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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성실 Sep 04. 2023

서른둘에 통산 10승, 슬로우 스타터의 야구는 지금부터

[지난주 히어로즈] 08.29 ~ 09.03 키움 히어로즈 김선기 

'코리안 특급'의 불같은 피칭을 지켜보며 자랐던 소년은 스물일곱의 나이에 늦깎이 신인 선수가 되었다. 고교 시절 꿈을 좇아 신인 드래프트 전체 1순위 지명의 영예 대신 미국행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부상과 부진, 전력 구상에서의 배제 등 여러 우여곡절이 겹치며 서른둘이 돼서야 통산 10승째를 달성했다. 그의 목표는 서른아홉까지도 왼손에 글러브를 끼고 마운드 위에 오르는 것이다.




시애틀 매리너스 시절의 김선기. (사진 출처 : PSISports)

중학생 시절부터 박찬호를 롤 모델로 삼았던 야구 소년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국땅으로 건너가 묵묵히 공을 던졌다. 하지만 빅리그의 팜 시스템은 한국 야구만을 경험했던 그에게 너무 냉혹하고 무책임하며 참을성 없었다. 


185cm, 81kg의 훌륭한 신체 조건을 자랑하던 김선기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미 145km/h의 빠른 공을 던지며 화제가 되었다. 당시 KBO리그 8개 구단 스카우트가 에이스 역할을 기대하며 영입하던 외국인 투수들의 최고 구속이 140km/h 후반대였다. 그는 KBO리그에서 토종 에이스 역할을 기대하며 지명할 만한 수준의 유망주였던 셈이다. 다만 김선기를 호의적인 시선으로 지켜보던 것은 비단 한국인 스카우트뿐만이 아니었다. 과거 스즈키 이치로라는 '초대박'을 터뜨린 바 있는 시애틀 매리너스 또한 16세의 나이에 MLB 평균 구속(2008년 146.3km/h)에 근접한 공을 던진 동양인 투수를 노렸다. 박찬호가 롤 모델이었던 김선기의 선택은 미국행이었다.


10만 제곱킬로미터가 겨우 넘는 면적의 나라에서 17년 평생을 살아온 소년에게 마이너리그 생활은 너무 혹독했다. 그가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고 회고한 2년차에 몸담았던 팀은 한국인은커녕 사람을 만나기도 어려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버지니아주 펄래스키군·2010년 9,086명, 아이오와주 클린턴·2010년 26,885명). 이따금씩 마주치는 현지 주민들은 인종 차별을 일삼았다. 2012년까지 김선기와 함께 루키리그와 싱글A에서 뛰었던 최지만은 당시 주유소에서 만난 백인 청년들에게 '나쵸보다 더 노랗고 밥만 먹는 냄새 나는 동양 놈'이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의 사전에 포기란 없었다. 데뷔 시즌에 루키리그에서 14경기 64.1이닝 평균자책점 4.90의 애매한 성적을 남겼던 김선기는 이듬해 싱글A로 승격됐음에도 평균자책점을 4점대 중반까지 끌어내렸다. 3년차였던 2012년에는 선발투수의 잠재력을 인정받아 모든 경기에 선발투수로 나섰다. 경기당 평균 5이닝 이상을 소화함은 물론, 평균자책점 또한 4.02으로 2년 연속으로 우상향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교 시절 140km/h 중반대였던 최고 구속도 150km/h를 돌파했다. 


유일한 문제점은 그가 한국이 아닌 미국의 야구팀에서 뛰고 있다는 점이었다. 2013년 하이 싱글 A로 승격된 김선기가 이전과 달리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시애틀은 매년 드래프트와 국제 유망주 계약을 통해 영입하는 50명가량의 어린 유망주에게 기대를 거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시간을 들여 가르칠 수 있는 교육 시스템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다"며 미국행을 종용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결국 "스무 살 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한국에서 야구를 시작하고 싶다"고 말할 만큼 낙담한 김선기는 빅리그의 냉혹하고 무책임한 체계 아래서 굴러가던 마이너 생활을 뒤로 한 채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20대 후반의 나이가 되어 KBO리그에 입성한 김선기.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20대 후반의 늦은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KBO리그에 입성했다. 여전히 야구는 쉽지 않았다. 부진했다. 부상을 입었다. 자신을 위한 자리가 없었다. 원래 인생을 지면서 배우는 거랬지만 너무 많이 넘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멈추지는 않았다. 슬로우 스타터의 마음가짐으로 던지고 또 던졌다. 0승, 3승, 0승, 3승, 3승. 그리고 또 1승을 추가하며 서른둘에 '통산 10승' 투수가 됐다.


한국으로 돌아온 김선기는 국군체육부대에 합격해 군 복무 기간 동안 마운드 위에 올라설 기회를 얻었다. NPB(일본프로야구) 에이스 출신의 이대은과 함께 상무 피닉스 야구단의 원투 펀치로 활약한 끝에 2018년 신인 드래프트 2차 1라운드에서 넥센 히어로즈(現 키움)의 지명을 받았다. "중간계투든 패전처리 투수든 최선을 다해서 던지겠다"면서도 "선발투수로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6이닝은 맡아주는 선수가 되고 싶다"며 선발투수 자리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국가대표 우완 영건 최원태와 사이드암 에이스 한현희, 신인왕 출신의 신재영이 버티고 있는 선발진에 김선기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가끔 선발 로테이션에 구멍이 생겨도 고교 시절부터 150km/h 중반대 광속구를 던지던 고졸 루키 안우진과 2년차 좌완 유망주 이승호, 그리고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김태훈과 김정인에게 기회가 돌아갔다. 선발투수로서 단 한 번의 기회도 얻지 못한 채 패전처리 투수로 1년을 보냈다. 그렇게 신인왕에 욕심이 없다 말했지만 분명히 은근한 기대를 품고 있었을 KBO리그에서의 데뷔 시즌이 지나갔다.


