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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지 Nov 19. 2023

샤넬의 뒤에 가려진  은둔의 디자이너 마들렌 비오네

ㅡ 코코 샤넬의 패션 라이벌


[아홉 번째 이야기] 



우리는 여성을 코르셋으로부터 해방한 혁명적인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로 흔히 코코 샤넬을 떠올린다. 그러나 여기 샤넬을 능가하는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마들렌 비오네(Madeleine Vionnet 1876-1975)다.


마들렌 비오네



현대 패션의 역사는 위대한 세 명의 디자이너로부터 시작된다. 폴 푸아레(Paul Poiret)와 코코 샤넬(Coco Chanel), 그리고 비오네. 이들은 여성을 코르셋에서 해방하고 현대미술의 모더니즘과 아르 누보와 같은 장식미술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또, 세 사람 모두 패션을 단순히 옷을 만드는 일에서 현대 예술의 한 분야로 격상시킨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으로 작업했다.


그러나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은둔형 디자이너인 비오네는 무대의 전면에 나서서 활동했던 폴 푸아레와 코코 샤넬에 비해, 상대적으로 패션의 역사에서 덜 주목을 받았다. 스스로를 ‘패션의 왕(King of Fashion)’이라 일컬으며 위대한 쇼맨십을 보여준 폴 푸아레와 장 콕토, 피카소, 스트라빈스키 등 저명한 작가, 화가, 음악가들과 교유하며 화려한 행보를 한 샤넬이 국제무대에서 종횡무진 활약할 때, 비오네는 자신의 모델들이 부유한 고객들, 저널리스트들, 외국의 바이어들 앞에서 그녀의 옷을 선보일 때조차 자신의 작업실에 머물러 있었다.     


특히, 비오네는 샤넬과는 같은 시대를 산 여성 디자이너이라는 점에서 비교가 되곤 한다. 샤넬처럼 비오네도 하류층 출신이었고, 의지와 능력을 통해 성공한 여성이다. 하얗게 센 머리에 수수한 외모의 비오네는 그녀의 경쟁자 샤넬이 열렬히 추구했던 세상의 이목을 피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대조적이다. 그녀는 내성적이고 신비로운 수수께끼의 디자이너로 남아 있다. 이 때문에 당대 샤넬과 같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했으나, 20세기의 위대한 디자이너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고 그 업적은 결코 과소평가되지 않았다. 발렌시아가는 비오네를 자신의 스승이라고 불렀고, 크리스천 디올은 옷의 예술, 즉 패션은 결코 그녀를 뛰어넘거나 더 멀리 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샤넬이 대중적으로는 더 알려지긴 했으나, 어떤 디자이너들은 비오네를 ‘디자이너들의 디자이너(couturier des couturiers)’라고 평가한다. 한편, 비오네는 샤넬이 감각을 타고났다고 인정하기는 했지만, 종종 모자 제작자로 출발했던 샤넬을 그저 모자를 만드는 여자로 폄하하기도 했다. 또한, 샤넬의 대중화된 퀼팅 핸드백과 검정코 슬리퍼를 저평가하며 평생 자신이 더 뛰어난 디자이너라고 생각했다. 비오네는 자신을 패션계의 레오나르도, 혹은 패션계의 유일하고 진정한 예술가로 생각할 정도로 자존감이 강했다. “나는 결코 패션을 시도하지 않았다. 나는 패션이 뭔지 모른다. 나는 단지 내가 가진 신념을 옷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그녀 옷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스러움이다. 그녀는 옷이란 인체의 곡선을 거슬리거나 왜곡하지 않고 몸의 형태를 자연스럽게 따라야 하며, 몸을 속박하지 않고 활동하기에 편해야 한다는 기본철학을 가졌다. 따라서 인체를 인위적으로 성형하고 구속하는 코르셋, 패드, 뻣뻣한 재료 등을 사용하지 않았다. 코르셋 같은 여성의 몸을 압박하는 속옷의 착용을 반대한 그녀의 옷은 여성의 인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하였고, 사람들에게 그것이 더 아름답고 여성스러운 매력을 보여준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그녀의 우아하게 흘러내리는 드레이프 된 (draped) 드레스는 그리스의 고대 전통의상에 영감을 받았으며, 자유분방한 의상을 입고 맨발로 춤을 춘 현대무용가 이사도라 덩컨의 영향도 있다.



