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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지 Nov 04. 2023

기괴한 反르네상스 벽화

ㅡ 르네상스 미술의 공식을 파괴한  '거인의 방'

[일곱 번째 이야기] 



로마의 바티칸 궁에서 미켈란젤로가 천장화 <천지창조>를 그리고, 라파엘로가 벽화 <아테네 학당>을 작업하고 있었던 16세기 전성기 르네상스에, 라파엘로의 제자 줄리오 로마노는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 만토바의 '팔라초 델 테(Palazzo del Tè)'에서 르네상스의 이상에서 한참 벗어난 마니에리슴(Manierisme) 방식으로 독특한 벽화를 그렸다. 특히,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의 올림포스 신족과 기간테스(Gigantes)와의 전쟁 '기간토마키아(Gigantomachia)'를 묘사한 '거인의 방'은 방 안에 들어서는 즉시, 그 기괴함과 착시 효과로 관람자를 충격에 빠트린다.


로마노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의 영향 아래 성장했던 화가인데도, 그의 그림은 이렇게 反고전주의의 특징을 보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전성기 르네상스와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사이에 이러한  약간 비틀어진 르네상스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마니에리슴 양식이 그것이다. 이탈리아의 파르미지아노나 줄리오 로마노, 그리고 스페인에서 활동한 엘 그레코 등의 화가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렇다면 이 기괴한 벽화를 그린 줄리오 로마노는 누구인가?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 1499-1546)는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화가이자 건축가이다. 로마노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고전 미술 교육을 받았고 고전주의에 대해 깊은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 라파엘의 가장 재능 있는 조수들 중 한 명으로서, 그를 도와 바티칸궁의 프레스코화를 그리며 거장의 오른손 역할을 했다. 그는 라파엘로의 수제자였지만 스승과 다른 길을 걸었다. 그가 작업한 '거인의 방' 프레스코화는 라파엘로가 완성한 전성기 르네상스의 조화, 균형, 절제, 고요한 단순성의 이상을 파괴했다.


줄리오 로마노, <거인족의 몰락> 천장화, 1524-1534년, 프레스코, 팔라초 델 테, 만토바


줄리오 로마노, <거인족의 몰락>, 1524-1534년, 프레스코, 팔라초 델 테, 만토바



르네상스의 건축 걸작  '팔라초 테'


이 엄청난 벽화가 있는 팔라초 델 테는 만토바가 보유한 건축 걸작이자 가장 훌륭한 르네상스 궁전 건축물 중 하나다. 만토바를 다스린 곤차가 가문의 페데리코 2세 곤차가(Federico II Gonzaga)가 줄리오 로마노에게 의뢰했다. 페데리코 2세 곤차가는 르네상스 미술 후원자로 유명한 이사벨라 데스테(Isabella d'Este)의 아들이다. 곤차가 가문은 15세기 후반 만토바에서 정치적 힘을 기르는 한편 많은 재산을 일구어 도시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소년 시절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바티칸 궁 천장화와 벽화를 그리고 있을 때 그곳에 몇 년간 체류했기 때문에, 이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업을 직접 보았던 사람이다. 예술적 안목이 있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미술사상 최고의 예술가들의 활동 현장을 목격한 페데리코는 만토바의 궁을 로마의 바티칸 궁처럼 만들고 싶어 했다. 그는 바티칸 궁에 있을 때 알고 지내던 라파엘로의 제자 줄리오 로마노를 초빙해 궁의 건축과 내부 장식 일체를 일임했다.


1524년, 페데리코 곤차가의 요청을 받아들여 만토바로 이주한 다재다능한 로마노는 궁의 설계와 건설, 프레스코화, 인테리어 디자인, 태피스트리에 이르기까지 팔라초 델 테가 완성될 때까지 모든 것을 관리 감독했다. 이곳은 원래 곤차가 가문의 혈통 좋은 준마들이 있던 마구간이었는데, 로마노의 솜씨에 의해 화려한 별궁으로 탈바꿈한다. 르네상스 미술 비평가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는 로마노가 1546년, 이른 나이에 죽지 않았다면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가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높은 점수를 주었다.


궁전은 유럽 전역에서 유명해졌고, 의도적으로 고전 건축과 미술의 규범을 어긴 그의 혁신은 바로크 시대로 이어졌다. 로마노의 팔라초 델 테의 혁신은 프란체스코 프리마티치오, 로소 피오렌티노, 퐁텐블로파 등 유럽의 많은 궁정 화가와 예술가, 건축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라파엘의 그림자로부터 탈출해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팔라초 델 테



거인의 방 


이 궁에는 '말의 방', '프시케의 방', '바람의 방', '거인의 방' 등이 있는데, 이중 '거인의 방(Sala dei Giganti)'은 그 거대하고 드라마틱한 이미지로 인해 궁전에서 가장 인기 있고 화려한 공간이다. 관람자는 기간토마키아를 묘사한 거대한 거인들의 그림을 보면서, 마치 방이 우르르 무너지고 있는 듯한 착시 현상에 빠지게 된다. 바사리는 벽화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누구도 이것보다 더 끔찍하고 공포스럽고 리얼리스틱한 그림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방에 들어가는 사람은… 머리 위에서 모든 것이 쏟아지며 자신에게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거인족의 몰락  세부



방은 거대하고 소란스러운 이미지, 역동적인 에너지로 장관을 이룬다. 화가는 관람자들을 한창 진행 중인 전쟁의 중심으로 몰아넣고 이 공포스러운 상황에 동참하게 한다. 방문객은 마치 제우스 신족이 거인족에게 가혹한 징벌을 내리는 현장 한가운데 서 있는 것같이 느낀다. 올림포스산 정상에 선 제우스가 하늘로 올라오려는 거인족에게 벼락을 내린다. 무거운 바위 덩어리들은 굉음을 내며 무너지고 있다. 거인들은 붕괴하는 거대한 산과 건물에 깔리고 휘몰아치는 빠른 물살에 휩쓸린다. 비록 섬뜩한 모습이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근육질의 몸을 가진 거인들이 가공할 지옥의 혼돈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절망과 고통의 표정을 짓고 있다.


