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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지 Dec 10. 2023

빈대가 돌아왔다!

ㅡ 벌레 없는 유토피아는 없다

[열두 번째 이야기]


19세기 영국 캐리커처 작가 토마스 롤랜슨의 작품 '벌레 퇴치를 위한 약간의 정보'. 1793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Getty Images)



이 채색 판화는 19세기 영국의 판화가이자 캐리커처 작가인 토마스 롤랜슨(Thomas Rowlandson)의 유머러스한 작품이다. 그는 당대 정치·사회 풍자로 이름을 날렸다. 노란색 휘장이 쳐진 아늑한 침실, 잠옷을 입은 살찐 사람이 침대 앞에 서서 가려운 듯 온몸 여기저기를 긁어대고 있다. 얼굴과 포동포동한 허벅지엔 빈대가 여러 마리 기어다닌다. 작가는 이 성가신 흡혈 곤충에게 피를 빨리고 있는 희생자의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표정을 코믹하게 묘사한다. 빈대가 골칫거리였던 당시 일상생활의 한 장면이다.


이렇듯 그악스럽게 인간을 괴롭히는 빈대는 어떤 곤충일까? 스웨덴의 식물학자 칼 폰 린네(Carl von Linné)는 빈대를 가리켜 "대도시에 있는 대부분 집에 사는 귀찮고 메스꺼운 동물로, 밤에는 잠든 사람들의 피를 빨기 위해 기어다니고, 낮에는 으슥한 구멍과 틈새에 몸을 숨긴다"라고 묘사했다.


빈대에 대한 기록은 일찌감치 3,000년 전 고대 이집트의 문헌에서부터 등장한다. 기원전 4세기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록에서 언급되었으며, 유럽 중세의 문헌과 문학작품에서도 꾸준히 나타난다. 그만큼 오랜 세월 인류와 함께한 달갑지 않은 동거자였다. 영국에서는 1666년 ‘런던 대화재’ 이후, 불탄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들여온 목재에 붙어와 전국으로 확산됐다. 빈대는 위생이 열악했던 하류층 가옥은 물론 중산층이나 귀족ㆍ왕족의 호화로운 거처에도 들끓었다. 대항해 시대 이후엔, 유럽의 탐험가와 선원들, 식민지 개척 이민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이동해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했다. 당시 이슥한 밤, 범선에서 잠자고 있는 사람들을 물어뜯는 빈대는 고된 항해 중 가장 괴롭고 짜증스러운 존재였다.


빈대는 산업혁명 이후 철도가 건설되고 기차여행이 보편화되면서, 더욱더 사방팔방 퍼져 나갔다. 기차 실내와 값싼 철도 옆 숙박업소들은 빈대의 안락한 서식지가 됐다. 20세기 중반까지 빈대는 곳곳에서 매우 흔하게 눈에 띄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유럽 주요 도시 주택의 약 3분의 1에서 빈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가정집과 호텔 외에도 레스토랑, 극장, 스포츠 센터, 차량이나 선박 등, 빈대가 온 세상을 포위했다.


인류는 오랫동안 세균, 바이러스, 해충을 퇴치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18세기 유럽에서는 석유로 침대 틀을 닦고, 끓는 물을 붓고 일 년에 서너 번씩 매트리스를 세탁하는 방법이 권장되었다. 그 밖에, 침대 밑에 고리버들로 만든 벌레 덫 놓기, 갖가지 약초와 달걀흰자를 섞은 수은을 침대에 바르기, 난로에서 유황이나 소똥을 태워 침실을 훈증 소독하기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시도되었다. 벽의 갈라진 틈을 비소 성분의 페인트로 메우기도 했는데, 이런 위험한 방법들은 득보다 실이 많았다.


18세기 영국에서 한 가정집의 하녀가 빈대를 죽이려고 방 안에서 숯불을 피우다 큰불을 낸 사건도 있었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라는 우리 속담이 생각난다. 동서양 모두 집에 불을 내는 일이 발생할 정도로 빈대가 극성이었음을 말해준다. 영국에서는 일찍이 해충을 퇴치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고, 빈대 박멸 비법을 소개한 안내서도 나왔다.


과연 인간은 빈대를 박멸할 수 있을까? 빈대는 수십만 년 동안 호모사피엔스라는 종의 특성과 생활양식에 적응해 왔다. 우리가 먹이 사슬의 꼭대기에 있다는 자만심은 어찌 보면 착각이다. 지구라는 행성은 인간이 아니라 벌레들이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많은 곤충이 인간에게는 지구상의 까마득한 선배 생물종이다. 인류의 나이가 20만 년 정도인 데 비해, 모기와 바퀴벌레, 빈대와 같은 해충은 수억 년 전에 지구에 등장했다. 관점을 달리해 생각해 보면, 곤충들은 우리의 피를 빨아먹고 살아온 포식자였고 인간은 그들의 맛있는 먹이였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작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더 크다면, 그것들이 우리를 쉽게 해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인간은 해충과의 전쟁에서 결코 승리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자연 세계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 현대인은 해충 역시 약품으로 박멸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람들은 DDT와 같은 강력한 화학 살충제를 발명해 벌레 없는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곧 심각한 부작용이 드러났다. 해양 생물학자 레이철 카슨(Rachel Carson)은 '침묵의 봄(Silent Spring)'에서 살충제로 무너진 야생 생물계의 진실과 우리에게 고스란히 돌아오는 환경 파괴에 대해 경고했다. 1970년대부터 DDT가 건강과 환경적인 이유로 금지되고, 국가 간의 교류와 해외여행이 활발해지는 등 전 세계가 지구촌화되면서, 빈대가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거의 사라졌던 침대 속 작은 괴물 빈대가 돌아왔다. 자연과 환경을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오만을 조롱하는 듯, 방심한 사이 우리의 세계로 다시 잠입했다. "인간들아! 너희는 수십만 년간 나를 죽이려 했지만, 나는 언제든 되돌아올 것이다." 아주 작지만 끈질긴 곤충 빈대가 인간의 언어를 안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빈대와 인간의 전쟁도 부활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빈대가 ‘비교적’ 무해한 곤충이라는 점이다. 모기나 바퀴벌레처럼 질병 병원체를 퍼트리지는 않는다. 아마도 최선의 길은 인류와 자연, 인간과 다른 생명체가 공존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닌지. 벌레 없는 유토피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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