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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찌 Apr 10. 2018

장거리 연애에서 필요한 덕목

장거리 연애를 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다.

사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은 장거리 연애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의 연애 그리고 일반 인간관계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베를린의 어둡고 추운 겨울이 드디어 막을 내리고 따뜻한 봄날이 왔다. 겨우내 우울하게 있던 베를린의 청춘들은 4월 이 되고 ‘정말’ 봄이 오게 되면 다들 바쁘기 그지없다. 다들 길어진 해를 더 즐기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싸돌아다니고 날씨 좋은 주말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바쁘게 약속을 잡고 페이스북 이벤트를 참석한다.

나도 그런 일반적인 베를린의 한량 중 한 명으로 겨울 내내 집에만 칩거하다 춥고 우울한 나날들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바빠졌다.  

삼십 년을 대구에서 살아서일까 남들보다 더위도 더 잘 견디는 것 같고 해가 나기만 해도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사실 휴가에서 돌아왔을 때만 해도 다시 베를린에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가득 찬 나날들이었다. 그러나 해가 뜨고 광합성을 하니 모든 걱정이 일시적으로 싹 사라져 버리고 집에서 나와 다시 바쁜 몸이 되었다.


일단 길어진 낮과 좋은 날씨를 즐기기 위해 퇴근 후엔 베를린 구석구석을 걷고 주말에 집에 혼자 있지 않기 위해 이것저것 재미난 거리를 찾아다녔다. 지난 주말은 베를린에 20도가 넘는 첫 주말로 어떻게든 계획을 짜고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아침부터 김밥을 싸고 친구들과 베를린 템펠호프 공원(Tempelhofer feld라고 옛 공항 자리를 큰 공원으로 형성시켜 놓은 곳)에서  피크닉을 하기로 했다.


베를린 Tempelhof 공원


친구들과 모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폭풍 수다를 떨고 풀밭에 누워 광합성을 하다가 시계를 봤더니 저녁 7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 번도 핸드폰이 울리지가 않은 것이었다. 알고 보니 핸드폰이 전혀 터지지가 않아 7시까지 메신저의 메시지를 한건도 받아볼 수가 없었다. 공원을 나와 크리스티나 집으로 자전거를 끌고 가던 중 핸드폰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쿠바에 계시는 그분께서 전화를 몇 번이나 하셨고 메시지도 많이 보낸 것이다. 아차 싶어 급하게 ‘피크닉을 마치고 크리스티나 집에 가서 밥 먹고 차 한잔하고 집에 갈 거야’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이전 유럽 남자 이안을 만나면서 연애에서의 연락의 비 중요성에 대해서 하도 훈련이 되어있다 보니 쿠바 남자 친구와 잠깐 연락이 원활하게 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래도 장거리 연애니까 나름은 웬만하면 전화 올 시간이 되면 전화기를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을 의식화했지만 친구들이랑 소풍 간다고 했으니 연락 안 된 것쯤 이해하겠지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크리스티나 집을 들러 근처 살사 바에 가서 3차로 살사를 열심히 추고 12시가 넘어서야 일요일 프로그램이 끝이 났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배터리는 5프로 정도 남아있었고 남자 친구가 다시 연락 오지 않음에 아무 생각이 없었다(쿠바는 인터넷을 어느 곳에서나 쓸 수가 없다. 특정 공원이나 장소에 가서 인터넷 티켓을 사서 충전해서 쓰는 시스템이다. 그리고 쿠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비싼 금액이다. 그렇기에 하루에 한 번 혹은 두 번 연락을 겨우 하고 내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는 것에도 크게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다. ) 그러던 와중 남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반가운 마음보다는 한다는 말이 “아 근데 미안해 나 지금 배터리가 5프로야 곧 꺼질 거야... 집까지 20분 정도 걸리는데 기다릴래?”