이 방이 지어진 목적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만토바 공작의 힘과 권력을 상징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것과 이탈리아, 오스만제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제우스와 같은 존재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힘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전자로 본다면, 제우스는 페데리코이고 거인족은 카를 5세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를 비롯한 왕족 및 귀족 손님들이 궁을 방문하여 거인의 방이 제공하는 화려한 오락을 즐겼지만, 의도적으로 방문객에게 공작의 왕권과 위엄을 보여주고 그들이 두려움과 경외심을 느끼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면, 거인의 방은 16세기 초 이탈리아에 지배권을 행사하고 자유를 핍박하는 신성로마제국을 비판하고 만토바의 주권을 주장하는 비밀스러운 메시지를 남긴 것이다.



거인족의 몰락 세부



거인의 방 프레스코화는 프레임이 없다. 로마노는 벽과 천장, 벽과 벽 사이의 경계를 뭉개버리고 방 전체가 파노라마처럼 하나의 연속적인 프레스코화로 연결되도록 했다. 바닥 역시 마치 그림 속의 무너지는 바윗돌이 사방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채색된 자갈들로 모자이크했다(지금은 소실되고 18세기 복구공사 때 현재의 모자이크 디자인으로 새로 만들어졌다). 방에는 원래 두 개의 벽난로가 있었는데, 여기서 활활 타는 불꽃의 빛이 반사되어 거인 중 하나가 타는 것같이 보이는 극적인 효과를 창출하기도 했다. 마법 같은 트롱프뢰유(trompe l’oeil, 눈속임이란 뜻으로 그림을 실제와 혼동하게 하는 사실적인 기법)를 시도한 것이다. 이처럼 로마노는 방을 일련의 특수 효과 장치에 의해 환상적 공간으로 만든다.


바위와 산의 잔해에 깔리고 짓눌린 거인들의 공포에 찬 표정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관람자는 신화의 장면 속에 들어와 이 끔찍한 재앙 앞에 서 있는 듯한 놀라운 착시감 속에서 당혹과 경외심, 비할 데 없는 재미와 매력을 느끼게 된다. 팔라초 델 테를 거니는 동안엔, 누구라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웅장하고 환각적인 프레스코화, 조각, 아름다운 장식과 인테리어를 보면서 로마노의 창의성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거인족의 몰락 세부


거인족의 몰락 세부


거인족의 몰락 세부


거인족의 몰락 세부


거인족의 몰락 세부


거인족의 몰락 세부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예술가들은 조화로운 구성, 비율, 균형, 이상적인 아름다움 등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주의 미학을 배웠다. 1520년경부터 일부 예술가들은 이러한 규칙을 깨기 시작했고,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드라마틱하고 상상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다. 줄리오 로마노는 마니에리슴과 연관이 있는 이 새롭고 젊은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로마노는 트롱프뢰유 기법을 사용하여 이전의 고전주의에서 과감하게 벗어났다.


아치형 천장에는 구름 위에 위치한 올림포스 신들이 그려져 있다. 천장의 평평한 2차원 표면은 절묘한 일루져니즘(illusionism)에 의해 3차원 이미지로 창조된다. 이른바 디 소토 인 수(Di sotto in sù) 기법이다. 이것은 ‘아래로부터 보인'이라는 의미로 천장화를 뜻한다.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개발된 기법으로, 이탈리아 바로크와 로코코 화가들이 선호했다. 교회 천장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데, 거룩한 공간에 들어간 사람들에게 영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도록 고안된 시각적 장치다.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안토니오 코레조( Antonio Allegri da Correggio) 등이 그림에서 이 기법을 사용했고, 로마노는 그들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특히, 구름 위의 인물들로 돔 내부를 그린 아이디어는 코레조의 파르마 대성당 돔 천장화 '성모의 승천'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코레지오의 인물들이 구름 밖 사방으로 자유롭게 퍼져 나간 것과는 달리 로마노의 신들은 구름 가장자리 주변에 정렬해 있다. 이런 질서정연한 모습은 아래 거인족의 소란스럽고 흐트러진 광경과 대조를 이룬다. 거인들은 무너지는 산에 깔리고 휘몰아치듯 빠른 물살에 휩쓸리며 붕괴하는 건물 밑에 쓰러진다. 방에는 원래 두 개의 벽난로가 있었는데 여기서 활활 타는 불꽃의 빛이 반사되어 거인 중 하나가 타는 것같이 보여 더욱 극적인 효과를 창출했다.


오늘날에도 거인의 방은 관객에게 계속해서 마법과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관람자는 그림이 만들어낸 일루져니즘에 의해 현실과 상상의 경계 사이에서 놀라운 착시감과 현기증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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