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한 화가의 유럽 순회 전시회는 작품들과 함께 전시된 그녀의 사진 한 장으로 인하여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뜻밖에도, 작가가 전쟁화와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아주 젊고 예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이 여성은 레이디 버틀러이다. 결혼 전 이름은 엘리자베스 톰슨(Elizabeth Thompson, 1846-1933)이다. 이전에 전쟁화를 그리는 여성은 없었다. 더구나 어리고 아름다운 용모의 여성 화가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후, 엘리자베스 톰슨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유명한 전쟁화가가 된다.
엘리자베트 톰슨
여성 최초로 전쟁화에 도전하다
톰슨은 크림전쟁을 묘사한 1874년의 <점호(Roll Call)>로 단박에 명성을 얻었다. 빅토리아 여왕이 이 그림을 구입함으로써, 그녀는 당대 가장 유명한 여성이 되었다.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엄격히 구분했던 보수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가치로 볼 때, 그녀는 여성 화가로서는 이색적인 주제를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피를 흘리는 전투 장면 대신, 전쟁 직전이나 이후의 모습을 놀라울 정도의 사실적 묘사로 표현했다. 톰슨은 영국이 전 세계에서 제국주의적 팽창을 획책하고 있던 시기의 수많은 전쟁을 묘사하는 그림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위대하고 영웅적인 전쟁의 영광과 애국적 행위뿐만 아니라, 보통 병사들에도 초점을 맞추었고, 트라우마가 의학적 용어로 성립하기 이전에 이미 전쟁화를 통해 전쟁의 상처를 언급하고 있다. “나는 결코 전쟁의 영광을 그리려 하지 않았고, 연민과 용감한 행위에 대해 묘사하려고 했다.” 국가의 팽창주의적 사업에 불가피하게 동원된 평범한 사람들의 희생과 고통을 묘사하려고 한 것이다.
그녀의 성공은 한창 세력을 떨치고 있던 빅토리아 시대의 제국주의 영국에 대한 자부심과 낭만적 애국심의 물결도 한몫했다. 톰슨의 주제들은 애국심이라는 낭만주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는 한편, 전쟁의 혼란, 진흙투성이, 육체적 피로와 지침 같은 전쟁의 현실을 사실적인 세부 묘사에 의해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애국적 영웅주의, 그리고 휴머니즘
톰슨, <점호>, 1874년, 캔버스에 유채, 93.3 x 183.5 cm, The Queen’s Gallery, Buckingham Palace
<점호>는 크리미아 전쟁 당시 보병들의 점호를 묘사한 것이다. 코트와 털모자를 쓴 사병들이 눈밭에 불규칙한 열로 서있는데, 모두 지쳐 있고 부상을 당한 병사들도 보인다. 병사 중 한 명은 얼음 땅에 쓰러져 있고, 말 위의 장교는 하사관이 점호를 하는 동안 지켜보고 있다. 검은색, 회색, 희색 및 갈색 등 어두운 색채로 겨울의 스산한 추위를 표현하며, 이 침울한 색조는 몇몇 인물의 군복과 깃발의 붉은색과 대조를 이룬다. 사실적 묘사와 매끈하게 칠해진 화면은 톰슨의 아카데믹한 배경을 보여주지만, 주인공을 정점으로 피라미드 구도를 이루는 일반적인 전통적 역사화의 구성을 사용하지 않았다. 등장인물들을 일직선상으로 배치하는 보다 민주적인 구성으로 일반 병사들에 중점을 두는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이다.
크리미아 전쟁 전문가들은 이 그림이 그 전쟁의 세부 사항들을 정확하게 묘사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그녀의 부탁으로 <점호>는 병상에 누워 있던 크리미아 전쟁의 간호 천사 나이팅게일에게 보였고, 나이팅게일 역시 그림이 전쟁의 실상을 그대로 묘사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릴 때 항상 정확한 고증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려고 했고, 실제로 전쟁에 참여한 실제 병사들이 그녀의 작업실에 와서 군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이 작품은 처음에는 한 산업자본가에게 팔렸으나, 빅토리아 여왕이 원하자 마지못해 여왕에게 넘겼다고 한다. 이 작품은 로열 아카데미에 전시된 후 즉각적인 선풍을 일으키며 동판화로 제작되어, 수천 점이 전 영국의 거실에 걸리게 되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많은 미술가들이 전쟁화를 그렸으나, 나폴레옹 전쟁화를 그려 엄청난 인기를 누린 19세기 프랑스의 메소니에(E. Meissonier)와 같은 뛰어난 전쟁화 전문화가는 없었다. 따라서 영국인들 사이에는 중요한 전쟁들이 회화로 그려져 기념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고, 로열 아카데미 전시회는 전쟁화를 장려했다. 19세기말, 영국의 제국주의적 군사력은 막강했고, 영국의 대중은 세계를 주름잡는 국가의 영광스러운 위상에 정신적으로 고무되어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타고 톰슨의 전쟁화는 사람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일군의 시인 작가들과 톰슨과 같은 화가들은 이러한 애국심의 고양에 일조를 했다.