2년차 시즌을 앞두고 심기일전하며 이승엽 KBO 기술 위원에게 "올 시즌에 흥미롭게 지켜볼 선수가 생겼다"는 칭찬도 받았다. 그리고 캠프가 끝나기도 전에 어깨 부상을 당하며 전력에서 이탈했다. 전반기가 다 끝나갈 때 즈음에야 겨우 1군으로 돌아왔고, KBO리그 데뷔 이후 처음으로 선발 기회를 받았다. 네 번째 등판까지만 해도 23이닝 7실점 평균자책점 2.74로 준수한 모습을 보였다. 감독은 그를 로테이션 투수로 기용하겠다고 선언했다. 앞으로 탄탄대로를 걸어갈 일만 남았던 그의 앞을 또다시 막아선 것은 재발한 어깨 부상이었다.


웬만한 경기 내용으로는 깜짝 놀라지도 않을 만큼 부진한 나날이 계속됐다. 선발 에이스의 역할을 기대했던 팬들은 큰 점수차에서 마운드에 오르는 그의 모습에 완전히 익숙해졌다. 이미 서른을 넘어선 나이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지지부진함은 그라운드 위에 설 의욕을 깎아 먹을 법했다. 실제로 김선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행을 택했던 문찬종·나경민·남태혁, 그와 함께 상무 야구단에서 땀방울을 흘리며 국내 복귀를 타진한 이대은은 일찍이 은퇴를 결정했다. 그 가운데서 김선기는 여전히 공을 던졌다. 10년 전, 기약 없는 상위 레벨 콜업을 위해 아무도 지켜봐 주지 않는 마이너리그 야구장의 마운드에 오를 때처럼. 묵묵히, 그러나 꾸준히.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팀 사정이 바뀌었다. 구단 역사상 최초로 통산 100승을 노리던 프랜차이즈 에이스 최원태가 7월 말 LG 트윈스로 트레이드되었다. 5선발 정찬헌은 8월 중순 허리 통증을 이유로 1군에서 말소된 이후 황색인대 제거술을 받으며 시즌아웃 됐다. 1선발 안우진마저 토미 존 수술을 받게 되면서 최소 2024년까지 그라운드에 오르지 못할 예정이다. 마땅한 선발 자원이 없는 상황에서 홍원기 감독은 김선기를 고정 선발로 기용하겠다고 선언했다. 적잖은 나이를 생각하면 다시 한번 놓쳤다간 영영 돌아오지 않을 기회다.


8월 22일에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시즌 첫 선발 등판을 가졌다. 수비 불안 속에서 5실점하며 패전투수가 됐으나 투구 내용 자체는 4이닝 6탈삼진 무사사구 2자책으로 나쁘지 않았다. 그를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팬들이 다음 경기가 기대된다며 마운드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향해 격려의 박수를 보낼 정도였다. 두 번째 선발 등판은 그로부터 닷새 뒤인 27일, 타자 친화 구장인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에서였다. 이번에도 5실점했지만 5이닝을 소화하면서 선발투수로서의 본분을 다했다. 


지난 2일에는 LG와 정규시즌 1위 경쟁을 벌이고 있는 KT 위즈를 상대로 마운드에 올랐다. 6이닝 동안 3개의 안타와 2개의 볼넷만을 허용하면서 단 한 점도 내주지 않았다. 타자들은 KT의 토종 3선발인 배제성을 경기 초반부터 완벽히 공략하면서 선취점을 뽑아냈다. 김선기가 임무를 완벽히 완수한 이후 바통을 이어받은 중간계투 선수들은 9회까지 단 하나의 안타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키움의 승리로 경기가 끝났다. 세 번째 등판 만에 시즌 첫 승을 따냈다. KBO리그 통산 10승째를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720일 만에 따낸 감격스러운 승리였지만 김선기는 언제나와 같이 차분했다. 그저 "마지막 선발승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 운이 좋았다"라며 기자들을 향해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착실히 다음 계단을 밟아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겨우내 선발투수 보직을 위해 열심히 준비했음을 이야기하며 "시즌 마지막까지 선발 로테이션을 지키면서 좋은 투구를 할 것"이라고 야망을 밝힌 것이다. 선발 체질인 것 같다는 말에 "잘 모르겠다"면서도 만면에 퍼져 나가는 미소를 숨기지 못하며 자신의 체력이 좋다고 이야기한 것은 덤이었다. 


4년 전 대체 선발로 좋은 모습을 보일 당시 김선기는 10년 후의 자신이 어떤 모습일 것 같냐는 질문에 "그때(39세)까지 계속 야구를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한 바 있다. 워낙 말수가 적다 보니 그가 가슴에 품고 있는 야구선수로서의 목표가 무엇일지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어쩌면 서른여섯의 나이에 우승 반지를 꼈던 자신의 롤 모델처럼 '조금 늦어도 괜찮으니 마지막은 트로피로 장식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확실한 점은, 슬로우 스타터의 야구는 이제서야 비로소 시작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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