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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그린드레스 Aug 18. 2021

순수한 비애

노을을 볼 때마다

일상을 살면서 아주 어릴 때 일들이 날카롭게 떠오를 때가 있다. 사람의 기억력이란 참 신기하다. 그때 입은 옷과 날씨까지도 생생하게 영화를 보는 것처럼 기억날 때가 있다.


그 순간순간이 쌓여서 지금의 내가 된 거겠지.


노을을 볼 때마다 또렷하게 남아있는 기억이 하나 있다.


어릴 때 살던 집 뒷방. 창이 넓었는데 남향이 아니라서 어두컴컴했다. 나는 늘 그 방에 처박혀서 책을 읽곤 했다. 동화책은 진즉에 다 읽고, 읽을 게 없어서 백과사전도 읽고, 어른들 책도 훔쳐 읽었다.


으스스하게 생긴 작가 얼굴이 박힌 ‘바람’으로 시작되는 책 표지가 기억난다. 겁이 많고 소심한 아이였던지라 그 책이 너무너무 무서웠다. 스무 살이 넘고 나서 그 책이 장편소설이었고, 제목이 ‘바람’으로 시작되는 게 아니었고 정확히 ‘누가 바람을 보았을까요?’라는 제목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으스스하게 생긴 작가는 ‘카슨 매컬러스’라는 작가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작가의 작품이 대부분 밝지 않다는 것과 작가의 삶 역시 그러했다는 것을 알고 어릴 때 느낀 감정의 결과 비슷해서 놀라웠다.


어릴 때 책에 탐닉했던 이유는 단순한 이유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해서 늘 집에 혼자 있었고, 타고난 성격이 내성적이었다. 집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독서였다. 외로움을 달래는 길이기도 했고.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갈 때 발걸음이 무거웠다. 집에 혼자 있을 생각을 하니 집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도 마음이 쓸쓸했다. 집에 가면 나를 반기는 식구가 없으니 동화책에서처럼 요정이 기다리고 있길 기대했던 적도 있다. 외로운 마음으로 간신히 열쇠로 문을 열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토록 외로웠다면 친구 집에 놀러 가던가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아도 되지만 이를 실행할 용기가 없었고 나는 책을 읽는 걸 더 좋아하는 아이였다.


당시 방이 세 칸 있는 단독주택에 살았다. 햇빛이 환하게 드는 방에서 네 식구가 생활하고 어두컴컴한 방에는 책꽂이와 옷걸이를 두었었다. 나머지 한 칸은 기어이 벽을 막아서 세를 주었다. 녹록하지 않은 가정 형편이라 세를 받아야만 했었다고 나중에 어머니가 말해주셨다.


집에 도착하면 항상 가방을 풀고, 숙제를 먼저 해치웠다. 후련한 마음으로 일주일에 한 번 배달 오는 어린이 신문에 실린 만화 ‘꺼벙이’를 읽었다. 꺼벙이를 너무 좋아해서 길창덕 작가님이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묵념을 했다.


그 후에 나는 어두운 방에 가서 책을 읽었다. 당시 읽었던 책들이 아직도 생각난다. 동화책은 읽고 또 읽어서 외우다시피 했다. 계몽사에서 나온 110권짜리 전집을 한 권 독파하고 나면, 맨 뒷장에 다 읽었다고 표시를 해두곤 했다. 동화책을 다 읽어서 새 책을 사달라고 졸라도 부모님이 책을 살 형편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더 읽을 책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어른들 소설책도 훔쳐 읽었다. 당시 인기가 많았던 작가 최인호 님의 소설도 읽었다. 성적인 장면이 나오는 걸 보고 놀랐었다. 겨우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그런 것을 읽었다니 지금 생각하니 황당하기도 하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요즘 어린이들이 책을 안 읽고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많이 한다고 문제라고들 한다. 물론 이것도 문제이긴 한데 나는 무조건 책을 읽으라는 것에도 반대한다. 나이 대에 맞는 책을 추천하고 읽게 지도해주는 것이 맞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의 나처럼 어른들이 읽는 소설을 마구잡이로 읽는 것은 자칫하면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온다. 열심히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해가 져 있을 때가 있었다. 눈도 침침하고 지루하다고 느껴지면 옥상에 올라갔다. 하늘을 보면 노을이 물들어 있었다. 노을의 색은 주홍색이라고 하기에는 딱 맞지 않았다. 주홍색에 푸르스름한 색이 한쪽에 곁들여져 있고 누르스름한 빛도 스며들어 있는 오묘한 색이었다. 노을을 볼 때마다 너무 우울했다. 당시 어려서 그 감정이 어떤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노을을 보면서 드는 감정이 꺼려지고 불편했다.

