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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지 Nov 26. 2023

바티칸 궁의 숙적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ㅡ 상냥한 라파엘로와 까칠한 미켈란젤로

[열 번째 이야기]



수도사와 같은 금욕적인 생활을 했던 까다롭고 괴팍한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와, 매사에 원만하고 상냥하며 삶의 즐거움을 추구한 카사노바 라파엘로( Raffaello Sanzio da Urbino)는 매우 대조적인 인물이었다. 당시 로마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브라만테의 소개로 20대 중반의 젊은 예술가 라파엘로에게 바티칸 궁의 네 방의 벽화작업을 맡긴다.


같은 시기인 1508에서 1512년 사이, 미켈란젤로도 시스티나 예배당(Cappella Sistina)의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한 장소에서 작업을 하게 된 두 예술가 간에 자연스럽게 경쟁 심리가 작용했을 것이다. 단순히 경쟁관계 이외에도, 두 예술가 간에는 복잡한 상황이 얽혀 있었다.


원래 피렌체에서 베키오 궁 벽화 작업을 하고 있었던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 2세로부터 그의 영묘 기념물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고 로마로 왔다. 그런데 브라만테와 그의 고향 후배인 라파엘로가 다른 프로젝트를 건의하자 교황은 일방적으로 미켈란젤로의 영묘 작업 계획을 중단해버리고 시스티나 예배당천장화지시한 것이다. 스스로를 조각가라고 생각한 미켈란젤로는 엄청난 규모의 천장화 작업에 겁을 먹고 거절했으나, 교황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와 브라만테가 자신과 교황 사이에서 농간을 부려, 그가 천장화 작업에 실패해 경력을 망치기를 바라며 음모를 꾸몄다고 생각했다. 이후, 미켈란젤로는 두 사람에 대한 격렬한 증오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미켈란젤로의 오해였을 것이다.


도나토 다뇰로 브라만테(Donato d'Aguolo Bramante) 역시 천재 예술가이자 르네상스 건축의  위대한 선구자다. 그는 밀라노의 스포르체스코 성을 건축하여 스포르차 가문의 신임을 얻었다. 레오나르도와 친교를 나누며 스포르차 가문에 그를 소개하기도 했다. 로마에 초청되어 온 브라만테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탁으로 성 베드로 성당의 개축과 바티칸 궁 장식을 맡은 총책임자가 되었다. 16세기 초 로마는 미켈란젤로, 브라만테,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 천재 예술가들의 집결지였다.


미켈란젤로만 빼고 다른 천재 예술가들은 갈등 없이 잘 지낸 것 같다. 특히 브라만테는 라파엘로에게 시스티나 예배당의 열쇠를 주며, 미켈란젤로의 작업 기법을 보고 회화 기술을 연마하도록 돕기도 했다고 전한다. 레오나르도는 미켈란젤로를 경계하고 좋아하지 았으나, 라파엘로에게는 소묘 등 자기의 작품을 모사하도록 허용했다. 라파엘로가 그와 절친한 브라만테와 친했기 때문이다.


1504년, 피렌체 시 당국은 베키오 궁 대회의실 벽화 작업을 두 사람에게 동시에 의뢰했다.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의 경연을 보려고 피렌체에 가서 산타 마리아 노벨라에 전시된 두 사람의 전투 스케치를 모사했다.


미켈란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지만, 그보다는 레오나르도가 라파엘로에게 더 많은 영감을 주었다.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의 <앙기아리 전투>뿐 아니라, <성모 마리아, 아기 예수, 그리고 성 안나> 눈여겨보았다. 인물들을 피라미드 구도 속에 질서정연하게 배치하는 레오나르도의 법을 배웠던 것이다. 라파엘로가 피렌체 시절 그린 성모와 아기 예수의 성화는 하나같이 이런 구성을 보여준다. 


그의 많은 초상화 인물의 자세도 <모나리자>에서 차용한 것이다. 당시 초상화는 고대의 동전, 메달을 본떠 인물의 옆얼굴을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정면을 응시하는 모나리자의 초상은 매우 독창적인 것이었는데, 라파엘로는 이를 모방했다. 또한, 바티칸 궁 서명의 방에 그린 <에덴동산의 유혹>에서의 이브의 포즈는 레오나르도의 <레다와 백조>를 본받은 것이다. 다만 레다를 그대로 모사하지는 않고 거울로 본 것처럼 좌우를 거꾸로 뒤집기는 했는데, 이는 모사를 감추기 위해 화가들이 즐겨 사용한 수법이었다. 


