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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지 Oct 29. 2023

'어머니의 이름으로'

ㅡ 슬픔을 예술로 바꾼 케테 콜비츠

[여섯 번째 이야기]



화강암으로 제작된 거대한 남녀 조각상이 두 팔을 모은 채 무릎을 꿇고 있다. 남자의 오른손은 왼팔을 힘주어 꽉 누르고 있고, 여자는 몸을 구부린 채 기도하는 듯하다. 두 인물 모두 참혹한 고통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들은 전쟁에서 아들을 잃고 애도하는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 1867~1945)와 그녀의 남편 카를 콜비츠이다. 케테 콜비츠는 독일의 화가, 판화가, 조각가다.


1914년 입대한 지 이틀 만에 19세의 나이로 아들 페터가 전사한다. 콜비츠는 후에, 자신의 일기와 편지 모음집 <회상>에서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우리 삶에 회복할 수 없는 균열이 생겼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콜비츠, <애도하는 부모>, 1932년, Vladslo German war cemetry(출처 Wikimedia Commons)



전쟁의 고통을 끌어안은 어머니


전쟁 희생자를 위한 추모관인 베를린의 노이에 바헤(Neue Wache)에 세워진 <피에타>는 아들을 잃은 콜비츠와 전쟁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모든 이들의 참담한 고통의 표상이다. 이 작품은 표현주의 화가가 꿈이었던 아들 페터 콜비츠(Peter Kollwitz, 1896~1914)에게 헌정되었다. 제목과 외관상,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연상시키지만, 성모 마리아와 달리 콜비츠는 아들의 부활을 기대할 수 없다. 이 때문에 그녀의 피에타는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고 한층 절망적으로 느껴진다. 전쟁의 폭력성과 비인간성에 대한 고발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작품에 녹아든 콜비츠의 슬픔이 보는 이에게 강렬하게 전달된다. 원래 38cm 높이의 소형 조각이었던 원작이 다른 조각가에 의해 4배로 확대돼 노이에 바헤 건물 앞에 전시하게 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콜비츠, <피에타>, 1993년, 노이에 바헤, 베를린(독일 조각가 하랄트 하케Harald Haacke 제작)



콜비츠, <피에타>, 1937~1938년, 노이에 바헤, 베를린(원작)


아들의 전사는 그녀의 삶과 인생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아들을 잃은 개인적 비극은 아이를 껴안고 있는 어머니,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를 묘사한 작품들로 표현되었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참혹한 고통을 겪은 그녀는 더욱 열정적인 반전주의자, 평화주의자가 되어, 이 주제의 작품들을 계속 제작하였다. 전쟁으로 인한 그녀의 아픔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손자의 죽음, 전쟁 중 폭격으로 인한 남편의 죽음과 같은 연이은 불행으로 1945년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콜비츠,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 1903년, Henry Barber Trust


끔찍한 현실을 인정할 수 없어 죽은 자식을 필사적으로 꽉 끌어안고 있는 모성은 그 절절한 감정으로 인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한다. 이 처참한 이미지는 모든 부모에게 최대의 악몽일 것이다. 살아 있는 어머니의 강한 근육은 생명이 사라져 어머니의 허벅지 사이에 축 늘어진 아이의 몸과 대조를 이루며, 그녀의 절박함을 보여준다. 실로,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무너져 내린 정신, 바닥을 모르는 절망에 대한 슬픈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이 주제는 아들이 전사하기 훨씬 전부터 그녀가 몰두해 오던 것이었는데, 자신의 운명이 될 것을 꿈엔들 알았을까!



강하고 보호하는 여성, 어머니


다음 두 목판화는 국제 노동조합 연맹으로부터 의뢰받아 제작한 반전 포스터 '전쟁' 주제의 시리즈 작품이다. 어머니는 전쟁과 죽음, 파멸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려고  두 팔로 소중히 감싸 안고 있다. 뒤에는 눈을 다쳐 안대를 한 부상자들, 전쟁으로부터 상처를 입은 음울한 표정의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다.


콜비츠, <생존자들>, 1923년, 목판화, Sauerwein Collection, 뮌헨


하나의 단단한 덩어리로 뭉친 여성들의 치마폭 속에 숨어, 두 아이가 바깥을 엿보고 있다. 여성 그룹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전쟁의 폭력으로부터 자신의 아이들을 지키려고 하는 강력한 모성 본능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은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차 있다.


콜비츠, <어머니>, 1920~1923년, 목판화


콜비츠, <두 아이와 함께 있는 어머니>, 1936년


이 조각상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두 자녀를 껴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며, 강력한 모성애의 은유이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강한 보호의 포옹 속에서 어머니와 하나의 사물로 녹은 듯 합체되어 있다. 모든 신체 부위는 단순화되고 세부 묘사가 생략되어 있어, 더욱 농축된 모성애의 느낌을 전달한다. 어머니라면 누구나 세상의 갖가지 예측할 수 없는 위험으로부터 자식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근심과 불안을 갖고 있다. 이 작품은 작가 개인의 경험, 그리고 모든 어머니들의 깊은 시름과 관련이 있다.