여성화가들이 거의 없었고 있었다 해도 전쟁화를 그리지 않았던 19세기에, 이러한 애국적인 그림들이 여성에 의해 그려졌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의외였고, 이후 여성 화가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켰다. 당대 저명한 비평가인 존 러스킨(John Ruskin)은 “나는 늘 여성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말했다.”라며 여성의 능력을 경시했는데, <점호>를 본 이후 그가 틀렸음을 인정했다. 이리하여 엘리자베스 톰슨은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고 유명한 화가가 되었고, 그녀의 그림들은 아주 비싼 가격으로 팔렸다.
이 작품이 사람들의 관심을 얻고 감동을 준 이유는 용감한 장군과 장교의 영웅적인 행위를 그린 이전까지의 전쟁화와는 달리, 평범한 병사들의 고통과 고난을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점 때문에 대중은 점점 그녀의 그림들을 외면하기 시작한다. 1차 보어전쟁*이후 영국 대중은 민족주의적인 애국심에 빠졌고, 영국의 승리를 영광스럽게 그리는 그림을 원했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병사들의 고통을 표현한 그녀의 그림이 영국군의 사기를 훼손시킨다고 불평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회화가 남성들이 영국군에 입대하도록 장려하는 데 방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1881년 이후 그녀의 그림은 그 인기가 급격히 떨어졌고, 1933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 전쟁화를 그렸지만, 초기의 인기는 다시 누리지 못했다.
* 註
보어 전쟁(Boer Wars) 혹은 영국-보어 전쟁(Anglo-Boer Wars)라고도 한다. 제국주의 시대 아프리카에서 종단정책을 추진하던 영국과 당시 남아프리카로 이민 와서 정착한 네덜란드계 백인 보어족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19세기, 서구 열강 국가백인들 간에 식민지 지배권을 두고 쟁탈전을 벌이던 시대를 보여주는 사례다.
톰슨, <콰트르 브라스의 28 보병연대>, 1875년, 캔버스에 유채, 97.2 x 216.2 cm, National Gallery of Victoria, Melbourne
<콰트르 브라스의 28 보병연대>는 1815년의 영국군의 28 보병연대를 묘사한다. 콰트르 브라스 전투는 워털루 전투 2일 전에 일어난 워털루 군사작전의 일부로서, 당시 전투에서 28 연대는 프랑스 기갑부대의 공격을 물리쳤다. 톰슨은 이 전쟁을 병사들이 호밀밭에 대열을 짓고 공격을 막아내는 장면으로 묘사한다. 톰슨은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 영국 공병부대의 300명의 병사를 그 전투의 실제 호밀밭 대열로 포즈를 잡게 하고, 연기 자욱한 전쟁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라이플 총을 쏘게 하는 등 빈틈없이 준비 작업을 했다. 또한 프랑스 기병대를 그리기 위해 서커스단과 승마 학교의 말들을 관찰했고, 어린이들을 모아 헨리 온 템즈의 풀밭을 짓밟게 해 전투 당시의 호밀밭의 모습을 재현하게 했으며, 당시 군복의 복제품을 스스로 준비하기도 했다.
톰슨은 31세 때 영국군 준장인 윌리암 버틀러와 결혼한 후엔 레이디 버틀러라고 불리게 되는데, 남편의 근무지를 따라 이집트,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작품 활동을 하게 된다. 그녀의 전쟁화는 나폴레옹 전쟁, 19세기의 주요 전쟁들, 1차 세계대전까지 망라한다. 이 시기에 그녀는 영국과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가 식민지 원주민들에게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남편의 생각에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계속 영국군의 용기를 보여주는 그림들을 그린다.
톰슨, <스코틀랜드여, 영원하라!>, 1881년, 캔버스에 유채, Leeds Art Gallery
톰슨, <잉케르만으로부터의 귀환>, 1877년, 캔버스에 유채, 104.4 x 185.6 cm, Ferens Art Gallery, Kingston upon Hull, UK
<잉케르만으로부터의 귀환>의 잉케르만이라는 지명은 크리미아반도의 남부지역으로, 1854년 크리미아 전쟁 당시 러시아군이 패한 곳이다. 말 위의 장교를 중심으로 양쪽에 정렬된 병사들이 있지만, 그들은 엄격한 군대 정렬에 의해 기계적으로 배치되어 있지 않고 다소 자유롭게 서 있다. 숙달된 기교가 땅의 자갈이라던가 흙의 묘사에 십분 발휘되어 있다.
