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나리>, 2021
흔히들 잡초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한다.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지만 꿋꿋하게 아스팔트나 흙바닥에서 질기게 살아가는 이름 모를 풀들. 잡초들은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고, 가끔 작은 꽃들도 피우며 그렇게 자라난다. 짓밟혀서 순간 사라질지라도 언제든 다시 고개를 내민다.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보통 잡초를 닮고 싶다는 사람들은 이런 잡초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사실 잡초의 이미지가 어쨌든 저쨌든, 잡초는 별로 쓸 일이 없지 않나? 먹을 수도 없고. 그리고 생각해보면 잡초도 자라기 위한 여건이 있기는 해야한다. 최소한의 흙이라던지 물이라던지. 사실상 '쉽게' 자라는 식물일 뿐. '그냥' 자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도 나름의 생명인데.
하여튼, 나는 식물 자체에 관심이 없는 쪽에 가깝다.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문학 속 수많은 식물 그리고 자연의 이미지들을 접했지만 그것들은 글 속 하나의 소재나 주제로만 스쳐 지나갈 뿐 크게 내게 감명을 주지 못했다. 먼저 말했던 잡초에 대한 이미지도 수많은 문화 컨텐츠를 거쳐가며 만들어진 내 머릿속 무의식적인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미나리'라니? 영화의 제목부터 내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던 것 같다. 미나리 하면 떠오르는 게 뭘까. 미나리가 들어간 음식들. 그 독특한 향. 음식들의 향까지 덮어버리는 진한 미나리 향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나는 미나리를 좋아하지 않는데, '미나리'라 제목이 붙은 한 가족의 이야기는 궁금했다. 대체 어떤 이야기길래 제목이 나물 이름일까. 시간이 될 때까지 발을 동동 구르다가 드디어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는 미국의 작은 도시, 아칸소로 이주하게 된 한국 가족이 차로 이동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털털 거리는 흙길을 끝도 없이 들어가는 차. 이내 도착한 푸른 들판에는 '바퀴 달린 집'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세로로 길이가 긴 트레일러다. 남편 '제이콥'은 '빅 가든'을 만들거라며 들뜨지만 아내 '모니카'의 표정은 어둡다. 트레일러 내부를 살펴보는 표정에 불만이 가득하다. 영화는 처음부터 이들의 삶이 그냥 평화롭지만은 아닐 것이라 나지막히 알려준다.
아빠이자 남편인 제이콥은 아이들에게 따뜻한 아버지인 것 같지만 그만큼 가부장적이기도 하다. 병아리 감별사로 오랫동안 일해온 그는 그 생활을 몸서리칠 정도로 싫어하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달걀도 낳지 못하고 맛도 없는 수컷 병아리들은 소각되어 검은 연기로만 남는다. 그는 병아리들이 소각되는 굴뚝을 바라보며 수컷이 쓸모있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아들 데이빗에게 말한다. 그는 '쓸모있는' 수컷이 되기 위해 더욱 더 농장 일에 매달린다. 모니카는 여전히 이런 삶이 마음에 들지 않고, 그러던 와중에 한국에 있던 모니카의 엄마 '순자'가 찾아오게 된다.
사실 이 영화를 이끄는 강력한 힘은 윤여정 배우가 맡은 '순자'와 손자 '데이빗'의 관계에서 나온다. 윤여정이 연기하는 순자는 내 기억 속 할머니 그 자체다. 딸을 생각하는 마음에 고춧가루와 멸치를 바리바리 싸오고, 손때 뭍은 봉투에 모아놓았던 돈을 건네고, 애들은 아프면서 크는 거라며 큰 소리 치는 할머니. 그 할머니는 뱀이 나와 아이들이 가까이 하지 않던 숲 속 물가에 미나리 씨앗을 뿌린다. 무럭무럭 자라난 미나리들을 보며 몸에도 좋고, 맛도 좋고, 약으로도 먹는다며 미나리에 대한 칭찬을 쏟아낸다. "원더풀, 원더풀 미나리!" 순자의 외침은 관객들의 뇌리에 꽂힌다.