빈곤과 절망 속의 여성


콜비츠는 여성의 삶에 관심이 있었다. 그녀의 주제가 본래 소외된 사람들이었으므로, 당시 불평등과 부조리의 중심에 있던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파올라 모더존-베커(Paula Modersohn-Becker, 1876년~1907년)가 풍요로운 대지의 어머니로서의 여성을 묘사했다면, 콜비츠는 가난과 절망에 빠진 여성의 이미지들을 보여준다. 그녀는 작품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여성운동에 참여했고, 여성 억압과 착취에 대해 목소리를 냈다. 그녀는 남편의 진료소에서 오는 노동자 여성들, 매춘부 등의 소외 계층 여성들을 관찰하고 드로잉 하면서, 그들의 참혹한 생활에 깊은 감정을 느꼈고 작품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강간>은 16세기 귀족 계급의 잔인성이 초래한 독일 농민 전쟁을 소재로 한 콜비츠의 7개의 연작 <농민전쟁> 중 한 작품이다. 무성한 초목과 만발한 꽃더미 속에 폭행당한 여성이 몸이 반쯤 드러나 있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로 인해 노출된 살은 방금 전 일어난 성폭력을 증언하고 있다. 뒤에는 아마도 그녀의 딸인 듯한 어린 소녀가 해바라기 꽃들 사이에 보일 듯 말 듯 묻혀 있어 더욱 처절하다.


비평가들은 <강간>을 성폭력의 여성 피해자를 여성의 관점에서 묘사한 미술사상 최초의 작품이라고 평한다. 오랫동안 미술사에서는 '레다와 백조'나 '사빈느 여인의 강탈'과 같은 '강간' 주제의 미술작품들이 있었지만, 콜비츠와 같은 방식으로 다루지 않았다. 남성 미술가들이 남성의 관점에서 강간, 성폭력을 에로티시즘, 혹은 성애의 측면으로 다루고, 그리고, 조각했기 때문이다.


콜비츠, <강간>, 1907년, 에칭, 41.2 x 52.9 cm, Spaighwood Galleries


임산부가 우리 앞에 넋이 나간 표정으로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다. 슬퍼하는 여자는 콜비츠 자신이다. 아들을 잃은 자신을 가난한 과부의 황폐한 모습에 투사한 것이다.


콜비츠, <고뇌: 과부>, 1916년


<과부 1>에서는 임신한 여인이 뱃속의 아기를 가냘픈 손으로 보호하는 듯한 몸짓을 하고 있다. 그녀는 남편을 잃고 가난 속에서 혼자 아이를 낳고 키워야 하는 운명이다. 강렬한 검은색 덩어리로  중량감 있게 표현된 신체는 인물의 어두운 표정과 함께 그녀의 황폐한 삶의 모습을 전달한다.


콜비츠, <과부 I>, 1920~1922년



독일의 양심, 참여미술의 선구자


케테 콜비츠는 미술계에서는 드물게 농민과 노동자와 관련된 사회적인 이슈를 주제로 하여 작업한 미술가다. 그녀는 주로 동판화, 석판화, 목판화 등 판화 작업을 했다. 판화라는 매체에서 그녀의 위치는 거의 독보적이다. 콜비츠의 예술은 대체로 표현주의의 범주 안에서 해석된다. 그녀의 시대는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노동자 계급의 빈곤과 사회적 불평등이 나타나던 때, 칼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써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하고 진보적인 사회주의자들이 등장하던 변혁의 시기였다.


콜비츠는 다리파나 청기사파의 판화의 그래픽적인 표현을 사용했지만, 그들이 표방하는 독일 표현주의 미술은 사회적 현실과 떨어진 고급 미술에 불과하며, 미술가는 대중이 쉽게 이해하고 감동할 수 있는 예술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미술이 사회 참여적인 기능을 해야 한다고 믿었고, 개인적인 미학적 표현을 추구하는 모더니즘 미술에 반대했다.


그녀는 성자 같은 고귀한 품성을 가진 외할아버지 율리우스 루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명성이 높은 신학자이자 목사로서, 일생을 자유사상운동에 헌신했고, 아버지 칼 슈미트 역시 진보적인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런 진보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란 콜비츠는 항상 노동자, 선원, 농민 등 하층 계급의 삶에 관심이 많았다. 24살 때에는 베를린에서 빈민촌에 병원을 세우고 돌보는 의사 카를 콜비츠와 결혼해, 그곳에서 노동자 계급의 생활, 빈곤과 굶주림에 고통받는 빈민 가족을 그리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일기에서, 노동자들이 보여주는 단순하고 솔직한 삶에서 아름다움을 찾았기 때문에, 그림의 주제로 선택했다고 썼다.