패션에 예술을 입히다


비오네는 당시 유럽 미술을 장악한 피카소의 큐비즘(Cubism)의 기하학적인 조형감각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현대 기술 문명의 역동성을 표현한 미래파(Futurism) 예술가인 사이여트(Thataht, Ernesto Michahelles의 예명)와 밀접한 예술적 교류를 하기도 했다. 1919년에서 1925년 사이에 사이여트는 비오네와 공동 작업을 하면서 디자이너로 활동했는데, 그는 매우 혁신적이고 미래주의적인 의복인 '투 타 Tu Ta'(오늘날 점프슈트로 알려진)를 디자인한 조각가, 화가, 건축가이자 사진가이다.


< 사이야트의 일러스트레이션 >



사이야트는 1920년대 비오네의 의상들을 당대의 진보적인 패션 잡지 '르 가제트 듀 봉 통(Le Gazette du Bon Ton)’에 독특한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재창조하여 싣는다. 그는 미술이 움직이는 신체의 역동성’을 표현해야 한다는 미래주의 신념을 이 삽화를 통해 나타낸다. 최근 밀라노의 폴디 페졸리 미술관은 '미술과 패션 사이‘라는 타이틀의 전시회에서 이 60점의 삽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옷을 만드는 데 있어 매우 철저하고 정교하게 작업했다. 그녀에게 드레스는 단지 사람에게 실용적으로 입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적 개념이었고, 그 접근방식은 건축에서 장식적인 것을 배제하고 구조와 형태를 중요시한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그것에 가까웠다. 1920, 30년대 비오네의 놀라울 만큼 아름다운 드레스들에서 주목할 것은, 기본적으로 그녀의 옷이 세 개의 건축적 형태, 즉 사각형, 직사각형, 원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일생 그러한 기본 형태들에 몰두했다. 어떤 장식도 전체적인 구조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 또한, 이전의 무거운 드레스와 대조적인 가벼움과 조임이 결여된 느슨함은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비오네는 코르셋, 패딩, 다트 등 어떤 불필요한 장식도 혐오했다. 비오네는 여성의 자연스러운 몸의 곡선을 강조를 선호했고, 그녀의 패션의 기본적인 방향은 현대 여성의 생활에 맞는 기능성과 자유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녀는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편안하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디자인을 개발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드레스는 주로 바닥에 닿는 길이의 유동적인 곡선으로 느슨하게 몸을 감싸며 여성의 신체의 장점을 드러냈고, 반면 허리와 엉덩이 선은 타이트하게 제작되었다.     


이렇듯, 그녀는  장식적이고 제약이 많은 옷에서 벗어난 옷을 만들려고 했다. 이 새로운 패션의 창조에 있어, 고대 그리스 여신의 드레스의  고전적 요소를 차용하여  현대적으로 해석한 패션 양식을 내놓았다. 그 결과는 대담한 단순성과 여성의 점점 자유로워진 삶과 역동성, 대담한 단순성을 표현한 패션이었다. 시대를 훨씬 앞선 그녀의 패션 감각은 행커치프 드레스(handkerchief dress: 손수건 중심을 잡고 들어 올린 것처럼 밑단이 지그재그 모양으로 뾰족한 드레스), 카울 넥(cowl neck: 여러 겹 늘어지듯 접히는 칼라를 가진 드레스), 홀터 탑(Halter top: 어깨, 등이 드러나고 끈을 이용해 목 뒤에서 묶는 드레스) 등 창의성이 빛나는 옷들을 만들었다.


“나는 천을 그것이 가진 물질적 제약으로부터 해방하려고 했고, 또한 여성의 신체를 자유롭게 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리고 나는 천이 몸에서 자유롭게 흘러내릴 때 그것보다 더 우아한 것은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비오네의 드레스와 그리스 시대의 복식

        

1931년 사진가 조지 호이닝겐(George Hoyningen)에 의해 보그지에 발표된  비오네의 드레스



위 드레스는 가볍고 부드러운 크레이프 직물로 만든 파자마로써, 천이 인체의 움직임에 따라 나풀거리고 하늘하늘하게 몸에 감기는 느낌을 잘 표현했다. 당시 보그지는 이 작품을 ‘비오네의 부조작품(Bas Relief by Vionnet)’이라고 제목을 붙여 그 예술성을 극찬했다. 고대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의 여신상이 현실로 튀어나온 듯 고전주의적인 선의 우아함이 전율을 안겨준다.    

