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를 뵙고 왔다. 이곳저곳 말을 듣지 않는 몸 때문에 오늘은 매주 드리던 예배도 못 드렸다고 한다. 그래도 바깥에 자주 돌아다니시던 할머니가 요 며칠 집에만 누워있었다고 해, 소화도 시킬 겸 환기도 할 겸 함께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할머니는 삶을 견디어 내고 계셨다. 점점 더 흐릿해지는 시력과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다리를 짊어지고 오늘을 살아내고 계셨다. 죽음의 무게를 지고 애써 걷고 계셨다. 분명 그 앞에서 숭고한 무언가를 느꼈다.
우리 사이를 넘나들어 감동을 주던 성경을 소리 내 읽어드렸지만 왜인지 할머니에게는 어떠한 감동도 없는 듯했다. 감미로운 찬송도 오늘은 창문 밖 소음에 힘없이 묻힌다. 분명 그 앞에서 생기를 짓누르는 무언가를 느꼈다.
할머니를 둘러싼 무기력과 침묵 뒤로 떨림 없는 인사를 한 후에, 놀란 마음으로 스스로를 향해 질문했다. 죽는다는 건 뭘까. 인생이란 뭘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 걸까. 허무라는 안개 속에 길을 잃었고, 시간이 멈춘 듯했다.
이런 인생에서 처절하게 죽은 것도 모질라 다시 살아나기까지 한 예수란 존재는 뭘까. 이런 몸 안에 하늘이 있다고, 그 하늘을 스스로 길러야 한다고 한 수운은 뭘까. 내일 세상이 끝나더라도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한 이는 어떤 마음이었던 걸까. 그들을 떠올리며 허무를 넘어서는 어떤 빛을 느꼈다.
나보다 앞서 죽어가는 몸을 입고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몸과 마음으로 생명을 낳고 기르는 이들이 있다. 육체의 아픔을, 고독을, 무기력을 삶의 조각으로 껴안고 삶을 길어내는 이들 앞에 할 수 있는 말은 뭐가 있을까. 뭐가 있을까.
산다는 것은 고통을 전제하는데. 내 모습이 주사 바늘이 너무 아프다고, 무섭다고 울음을 터트리는 다섯 살 아기 같다.
아프지 말라고, 몸 잘 살피라는 어른들의 말이 으레 하는 말인 줄 알았다. 진부하다 여겼고 귓등으로 들었었다. 그게 아니었다. 그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이젠 내가 그 말을 한다. 힘들어도 조금씩이라도 걸어야 한다고. 입맛이 없어도 조금씩이라도 밥 챙겨 드시라고. 자주 찾아뵙겠다고. 여리고 놀란 가슴으로 말한다, 인생을 앞서 걸어간 선배이자 스승인 할머니는 다정하게 말한다. 네 얼굴을 보여줘서 고맙다고, 조심히 들어가라고.
할머니를 좋아하지 않았다. 크면서는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고 미워하는 마음 품기도 했었다. 그 어린 마음을 부끄럽지도 않게 떠나보낸다. 전화를 끊고 주저앉아 운다. 날 키워주신 할머니의 존재가 이제야 느껴져서 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