1893년에는, 진보적인 젊은 작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Gerhart Hauptmann)의 연극 <직조공들(Die Weber)> 공연을 보고 충격을 받고 연작을 제작하게 된다. 이 연극은 1844년 빌헬름 2세 치하 프로이센의 실레지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직공들의 봉기를 소재로 한 것이다. 이 무렵 실레지아 지방의 직물공업 불황으로, 직조공들의 임금은 하락한 반면 식료품 값은 급등하여 노동자들의 빈곤은 극에 달했다. 그런데도 고용주들은 불황을 핑계로 임금을 깎았고, 자신들은 호화로운 대저택을 짓고 살았다. 당시 칼 마르크스는 실레지아의 봉기를 프롤레타리아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항거이며, 불평등과 착취의 사유제에 대한 폭력적인 방식의 저항이라고 말했다. 이 연극이 독일 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자, 정부 당국은 체제 전복의 혐의를 씌워 공연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그녀는 1893년에서 1897년까지 이 작품에 전적으로 몰두했다. 하나의 일관된 주제를 석판화 세 점, 에칭 세 점의 판화 시리즈로 완성시켰다. 마치 연극의 6막처럼 여섯 개의 시퀀스가 이어지는 <빈곤>, <죽음>, <모의>, <직조공의 행진>, <돌진>, <결말>로 구성되어, 봉기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노동자들의 투쟁과 결말을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했다. 콜비츠는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사실적인 표현 방식의 예술이 필요하며, 순수한 아틀리에 미술은 비생산적이고 무력하다고 생각했다. 이 연작 판화로 콜비츠는 갑자기 유명해졌고, 사회 참여적인 여성 미술가로 인정을 받게 된다.


그녀의 참여적 미술은 1930년대 나치 정부의 탄압을 받았고, 게슈타포에게 체포되기도 했으나, 나이가 많아 간신히 풀려나기도 했다. 남편 카를은 의사로 일하는 것을 금지당했고, 그녀의 작품 다수가 나치 선전 장관 괴벨스의 법령에 의해 압수당했다. 


다음 작품들은 노동자, 농민의 비참한 생활을 묘사한다. 사회적 불평등과 부조리를 비판하고 정의로운 개혁을 염원한 케테 콜비츠의 목소리를 담은 판화들이다.


<빈곤>


<빈곤>은 직조공 가족의 빈곤한 환경을 묘사한다. 침대에는 굶주리고 병든 어린이가 누워 있고, 이를 보는 어머니는 절망감에 머리를 감싸고 있다. 방안의 가재도구들은 정돈되지 않은 채 지저분하게 널려 있고, 빠져나갈 수 없는 가난에 지친 가족들의 표정은 침울하기만 하다.


<직조공의 행진>


비장한 표정으로 낫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사람들, 잠든 아이를 업고 가는 부인, 어두운 얼굴로 묵묵히 걷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선다. 당시 고용주의 저택에 집결한 실레지아 노동자들의 역사적 봉기는 실패로 끝난다. 진압 군대가 동원되고, 총상을 입은 노동자 17명이 죽었다. 진압으로 일단락되었으나, 이 사건은 다른 지역의 노동계급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독일에서 노동자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콜비츠, 농민전쟁 시리즈 중  <농민>, 1907년, 에칭, 306 x 446 cm, 오클랜드 아트 갤러리



이 그림은 또 무엇인가! 사람인 듯, 짐승인 듯, 흙땅에 바짝 몸을 붙이고 기어가고 있다. 추측하건대, 아버지와 아들로 보이는 두 명의 농부가 땅바닥과 거의 수평으로 엎드려 힘겹게 쟁기질을 하고 있다. 원래는 황소가 해야 할 일을 사람이 대신하는 것으로, 소를 소유하지 못한 가난한 농부는 짐승과 같은 삶을 살았다.


이 작품은 16세기 기득권 귀족 계층의 압제에 대한 농민의 봉기를 묘사한 '농민 전쟁' 시리즈 중 하나다. 먼 역사적 사건과 관련되어 있지만, 1900년대 독일 노동 계급의 곤경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작품이다. 1902년에서 1908년 사이에 제작된 이 연작은  <농민>, <강간>, <낫 갈기>, <무장>, <봉기>, <전쟁터>, <잡힌 사람들> 등 7개의 생생한 농민 저항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시리즈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작품 전체에서 여성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아래 낫을 가는 여자는 복수를 꿈꾸고 있다. 가늘게 뜬 원한에 찬 눈은 섬뜩하며, 투박하고 큰 손은 전투를 위해 준비한 낫을 꽉 쥐고 있어 저항의 투지와 강한 힘을 나타낸다.