제이콥의 농장은 뜻대로 되지 않고 힘겹기만 하다. 트랙터로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돈을 주고 물을 끌어다 쓰지만 마음처럼 농작물을 키우는 것도, 파는 것도 되지 않는다. 그때마다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순자가 심은 미나리를 떠올린다. 미나리는 물을 주지 않아도 잘 자란다. 그 미나리를 들여다보면 씨앗을 한국에서부터 소중히 가져와 심은 순자의 사랑이 보인다. 자신에게 심통이 나 오줌을 먹인 손자를 보며 "재밌었어~"라고 말하며 다그치지 않는 사랑. 그녀의 사랑은 이내 그녀를 거부하던 손자 데이빗에게 가닿게 되고, 심장에 무리가 갈까봐 뛰기를 주저하던 데이빗은 영화의 말미에 뛰기 시작한다. 그리고 순자의 손을 붙잡고 말한다. 여기로 가면 안된다고, 같이 가자고.
사실 풀이건 사람이건 자라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순자가 뿌린 미나리 씨앗은 아무렇게나 잘 자란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무들을 피해 햇빛이 내리쬐고, 물도 충분한 자리인 것이다. (진짜 미나리가 자라기 위한 조건은 솔직히 잘 모르지만, 그렇다고 치자. 식물이 잘 자라려면 물과 햇빛은 필수니까) 이 가족들도 어떻게 보면 하나의 씨앗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들판에 덜컥 뿌려진 씨앗들. 자칫하면 그들은 말라 죽을 수도 있었고, 폭풍우가 쏟아질 때면 쓸려 사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싹 피우게 한 것은 그럼에도 가족이라는 이름이었고 사랑이었다. 영화 말미, 의도치 않게 큰 사고를 낸 순자는 농장을 벗어나려 하지만, 그녀의 손을 잡고 이끈 데이빗과 앤이 있었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생기는 수많은 관계 중 가장 우선으로 치는 것은 보통 가족간의 관계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이 있듯이 부모와 자식, 아내와 남편 관계는 관계들 중 가장 우선시 되는 관계이기도 하다. 순자는 모니카의 엄마로, 데이빗의 할머니로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관계의 중심에서 그들은 온화하게 붙잡는다. 우리가 보기엔 그저 평범한 할머니의 모습이지만, 그녀가 뿌린 씨앗은 꿋꿋이 자라나 그들에게 희망을 안긴다. 어쩌면 비참할 수도 있었던 결말, 그들은 다시 잘 자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렇게나 자라고 싶어도, 결국 그 힘은 우리를 '아무렇게나 자라게 두지 않을 것'이다.
몇 년 전 세상을 떠나신 외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가끔씩 명절을 맞아 할머니 집에 가면, 할머니는 손수 만든 음식들을 상이 가득 차도록 차려주셨다. 식혜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식혜도 한가득 만들어 두었던 할머니. 손자가 죽기 싫다고 했을 때 그 말을 듣고 꽉 안아주었던 순자를 보며 나도 할머니에게 저렇게 안겼던 때가 있었지 하고 생각했다. 지금 할머니는 세상에 없지만, 서울은 위험하니 조심히 지내야 한다고 내 손을 잡아주던 할머니가 있었기에 나는 좀 더 힘을 얻어서 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할머니가 나를 생각한 것처럼 할머니를 생각한 적이 아마 없을 것이다.
금일자로 <미나리>가 30만 관객을 돌파했다. 코로나 19 이후 얼어붙은 다양성 영화 시장에서 개봉 1주만에 기록한 30만이란 관객수는 나에게 너무나 소중하게 다가왔다. 그 30만명 중 한 명의 관객이 될 수 있어 기뻤고, <미나리>가 하나의 씨앗이 되어 자라 많은 관객들을 만났듯이 더 많은 영화들이 좋은 결과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