이것만으로도 힘든데 교회 차임벨 소리가 들려와서 더욱 힘들었다. 집 건너편에 큰 교회가 있었는데 저녁때마다 차임벨을 울렸다. 그 음까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우울한 음이었다. 분명히 단조였을 것이다. 시각과 청각이 동시에 우울한 감정을 느끼니 감당할 수 없어서 나는 도망치듯 옥상에서 내려와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심리가 버거워서 tv를 틀면 마침 만화가 나왔다. 만화를 보면서 우울한 감정을 떨쳐냈다.


이때 느낀 감정의 굴곡이 마음에 심하게 와닿아서 나는 지금도 노을을 좋아하지 않는다. 노을을 보면 진저리가 쳐질 정도다. 예나 지금이나 노을이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갈 정도다.

어린 시절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장면 두어 가지를 회상해보았는데 다 밝은 내용이 아니다. 물론 부정적인 내용도 아니고, 딱히 상처를 받은 일화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우울하다고 기억하는 걸 보니 나라는 사람에게 깔린 정서는 기본적으로 밝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다 동적이지 못하고 정적이다. 나의 DNA에 우울함이 있는 건가? 내지는 어릴 때부터 인생이 마냥 밝지만은 않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득한 건가?

유달리 내성적이고 밝지 못한 나는 무럭무럭 자라 성인이 되었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책을 옆에 끼고 사는 건 여전하다.


20대 때 작가 박완서 님의 자전적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다. 박완서 님이 어릴 때 학교를 한 시간 넘게 걸어서 다녔다고 한다. 걷다가 쉴 때 들판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들판을 볼 때 시간이 해가 질 무렵이었을 때가 많았다고 했다. 박완서 님이 들판과 풍경을 보다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펑펑 울었다고 한다. 박완서 님이 그때의 감정을 이렇게 서술했다.


‘그것은 순수한 비애였다.’


‘순수한 비애’ 내가 노을을 보면서 사로잡혔던 감정이 그것이 아니었을까. 과학적인, 논리적인 설명을 할 수는 없다. 나는 순수하게 사물과 현상 자체에만 우울함을 느낀 것이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얼마나 공감을 했는지 모른다. 들여다보기 힘든 감정을 이렇게 다른 사람이 공감해주면서 정확하게 알려주다니.


문학은 이래서 좋다. 칼에 베일 듯이 날카롭다. 날카롭지만 아픈 상처를 남기지 않고 진득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미처 내가 들여다보지 못한, 혹은 들여다보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마치 입장을 정리해서 말해주는 거 같다.


또한 왜 문학작품을 읽는지에 관한 원론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서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바로 얼마 전에 소설가 김애란 님이 어딘가에서 말씀하셨다. ‘소설이 주는 위로란 따뜻함이 아니라 정확함에서 오는 건지도 모르겠다.’라고. 이 말을 듣고 무릎을 칠 정도로 감탄했다.


항상 나의 정서는 정적이고 예민하다. 굴곡진 일을 겪지 않아도 우울함을 느낄 때도 많다. 어릴 때처럼 온몸으로 감정을 느끼는 것도 좋지만 우울함에 깊이 빠지지는 않으려고 한다. 우울하고 슬픈 감정은 무조건 나쁜 것, 쾌활하고 기쁜 감정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것은 아니다. 극단적인 감정을 경계하고자 한다.


요즘도 내가 쓴 글을 종종 들춰보는데 글에 묻어나는 내 성향을 보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하게 된다.


나란 어떤 사람인 걸까? 매 순간순간 나 자신에게 놀란다. 나에 대해 탐구하는 것. 죽는 날까지 이어지는 일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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