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저녁 기차여행
지난 금요일 저녁, 그리기 수업을 하고 있는 열세 살 학생들 중 세 명과 만나 따뜻한 저녁을 보냈다. 평소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어떤 생각과 마음 품으며 지내고 있는지 자유롭게 묻고 답할 수 있는 말판을 서로의 가운데 두고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한다. 이 날에 학생들과도 그런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어떻게 하면 더 재밌고 부담 없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말판을 새롭게 구성해 직접 만들었다.
말판은 기다란 기차모양이고, 우리가 그 기차를 타고 앞으로 가며 각 칸에서 제시하는 질문 카드를 뽑고 대답하며 보석을 모으는 방식이다.
<기차로 마음을 나눠요>
기차는 모두 열여덟 칸으로 되어 있다.
칸 마다 주어진 질문을 답했을 때 보석을 얻을 수 있다.
1. 모인 이 모두가 가위바위보를 한다. 이때 주먹과 가위 둘 중에 하나만 낼 수 있다. 모두 같은 걸 냈을 때 1칸, 한 명이라도 다른 걸 냈을 때 2칸을 앞으로 이동한다.
2. 기차는 세 가지의 테마로 되어 있으며, 각 테마에 맞는 질문 카드를 뽑아 모두가 질문에 답한다.
- “기차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 이것저것(밸런스) 질문이 들어있다. 예를 들면 좋아하는 계절 ‘봄’, ‘가을’ 중에 모두가 같은 것을 대답했을 때 보석을 얻을 수 있다.
- “도둑이 나타났다!”
: 마음이 몽글몽글해질 수 있는 질문이 들어있다. 예를 들면 ‘여기 있는 모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기’, ‘내 옆에 있는 친구에게 칭찬 두 개 하기’와 같은.
- “스파이가 나타났다!?”
: 속 깊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질문이 들어있다. 예를 들면 ‘요즘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 ‘최근에 내가 느낀 사랑의 모습’과 같은.
3. ‘찬스’가 적혀있는 카드를 뽑게 되면 원하는 칸으로 갈 수 있다.
질문판을 꺼내며 너희들을 떠올리며 직접 만들었다고 하니 학생들은 촉촉한 감동의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보석의 모양은 어떻게 생겼는지, 기차는 몇 칸인지, 칸마다 어떤 질문들이 적혀있는지 낱낱이 살폈다.
언젠가 열여섯 살 학생 두 명에게 ‘사랑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지’ 무거운 질문을 가볍게 던졌었다. 한 학생은 ‘어려운 질문인데요!’ 하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그 학생의 곁에 있던 다른 학생은 ‘이 주제는 위험하다. 자신들은 이 주제를 생각하다가 늪에 빠진 적이 있었다’ 고 했다. 늪에 빠졌던 적이 있음에도 다시 한번 떠올리고는 ‘사랑은 바라보는 것 같다’라고 했다. 그 후 바로 ‘사랑은 바라보는 것이지만, 바라보는 게 사랑은 아니에요. 아니에요 가 아니라, 아니라고 저는 생각해요.’라고 해줬다.
나는 지난밤 학생들과 함께 할 시간을 떠올리며 질문판을 만들었고, 학생들은 내가 가져온 질문판을 샅샅이 바라보는 것으로 사랑에 화답했다. 사랑을 주는 것도 어렵지만, 받는 건 더 어렵지 않은가. 학생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랑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받았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자신만의 모습을 나누기도 했고, 어떤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지, 어떤 생각을 하며 지내고 있는지 수업 때 나누는 것보다 더 긴밀하게 알 수 있었다. 한 학생은 카페에 가는 걸 즐긴다고 했다. 기분이 좋을 때 혹은 울적할 때 혼자 카페에 가서 맛있는 음료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친구들과 같이 가서 이야기를 나눈다고 했다. 자기가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론 집에서 가만히 누워 있는 걸 좋아한다는 친구도 있었다.
여기 있는 이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거나 사랑한다고 말하거나 너와 함께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하는 질문에는 조금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우리의 공간이 금세 달구어졌다. 쏘아 올리듯 말하고 나서는 부끄럽기도, 홀가분하기도 했다. 가깝게 매일 피부를 맞대며 지내고 있어 잘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지만, 사실 이것들이 우리의 진심이다. 고맙고, 사랑하고, 네가 있기에 기쁜 그 마음들. 이 마음들은 매일매일 우리 안에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그럼에도 꺼내는 데엔 많은 용기가 필요했고, 기꺼이 용기를 냈다.
고마워. 사랑해. 네가 있어 참 기뻐.
그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 읊조려 본다
어느 때 사랑을 느끼는지에 관한 질문에서 학생들은 ‘지금 이 순간’이라고 답했다. 지금 이 순간엔 여기 모인 우리, 나누어지는 이야기들과 마음들, 서로가 주는 온기와 입가의 웃음이 넉넉하게 담겨있을 것이다. 오늘은 어쩌면 서로에게 가장 예쁜 마음을 정성껏 전달하는 시간이었다. 기분이 참 좋은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학생들과 내년에 다시 만났을 땐 조금 더 치열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몸과 마음이 빠르게 자라고, 나와 너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고 세상에 대한 질문이 시작되기에 시선과 기운이 지금보다 더 안으로 집중될 것이다. 지금 나눈 마음들을 잘 기억하며, 그때마다 조금씩 펼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지금 나눈 마음들이 그때 서로를 비집고 들어갈 자양분이 될 거라 믿는다.
헤어질 시간이 되어, 비교적 멀리 사는 한생을 데려다주었다. 그 학생은 자신의 집 앞 공간을 구석구석 소개해주었다. 고즈넉한 공간이 참 편안하고 아름다웠다. 달빛 한 줌이 내려앉은 어둠 속을 돌아다니며 그 학생의 곳곳을 어루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서로가 머무는 공간을 함께 걷고 살피는 것엔 큰 힘이 있다.
자연스럽게 내 열세 살 시절을 떠올려본다. 당시 담임선생님을 참 좋아했고,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학교가 끝나고 선생님께 다가가 '선생님, 뭐 도와드릴 것 없나요?'라고 물었었다. 그때 선생님은 피곤한 얼굴로 없다고 하셨는데, 그때 나는 선생님께서 우리를 귀찮아하신다고 느꼈었다. 지금 다시 돌아보면, 그 많은 학급의 학생들을 챙기고 업무를 보는 일상이 참 고될 수 있었겠다 싶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떠오르는 것을 보면 어린 마음은 크게 좌절되었다고 여겨진다. 지금 이 아이들이 그때의 내 마음과 완전히 같지는 않더라도, 선생님을 향한 아이들의 마음은 참 크고, 맹목적이고, 순수할 것이다. 이젠 내가 선생님으로 아이들을 만난다. 아이들의 마음을 늘 생기 있게, 선물처럼 받고 화답하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 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