고된 시스티나 천장화 작업을 하고 있던 미켈란젤로는 젊은 라파엘로가 더 많은 주목과 찬사를 받는 것에 심기가 불편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지인에게 쓴 편지에서도 라파엘로가 그의 천장화 일부를 표절했다고 불평하며 원색적인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라파엘로가 자신의 작품을 몰래 보고 회화 기술을 도둑질했으며, 그가 예술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자신에게서 얻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과 확신이 대단했다. 바사리에 의하면, 그가 시스티나 천장화를 그릴 때, "나보다 먼저 이곳에서 프레스코를 그린 사람들이 내가 그린 대작 앞에 무릎을 꿇게 하겠다."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평소 요란한 튀는 색을 쓰는 화가들을 경멸했음에도 불구하고, 눈부시게 화려한 색채로 채색된 시스티나 예배당의 페루지노와 보티첼리의 작품들이 자신의 그림과 비교될 것을 염려해 밝고 화사한 색채들을 썼다. 완벽주의자였던 그는 선배 화가들의 그림을 능가하기 위해  양질의 안료를 백방으로 찾아 나서기도 했다. 이런 일화들은 그가 얼마나 경쟁의식이 강했고, 최고가 되기를 원했는지를 보여준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잠시 로마를 떠나 있을 때,  라파엘로가 몰래 시스티나의 예배당에 들어가 의 그림을 훔쳐보고 배웠다고 확신했다. 그 결과로, 라파엘로가 위풍과 장엄미가 부족했던 자신의 그림을 보완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불편한 관계에 있던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는 자존심을 건 세기의 대결을 펼쳤고, 결국 미켈란젤로는 <천지창조>라는 최고의 걸작을 창조하게 된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



시스티나 성당 천장 중앙에는 아홉 점의 그림이 띠 형태로 창세기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빛과 어둠의 분리, 별의 창조, 땅과 바다의 분리, 아담의 창조, 이의 창조, 원죄, 노아 이야기(노아의 제사, 대홍수와 방주, 술 취한 노아) 등 창세기 속에 나오는 일화를 보여준다. 이 일련의 작품의 위 아래에는 일곱 명의 예언자와 다섯 명의 여사제의 그림이 있다. 예언자들과 여사제들 사이 사이의 삼각형 공간과 루네트(lunette: 초승달 모양의 공간)에는 아브라함과 성 요셉 등 예수의 조상들을 그렸다. 그리고 네 개의 펜던티브(Pendentive: 돔 건축에서 돔과 지주 사이의 삼각궁륭))에는 청동뱀, 하만의 형벌, 다윗과 골리앗,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등 구약성서의 네 장면을 묘사한다


한편 라파엘로는 ‘화가들의 왕자’라고 불릴 만큼 외모가 매우 아름다웠고 성격도 부드러워 교황의 총애를 받았다. 고집 세고 다루기 만만치 않은 미켈란젤로보다 라파엘로에게 교황의 애정이 쏠린 것은 인지상정인지도 모르겠다. 키가 작고 등이 살짝 굽은 체격의 미켈란젤로는 동료 조각가 피에트로 토리지아노(Pietro Torrigiano)에게 맞아 코뼈도 부러져 외모에 대한 열등감이 심했으며, 꽃미남에 재능까지 고루 갖추었던 라파엘로를 몹시 질투했다고 한다.


한번은 라파엘로가 측근 여럿을 이끌고 나갔다가, 우연히 성 베드로 광장에서 혼자 걸어가던 고독한 외톨이 미켈란젤로와 마주쳤다. 미켈란젤로는 "떼거리를 몰고 가는 게 칼잡이 같네."라고 빈정대자, 라파엘로는 "혼자 걸어오시는 모습을 보고 사형집행관이신 줄 알았습니다."라고 되받아쳤다.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



어쩌면,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예술작업을 하는 자존심 강한 천재들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경쟁심리가 불가피하게 이들의 관계를 원만하지 못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까탈스러운 성격이 한몫했던 것도 사실이다. 편안하고 사랑스러운 라파엘로와는 달리, 미켈란젤로는 그의 후원자나 조수들과 끊임없이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그는 스파르타식의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옷과 신을 신은 채 자고, 음식도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필요한 만큼만 먹는 수도승 같은 삶을 살았다. 그에겐 허기를 잊기 위해 빵 한 조각과 포도주 한 모금이면 충분했고, 그것도 빵을 입에 문 채 작업을 하는 식이었다. 도저히 사람이 사는 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실내는 지저분했고, 며칠째 작업복을 갈아입지도 씻지도 않았다.