Havanna의 흔한 동네 인터넷 공원


남자 친구는 풀 죽은 목소리로 “내일 연락할게 집에 가서 자”라고 했다. 집에 와 급하게 충전을 하고 방금 집에 왔다고 메시지를 보내고 꿀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리앙은 또 간발의 차이로 전화를 했고 나는 또 받지를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 마음이 많이 쓰였다. 이렇게 대충 연락이 잘 안 되었던 적이 잘 없기에 분명 약간은 새침해있을 텐데 하는 생각과 동시에 아 피곤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사달이 났다. 퇴근 후 4시쯤 리앙이 다시 전화를 걸었다. 또 전화를  받지 못했다. 늘 전화 오던 시간이 아니라 핸드폰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어서 길을 걷던 중 뒤늦게 전화가 온 것을 발견했다. 금방 메시지를 보냈다. 다행스럽게도 공원에 계속 있었어 연락이 바로 닿았지만 그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왜 밖에 있을 때 전화가 안되냐고 따지기 시작했고 나는 두통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나 나름대로 연애 영어를 웬만하면 대중교통 속에서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고 충분히 시간차 나는 짧은 채팅으로도 재미난 연애를 하고 있는데 나의 남자 친구는 꼭 비디오 채팅을 해야 하고 애정 뿜 뿜을 영상으로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아무리 달래도 썽이 잔뜩 나있는 어린 소년에게는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다. 그냥 집에 가서 연락할게 공원에서 대기 타고 있어라고 하고 메시지를 보내고 집에 와 화상채팅을 했다. 그는 여전히 화가 나있고 어제오늘 연락이 잘 안 된 것에 대해서 추궁하고 싶어 하는 눈빛을 쏘았지만 참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보였다. 나는 일단 남자 친구를 즐겁게 해보고자 노력을 했다. 노력이 통했는지 안 통했는지는 모르겠고 전화를 끊고 밥을 먹고 나자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다시 두통이 오기 시작했다.


왜 리앙은 날 좀 이해하지 못할까? 퇴근해서 집에 가는 길은 정신이 없고 대중교통에서 화상채팅의 어색함을 조그만 이해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거 전화 안 받는다고 그렇게 삐지냐!  그리고 나 바쁜 사람인데 어떻게 전화받으려고 집에만 대기 타고 있나. 지는 거기서 바쁘게 지내면 되지 나는 남자 친구도 여기 없는데 주말에 바쁘게 노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내가 배고프면 예민하다고 식후 저녁에 통화가 배불러 기분도 좋고 더 애정 뿜뿜이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는데 지 보고 싶다고 쿠바 시간으로 아침 기상하자마자 전화하면 나는 배고플 예민할 시간에 어떻게 더 다정하게 전화받느란 말이야! 혼자 한참을 씩씩 거리다 그래도 사랑하는 귀염둥이 쿠바 남자 친구 입장을 생각해봤다.


리앙의 친한 친구들과 여동생은 미국으로 가버렸다. 또 부모님은 미국 시민권자라 쿠바와 미국을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리앙은 몇 년째 비자 문제로 하바나에 남아 미국 대사관에서 yes라는 대답이 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일을 하고 싶어도 학업을 계속하고 싶어도 언제 떠날 줄 모르는 채  몇 년째 홀로 기타만 치며 대기 타고 있느니 나의 ‘공원에서 기다려’라는 말은 얼마나 그에게 힘 빠지는 말이었을까.  취직하고 싶은 청년이 기타를 가르치는 것 이외에는 일이 없어 집에만 있는데 여자 친구는 맨날 바쁘거나 아니면 바쁜 척 하니 얼마나 상대적으로 더 외롭게 느껴질까. 이런 상황에서 연애하면 여자 친구밖에 생각 안 나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전화하고 싶은 게 당연한걸 나는 배고픈데 전화했다고 투덜거리기만 했으니 괜히 미안한 마음과 안쓰러운 마음이 확 몰려왔다. 전화하려면 그 비싼 인터넷 카드를 사야 하는데 매번 나랑 전화하려고 기타 수업 한 돈을 인터넷 쓰는데 다쓰고 전화하러 공원에 기어 나와야 하는데 나는 고작 기다려라 하거나 연락이 이틀 연속 원활하지 않으니 얼마나 속상하고 의기소침해 있었을까.



사실 리앙이 느낄법 한 감정을 나도 똑같이  느꼈고 지금 그가 하고 있는 행동을 비슷하게 나 또한 이안과 연애할 때 반복했었다. 7년전 베를린에 아무 연고도 없이 와 만나는 사람은 남자 친구밖에 없다 보니 그 당시 나는 연락 때문에 조급해하고, 몇년째 독일어 시험만 준비하고 학교의 합격소식만 기다리는 나에 비해 지나치게 바쁜 남자 친구 로인해 속 많이 끓였었다. 그저 죄 없는 전 남자 친구에게 투덜거리기만을 반복했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참 철이 없었다 싶다가도 내가 그런 입장이 되어 봤으니 지금의 남자 친구 리앙을 더 이해해야 함이 맞는데도 사람이 입장이 달라지니 금세 과거를 잊어버리게 된다.


좀 더 그의 입장이 되어 내일 연락 오면 더 사랑해줘야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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