 수는 있어도 그 맛에서만 만날 수 있는 감정들까지 취향이 아닐 수는 없다. 나는 빨간 국물에서 맛 이상을 맛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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