     


바이어스 재단의 창시자,

코르셋으로부터 여성의 몸을 해방하다

    

어깨에서 등과 가슴을 거쳐 허리와 다리로 흘러내리는 유연한 흐름의 비오네 옷은 여성의 신체를 딱딱하고 속박하는 이전 드레스로부터 해방시켰다. 코르셋이나 패티코트, 어깨심 같은 인공구조물을 없애고 천으로만 만들어지는 입체적인 디자인을 개발함으로써, 여성의 자연스러운 신체의 형상을 보여주는 디자인을 창조한 비오네는 ‘드레스의 건축가’ 혹은 ‘패션의 조각가’라고도 불린다. 그녀의 재단과 드래이핑 방법은 단순성과 우아함을 갖는 양식을 창조했다.


비오네의 혁신은 바이어스 재단(bias cut)에서 출발한다. 바이어스 재단이란 사선 방향으로 재단하는 것으로, 옷이 늘어지는 느낌을 잘 살릴 수 있어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만들 수 있게 한다. 바이어스 재단으로 만들어진 비오네의 옷들은 몸을 부드럽게 감싸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실루엣을 이루었고, 절개되지 않고 매끄러운 연결로 온몸을 둘러싸는 기법은 패션사의 하나의 혁명이었다. 이 재단법으로 완전히 새로운 형태, 즉 기하학적인 자유로운 형태라고 불리는 것을 창조하게 된다. 비오네는 천이 신체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이고 흐르면 그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한편, 그녀는 디자인 과정에서 종이에 디자인을 스케치하고 이것을 천으로 옮기는 종래의 평면 재단법 대신에, 실제 모델이나 키 80cm 정도의 목각 마네킹 위에 직접 옷감을 두르고 필요한 모양대로 입체적으로 재단했다. 비오네는 해부학적인 몸의 구조에 관심을 갖고, 천이 신체의 선을 어떻게 표현할지 끊임없이 연구하였다. 그녀의 복잡한 건축적 테크닉은 옷이 신체에 입혀질 때 살아난다. 드레스는 쇄골 아래로 흘러내리고 바이어스 재단된 천이 배의 곡선과 엉덩이의 아치 곡선을 따라 부드럽게 몸에 감긴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비오네의 단순하고 유동성을 보여주는 드레스는 패션계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주었다. 매우 절제되고 단순해 보이는 그녀의 드레스는 몸에 그냥 걸쳐 놓은 듯 보이기도 하는데, 사실은 복잡한 계산과 분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입는 법도 어려운 디자인이 많았다고 한다. 비오네의 드레스는 1930년대를 패션계를 주름잡았다. 마들린 디트리히, 캐서린 헵번, 그레타 가르보 등의 당대의 스타 여배우들이 그녀의 옷을 입었다. 그들은 비오네의 옷의 형태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완벽한 모델이었다. 이렇듯 고급 의류에 중점을 두고 제작 활동을 하는 한편, 그녀는 저소득층을 위해 고급 의류의 디자인을 대량생산에 사용하여 패션산업에 혁명적인 변화를 이끌었다.


 

< 비오네의 패션 디자인 작품들 >


바이어스 재단의 드레스들ㅡ실크 웨딩 앙상블, 1929년


시폰 드레스, 1938년



바이어스 재단을 사용하여 고전 조각에서 영감을 받은 단순한 우아미가 특징인 비오네의 스타일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비오네는 직물에 대한 연구와 실험으로 유명하다.  비오네는 각종 모조 보석이나 구슬의 보석 장식과 패브릭을 하나의 디자인 속에 결합한 혁신적인 드레스를 제작했는데, 이 드레스에서는 은 구슬로 스트랩을 장식하였다.