콜비츠, 농민전쟁 시리즈 중  < 낫 갈기>, 1905, 에칭, 29.8 x 29.8 cm, Spaighwood Galleries


<봉기>에서는 한 여성이 맨 앞에서 농민들을 이끌고 있다. 혁명을 이끄는 여성은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 접근 방식은 매우 다르다. 들라크루아의 여성은 드러난 가슴과 고전적인 여성적 아름다움으로 인해, 성욕, 출산과 관련된 이상화된 유형이다. 반면, 콜비츠의 여성은 자신의 여성성의 과시에는 무관심하며,  혁명에 집중하고 있다. 허름하고 투박한 농민의 옷을 입은 여인은 들어 올린 팔과 안으로 굽은 주먹을 통해 힘과 분노를 보여주며, 농민들을 봉기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콜비츠, <봉기 Outbreak>, 1903, 에칭, 51.3 x 58.7 cm, Spaighwood Galleries



어머니의 이름으로 세상에 맞서다


그녀의 작품은 예쁘지 않다. 빈곤, 굶주림, 전쟁, 폭력, 죽음 등이  일관된 주제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베를린은 유럽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도시였으며, 급격한 산업화와 열악한 노동 조건은 참으로 사람들을 힘겹게 했다. 콜비츠는 이런 현실의 부조리를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을 통해 온몸으로 파헤치고 세상을 향해  외치고 고발했다.


개인적인 가족사의 비극을 밟고 일어나서, 콜비츠는 세상을 향해 열렬한 평화를 외쳤으며,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과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건설적인 노력을 촉구했다. 그녀는 예술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다. 그녀에게 있어, 예술은 스튜디오 안의 미학 놀이가 아니라, 현실에 발을 굳건히 디딘 사회운동이어야 했다.


콜비츠는 매일 남편 카를의 병원을 찾아온 환자들을 그렸다. 손가락이 잘린 노동자, 불구의 몸이 된 타일공, 유산 후에 매 맞은 여공, 폐결핵으로 쌕쌕거리는 안짱다리 쌍둥이, 매춘 여성 등 프롤레타리아 계층의 실상을 보며, 슬프고 고통스러웠고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콜비츠는 여성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때까지 그녀와 같은 방식으로 여성과 어머니를 표현한 미술가는 아무도 없었다. 콜비츠의 여성, 어머니는 오랜 미술사를 통해 묘사된 전통적인 여성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있다. 그녀가 표현한 것은 빈곤과 상실, 절망 속에 있는 여성과 어머니다. 동시에, 그녀의 여성은 강하고 보호하고 양육하는 어머니,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폭력과 전쟁, 부조리로부터 자식을 보호하고 지켜내려는 강인한 의지와 힘을 가진 어머니다. 세상의 모든 악과 잔인성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식을 가진 어머니, 여성의 포용성과 사랑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보면, 콜비츠의 '여성' 역시 대지의 어머니'의 개념과 결을 같이 한다.


세상에는 많은 미술가가 있고 제각기 다른 많은 예술적 목적을 가지고 활동한다. 순수한 미적 실험에 몰두하는 미술가도 있고, 돈을 탐하는 가짜 미술가도 있고, 사회 현실에 관심을 가진 미술가도 있다. 콜비츠는 평생을 일관되게 예술과 현실을 접목하려고 했던 예술가다. 그녀의 인생과 작품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너무 슬프고, 괴롭고, 비참했다. 혼자서 세상의 짐을 모두 지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 해도, 인간 소외와 사회적 부조리를 세상에 드러내고 개선하려고 한 그녀의 불굴의 노력에 아낌이 없는 박수를 치고 싶다. 그녀는 고백했다. 긍정적이고 밝은 미술을 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고. "기쁨을 주는 것이 전혀 없을 때, 어떻게 기쁨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참고문헌>

*카테리네 크라머(1991), <케테 콜비츠>, 이순례, 최영진(역), 실천문학사

*크리스티나 하베를리크, 이라 디아나 마초니(2002), <여성 예술가>, 정미희(역), 해냄

*휘트니 채드윅(2006), <여성, 미술, 사회>, 김이순(역), 시공아트

*Käthe Kollwitz Paintings, Bio, Ideas, The Art Story, Aug 7, 2018

*Käthe Kollwitz, Spartacus Educational.com

*Käthe Kollwitz: Germany's Greatest female Artist, Daily Art magazine, Apr 18, 2019

*Skye Sherwin, "Käthe Kollwitz: Portrait of the Artist review-a brooding tableau of trauma", The   Guardian, Sep 1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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