톰슨, <군 생존자>, 1879년, 캔버스에 유채, 1132.1 x 233.7 cm, Tate Britain, London
1842년 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기간 중, 영국 동인도회사 군대의 외과 보조의인 윌리암 브라이든은 영국군이 카불에서 퇴각할 때 사망한 16,000명의 군인과 수행 민간인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으로 알려져 유명인이 되었다. <군 생존자>는 그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나중에 몇몇 더 살아 돌아왔고, 일부는 아프간 포로로 지내다가 석방된 것이 진실이지만, 대중은 언제나 극적인 어떤 것에 열광하기를 원하며, 이 그림은 그러한 욕구에 부응했다. 그는 구출되기까지 지쳐 죽어가는 말에 타고 마지막 몇 마일을 느릿느릿 오다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생지옥의 현장 줄루 전쟁의 진실
톰슨, <로크스 드리프트의 방어>, 1880년, 캔버스에 유채, 120.2 x 214 cm, Royal Collection, UK
19세기말, 영국 제국주의가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식민지 전쟁을 일으키던 때, 최신 무기로 무장한 영국군대가 이산들와나 전투(Battle of Isandlwana)에서 남아프리카의 줄루 부족에게 대패하게 된다. 스스로 대영제국이라고 부르며 무소불위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영국군에게는 치욕적인 참패였다. 줄루족 쪽은 대부분 창과 가죽 방패, 단도와 곤봉을 가진 원시적인 전투부대였고, 영국군은 당시 세계 곳곳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던 군사 강국이었기 때문에 영국인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이산들와나 패배 이후, 민간인 포함 300여 명의 영국군이 4천 명의 줄루족 전사에 맞서 싸운 로크스 드리프트 전투에서 승리하자, 영국 정부는 압도적 숫자의 아프리카 부족을 상대로 이 작은 초소를 지켜낸 군인들을 영웅 신화의 주인공으로 탄생시킨다. 로크스 드리프트 전투가 대영제국 군대의 전술과 용맹성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했고 자존심을 회복하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이 전투는 당시 영국인들에게 애국적 열기를 일으켰고, 생존자들은 영웅이 되어 빅토리아 여왕을 알현하고 무공훈장까지 받았다. <로크스 드리프트의 방어>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톰슨은 기량이 뛰어난 화가이자 전투 이면의 휴머니즘을 표현한 예술가이지만, 영웅주의적 국가 선전 그림의 한계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영국인은 자국의 입장에서 로크스 드리프트 방어를 신화로 만들어냈다. 과연 그럴까? 사실 로크스 드리프트 초소의 영국군은 전투에서 이탈해 도망갔고, 남은 이들은 특별한 영웅들이어서가 아니라, 밀려드는 줄루 전사들의 공격에 봉착해 궁지에 몰린 채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었을 뿐이다. 또한 살아남은 병사들은 오랫동안 그 참혹한 살육의 현장에서 얻은 트라우마로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줄루족은 이 전투 전에 마약 성분이 있는 풀뿌리를 씹어 그 호전성을 극대화시켰다고 한다. 몸이 영혼을 가둔다고 생각해 그것이 육체로부터 빠져나가 하늘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배를 갈라 내장이 흘러나오게 했고, 부상당하거나 죽은 적군의 성기를 난도질하여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1964년, 영국에서는 '로크스 드리프트 전투'를 소재로 영화 <줄루(Zulu)>를 제작되었는데, 여기서 패배한 줄루족이 수적으로 열세인 영국군이 용감하게 맞서 싸운 것을 찬양하고 경의를 표하는 노래를 부르며 후퇴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국은 아직도 영광스러운 19세기 '대영제국'의 환상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이다. 회화이든 영화이든 간에, 예술이 특정 사회와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기 위해 이용될 때, 그 결과는 이와 같은 심각한 역사 왜곡으로 이어진다.
한편,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침략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줄루족의 이산들와나의 승리를 높게 평가한다. 줄루족의 이산들와나 전투 역시 아프리카 전사의 용맹성과 뛰어난 전술의 승리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아무리 최신 무기로 무장했다지만 아프리카 들판 한가운데 고립된 겨우 2천 명의 영국군 야영 부대가 아프리카 지형에 밝은 4만의 전사가 끝없이 밀려드는 것을 막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전쟁은 그냥 전쟁일 뿐이다. 그저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인간의 살육 행위에 불과하며, 어느 편도 미화될 수 없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들이 유리한 방향으로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에필로그
1760년, 로열 아카데미 창립 회원으로 앙겔리카 카우프만과 메리 모저가 선출된 것을 마지막으로, 1936년까지 오직 여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로열 아카데미에는 여성회원이 허락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톰슨 역시 그녀의 실력은 아카데미의 남성 화가들과 비슷하거나 심지어 우월했음에도 불구하고, 1879년 두 표 차이로 로열 아카데미 입성에 실패했다. 이후 1924년에도 로열 아카데미에서 거절되는데, 20세기는 이미 큐비즘과 같은 모더니즘의 시대였고, 그녀의 사실주의적 기법에 의한 애국적, 영웅적 서사적 역사화는 더 이상 대중의 관심에서 밀려났던 것이다. 그녀의 작품은 대체로 애국적 감성, 영웅주의를 호소한다는 점에서 화려한 할리우드 영화 같은 감상적 성격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장교들의 영웅적 무용담보다는 평범한 병사들의 실제 모습과 전쟁의 참상과 트라우마를 표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