실크 드레스, 1932년


실크 드레스, 1936년


이브닝 실크 숄, 1925


데이 드레스, 1930's


    이브닝코트, 1936년 / 행커치프 드레스                                                   

                                                                                 

이브닝 드레스

                                                                                            

골드 라메 이브닝드레스,  1937-38년,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런던


새틴 이브닝드레스,  1932-34년,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런던


이브닝드레스, 1935년, 프랑스.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런던


이브닝드레스, 1935년,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런던


벌집 무늬 칵테일 드레스와 세부, Metropolitan Museum of America


이브닝 드레스
보그 잡지에 기고한 이브닝드레스, 에드워드 스타이첸(Edward Steichen)의 사진, 1930년,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런던


애프터눈 드레스, 1930년대 중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런던



당시 비오네뿐 아니라, 샤넬도 코르셋을 없앤 패션을 추구했고, 1902년 무렵에는 구스타브 클림트(Gustav Klimt)도 빈에서 코르셋 없는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을 그리고 있었다. 탈코르셋은 당대의 시대적 트렌드였다. 멋쟁이 여성들은 코르셋을 벗어버리고 다이어트와 운동으로 몸매를 다듬으려고 하는 시대적 변화의 시기였다. 여성들은 처음에는 이 부드럽게 흐르는듯한 옷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점차 그 관능성과 하늘거림에 만족하게 된다.


그녀가 선호한 직물은 시폰, 실크, 모로컨 크레이프, 개버딘, 엷은 비단 크레이프, 새틴 등이었는데, 이들 직물은 1920, 30년대 여성복에서는 흔하지 않은 옷감이었다. 동시대인 디자이너 샤넬과 달리, 비오네는 장인의 공방에서와 같이 자신의 이름을 새긴 소량의 수공업적 생산과 판매를 지향했기 때문에, 현대의 대량생산체제에 맞는 브랜드를 창출하지는 못했다. 덕분에 대형 브랜드로는 성장하지 못하고, 192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 활약하다가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그녀의 회사는 문을 닫았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은 1930, 1940년대 유럽과 미국 지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바이어스 재단은 1930년대 스타일을 결정짓는 대표적인 재단법으로서, 할리우드 디자이너들은 이 재단 방식을 사용하여 진 할로우 같은 여배우들의 우상적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오늘날까지도 그녀의 디자인에 영감을 받은 클레어 맥카델, 오시 클라크, 존 갈리아노, 소피아 코코살라키, 이세이 미야케 등의 현대 디자이너들에게서, 비오네의 영향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직원들의 복지에 관심을 가진 휴머니스트 CEO  


그녀는 프랑스의 가난한 노동자 계급에서 태어났다. 교육에서 소외된 당시의 많은 어린 소녀들처럼 12살 때부터 레이스 짜는 작업장에서 일했으나, 임금도 못 받는 등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18세에 결혼했으나 자식을 잃고 남편과도 이혼했다. 결단력 있고 독립적인 성격이었던 그녀는 조국, 가족, 동료들을 버리고 영국으로 떠나 새 인생을 시작하기로 한다. 한 정신병원의 세탁부로 일하던 그녀는 천신만고 끝에 궁정 재봉사인 케이트 라일리 밑에서 수습생으로 일하게 된다. 그녀는 이곳에서 옷 만드는 기술을 배우게 된다. 마침내 1900년, 20세기가 시작되던 해 야망을 품고  파리로 간다. 마담 자비가 운영하는 ‘칼로 쇠르(Callot Soeurs)’라는 파리의 고급 드레스 샵에 일자리를 구해, 마담 자비로부터 고급 여성복 제작과 재단을 배웠다. 그녀는 후에, “마담 자비에게 감사한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단지 포드를 만들었겠지만 결국 롤스로이스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라고 고마움을 표했다.   