한편, 라파엘로는 여러 여인들과 자유로운 연애를 즐기며 온갖 육체적 락을 일삼은 향락가였다. 그는 여자를 매우 좋아했으며 그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당시 5만 명의 로마 인구 중 7천 명이 매춘부일 정도로,  로마는 성적 환락의 도시였다. 라파엘로는 임페리아라는 고급 매춘부 등 수많은 여성들과 관계를 맺으며 로마가 주는 육체적 환희를 추구했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이 때문에 그가 여성 혐오증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닌가 의심하거나 동성애자였다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어쨌든 미켈란젤로가 성에 대한 금욕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미켈란젤로는 당시 한 고행사제의 논문을 읽고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 따르면, 섹스는 정신적인 활력과 두뇌 활동을 약화시키고 육체적인 건강에도 해악을 끼치므로 금욕과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고지식한 성격을 가졌을 뿐 아니라 신앙심도 매우 깊었다. 미루어 보건대, 이러한 주장을 철저히 신봉하고, 스스로 육체적 쾌락을 멀리한 채 금욕적인 삶을 실천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천성적으로 고독하고 침울한 성격으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역시 좋아하지 않았다. 조수들에게도 심하게 대해 그들이 미켈란젤로에 대한 나쁜 소문을 내고 다니기도 했다.


라파엘로가 여성 모델들을 거리낌 없이 쓴 반면, 미켈란젤로는 그림 속 인물이 여성이건 남성이건 간에, 항상 남자 모델만 사용했다. 일설에 의하면, 로마의 스투페라는 대중목욕탕에 가서 남자들의 알몸을 해부학적으로 연구했다고 한다. 한편, 미켈란젤로는 당시 여건상 시신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체 해부를 통해 인간의 근육과 신체 구조를 파악하려고 했다.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 속 헤라클레이토스



라파엘로에 대한 미켈란젤로의 증오는 그의 편지나 제자의 증언에 의해 잘 알려진 반면, 라파엘로가 미켈란젤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많은 미술사가들은 펑퍼짐한 낮은 콧대로 보아 <아테네 학당>의 헤라클레이토스의 모델이 미켈란젤로라고 말한다. 1510년, 교황과 함께 천장화의 일부를 본 라파엘로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천재 술가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자신의 그림 속에 그를 그려 넣었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철학자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독설을 퍼부었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까칠한 성미와 비슷한 미켈란젤로를 조롱한 것이었을까?


라파엘로는 벽화를 그리는 도중, 과도한 육체적 쾌락을 좇다가 37세의 젊은 나이에 매독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라파엘로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 밤에 자주 나갔는데, 어느 날 외출 후 돌아온 그는 갑작스레 고열에 시달리게 된다. 조르조 바사리에 따르면 그가 매독에 걸린 사실을 의사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해 적합한 치료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병세가 악화돼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한 연구팀은 라파엘로가 당시 찬 밤공기 때문에 급성 폐렴에 걸린 것 같으며 의사가 폐질환에 치명적인 사혈 요법을 쓰는 바람에 죽었다고 주장했다. 매독이나 임질은 잠복기를 가지기 때문에, 갑자기 고열이 난 라파엘로의 증상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로마 사람들은 그의 이른 죽음을 몹시 애통해했다. 라파엘로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고, 그의 시신은 판테온의 화려한  대리석 석관에 묻혔다. 그를 총애하던 교황이 통곡까지 했을 정도로 엄청난 애도의 물결 속에 라파엘의 장례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을 때도, 미켈란젤로는 한마디의 애도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요절한 라파엘로와 대조적으로, 미켈란젤로는 어떤 질병도 없이 89세까지 장수했다.


누가 더 훌륭한 예술가였을까? 당시 로마 사람들은 라파엘로의 작품은 아름답고, 미켈란젤로의 예술은 숭고하다고 평가했다. 각자가 로마 바티칸 궁의 라파엘로의 방과 시스티나 예배당을 방문해서, 르네상스 전성기의 두 위대한 라이벌 미술가를 비교해 보고 판단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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