1912년 그녀는 리볼리 가에 그녀 자신의 이름을 내건 드레스 샵을 열었다. 1914년 대공황으로 문을 닫았다가 1918년 재개했으나, 공간이 비좁아 1923년 몽테뉴가로 옮겼다. 이때부터 그녀의 사업이 번창하여 1,100명의 재봉사를 고용할 정도였다. 그녀는 인간적인 CEO로도 유명하다. 이제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위치에 선 그녀는 희미한 불빛 아래서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등이 굽고 눈에 진물이 날 때까지 일했던 젊은 시절의 고생을 생각하며, 그녀의 직원들에게는 등받이 있는 의자, 에어컨, 자연채광이 되는 창문, 엘리베이터, 전화기 등 시설을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산부인과 의사와 치과의사 등을 포함한 의사들을 상주시켜 건강을 돌보게 했으며, 작업장에 운동시설과 구내식당도 마련해 주었다. 이밖에도 육아 휴가, 유급 휴가, 보육 시설 등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노동자를 위한 혁명적인 복지정책을 실시했다.


대신 직원들이 자신이 원하는 만큼 꼼꼼하고 완벽한 옷을 만들기를 원했기 때문에 까다롭고 세세하게 점검했고, 제작된 드레스들에는 엄지손가락 지문을 찍을 정도로, 자신의 작품에 대해 강박적인 완벽함을 추구하면서 예술적 성취감을 느꼈다. 그녀 자신도 사업주로서 직원을 관리하기보다는 계속 수석 재단사로서 옷을 연구하고 제작하는 데 몰두했다.     



비오네 제품 로고


자신의 드레스가 위조가 아닌 진짜임을 표시하고, 상표 표절을 막기 위해 비오네는 자신의 사인과 지문을 상표로 만들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의 표시로 보인다.



에필로그  


재즈 시대와 2차 세계대전 이전 몇 년 동안 무비 스타들, 왕족, 귀족, 슈퍼 리치들이 몽테뉴 50번가에 있는 비오네의 패션 하우스에 몰려들었다. 이곳은 '패션의 신전(Temple of Fashion)'으로 불리었는데, 이는 오트퀴트르에서의 비오네의 위치를 말해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한 요금징수원의 딸로서 두 번 이혼하고 자식을 여윈 이 파리 노동계급의 여자는 이제 엄청난 인생의 성공을 거머쥐게 된다. 그녀는 항상 옛날의 고난을 기억했던 것 같다. 샤넬이나 동시대의 디자이너들과는 달리, 헬스 케어와 직원들의 교육기회를 제공했으며 괜찮은 급여도 제공했다. 직원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켰을 때 그들의 요구에 귀를 닫은 샤넬과 반대로, 숙련 노동자들에게 회사를 위해 자발적으로 충성할 이유를 주었던 것이다.   


그녀의 패션은 고대 그리스 복식, 고전 조각과 건축, 이사도라 덩컨, 현대미술(미래주의, 르 코르뷔지에와 오장팡의 순수주의, 입체파, 아르 데코)에 영감을 받았다. 이 때문에 그녀의 옷은 단지 옷에서 그치지 않았고, 패션을 응용미술의 한 영역으로 격상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녀 스스로도 화가가 물감을, 조각가가 돌을 사용하여 작품을 만들 듯이, 천을 도구로 예술품을 창조한다고 생각했다. 비오네는 옷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직물이 인체 위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주는 조각적 조형미를 추구했다. 특히 그리스 복식의 단순미와 우아한 기능적인 실루엣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간결하고도 아름다운 옷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현대 패션의 역사에서 여러 가지로 혁신을 도입한 디자이너이다. 코르셋을 없애 여성의 몸을 해방하고, 바이어스 재단에 의해 직물이 몸 위에서 흐르는듯한 유연성과 자유로움을 창출해내어 몸의 형태 자체의 자연스러움을 표현하려고 했다. 여성의 몸을 구속하는 코르셋이나 어깨심, 패티코트 같은 인위적이고 경직된  구조물들을 배제하여 새로운 패션의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재단을 할 때는 종이를 이용한 평면 재단법 대신, 마네킹 위에 천을 두르고 직접 드레이핑 한 것도 그녀의 독창적 혁신이었다.   


비오네의 패션 철학은 다음의 어록에서 그 핵심을 찾아볼 수 있다.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몸에 맞는 옷, 그리고 우아한 단순미, 이것이 그녀가 평생을 바쳐 추구한 장인 정신이자 예술가의 정신이다.    


“여자가 미소 지을 때, 그녀의 드레스도 또한 미소 지어야 한다.”   


“단순성은 세상에서 가장 무엇이다: 단순성은 마지막 단계의 경험이며, 천재의 첫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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