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페 데 리베라, '여자들의 결투', 1636년, 캔버스에 유채, 235 × 212 cm, 프라도 미술관, 스페인 마드리드
미남자를 쟁취하기 위한 16세기 여성들의 마상 창 시합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중세 시대의 이미지 중 하나는 은빛 갑옷을 입고 긴 창을 든 늠름한 기사가 마상 시합(joust)을 벌이고 아름다운 귀부인의 마음을 얻는 장면이다. 그런데 말에 탄 기사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인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1552년, 나폴리 귀족 여성인 이사벨라 데 카라치와 디암브라 데 포티넬라 사이에 벌어진 결투다.
그림은 바로 이 드라마틱한 사건을 묘사한다. 17세기 스페인 바로크 화가인 주세페 데 리베라(Jusepe De Ribera)가 그린 '여자들의 결투(Duelo de Mujeres)'다. 이사벨라와 디암브라는 파비오 데 제레솔라라는 남자를 사이에 두고 싸웠던 전설적인 에피소드의 여주인공들이다. 오른쪽 여성이 검을 한껏 치켜들고, 부상을 입은 채 땅바닥에 쓰러진 상대를 제압하고 있다. 주변에는 도끼창을 든 군인과 민간인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거칠고 역동적인 전투 장면 속에서도 인물들의 헤어스타일과 드레스는 고전적 여성의 아름다움으로 묘사돼 한층 극적인 효과를 창출한다. 밝은 오렌지, 우아한 연보라 톤의 풍부한 드레스 색상에서 16세기 베네치아 화파의 영향이 엿보인다.
파비오는 잘생긴 신사로, 16세기 나폴리 사교계 여성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다. 이사벨라와 디암브라 역시 파비오를 미친 듯이 사랑했다. 본래 친한 친구 사이였던 두 여성은 남자가 자신을 더 사랑하고 있다고 서로 주장했다. 디암브라는 그를 위해 죽겠다고 말하며 이사벨라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엿새 후, 그들은 마을의 들판에서 검, 창, 철퇴, 방패, 그리고 갑옷을 입힌 말 등 완벽한 전투 장비를 갖추고 결투를 하게 된다. 이 일은 나폴리 도시 전체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고, 결투 당일 스페인 총독을 포함해 많은 나폴리 궁정 사람들이 이사벨라와 디암브라의 결투를 보려고 속속 모여들었다. 아마도 이 특이한 사건이 리베라를 매혹했을 것이다. 당시 나폴리에서 남자들끼리의 결투는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었지만, 이것은 여자들의 결투였기 때문이다.
벨벳 망토를 걸친 말을 탄 이사벨라는 가문의 문장(紋章)과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투구를 쓰고 푸른 갑옷을 입고 나타났다. 디암브라는 황금뱀 문장이 있는 투구와 초록색 갑옷을 착용했다. 그들의 말은 보통 말이 아니라 데스트리어(destrier)였다. 데스트리어는 가장 높은 등급의 중세 군마로, 기사들이 전쟁이나 마상 시합을 할 때 탔던 말이다. 신호나팔을 불자 이들은 창을 들고 맹렬하게 상대방을 향해 돌진했고 순식간에 창이 부러졌다. 창을 잃은 두 숙녀는 이번엔 철퇴를 휘두르며 서로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결국 디암브라가 철퇴로 이사벨라의 방패를 부수었고 그 여파로 말이 쓰러졌다. 데스트리어에서 내려 낙마한 이사벨라에게 다가간 디암브라는 파비오가 그녀의 것임을 인정하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때, 별안간 검을 움켜쥔 이사벨라가 달려들어 디암브라를 쓰러뜨리고 투구 끈을 끊어버렸다. 디암브라는 패배를 받아들였고, 이사벨라는 인간 전리품 파비오를 쟁취했다. 구경거리를 좇아 구름같이 몰려든 사람들이 예상외의 역전 드라마에 얼마나 열광했을지 짐작이 가리라! 이 놀라운 결투 스캔들은 당대 전 유럽의 궁정에 들불처럼 퍼졌다. 이야기는 이후 오랫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80여 년 후엔, 주세페 데 리베라의 그림으로 기록되었다.
인간사회의 구성원들 간에는 끊임없는 분쟁이 생기기 마련이다.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였던 결투는 고대 세계에서 19세기까지 공공연하게 존재했다. 국가는 엄벌로 다스리려 했지만 좀처럼 근절되지 않았고, 결투자들은 종종 심각한 부상을 입거나 심지어 생명까지 잃었다. 살인을 해도 대부분 법적으로 처벌되지 않고 넘어갔다.
여성들의 결투는더 잔혹했다
결투는 보통 남자들의 영역으로 여겨지지만, 남자와 여자 간, 여자와 여자 사이에서도 있었다. 사실 여자들의 결투는 훨씬 더 피비린내 나고 잔혹했다. 연적이거나, 기분 나쁜 곁눈질에 기분이 상하거나, 똑같은 드레스를 입은 것이 거슬리거나 하는 사소한 것이 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남성 간의 결투는 10건 중 4건이 죽음을 부른 반면, 여성 간의 대결은 10번 중 8번이 살인으로 끝났다고 한다.
여성들의 결투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서는 16세기 밀라노의 성 니콜라스 수녀원 연대기 기록이다. 1571년 수녀원에서 두 명의 명문가 출신 처녀들이 서로의 외모에 질투를 느껴 칼부림을 한 사건이 일어났다. 방 안에서 싸우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수녀들이 방으로 뛰어들었을 때, 두 명의 피투성이 숙녀가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죽었고, 다른 한 명은 죽어 가고 있었다. 그들이 결투에서 보여주는 잔인함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마담 드 폴리냑과 마담 드 네슬레의 결투. Google 이미지
가장 전설적인 여성간 결투는 1624년 가을, 파리의 블로뉴숲에서 당대의 바람둥이 미남자 리슐리외 공작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네슬레 후작부인(Madame De Nesle)과 폴리냑 백작부인(Madame De Polignac)의 결투였다. 리셜리외 공작은 프랑스 루이 13세의 재상인 유명한 리셜리외 추기경의 종손자다. 그는 수많은 여성들과의 연애사건과 자유분방한 일탈 행위로 악명이 높았지만, 단순한 바람둥이 쾌락주의자 이상이었다. 프랑스 군대의 원수이자 뛰어난 외교관, 예술과 문학의 후원자로서 많은 여성이 흠모할만한 매력남이었다.
루이 14세 궁정에서는 공주부터 시녀에 이르기까지 공작의 매력적인 미소와 유혹의 눈빛에 넘어가지 않은 여성이 없었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여성들이 그의 주변을 맴돌며 벌이는 경쟁과 다툼은 궁의 일상이었다. 심지어 결투까지 있었다. 그의 관심이 마담 드 폴리냑에게서 네슬레 후작부인에게로 향하자, 광적인 질투심에 불탄 마담 드 폴리냑은 마담 드 네슬레에게 편지로 결투를 신청했다. 선택한 무기는 권총이었다. 총알은 마담 드 네슬레의 가슴을 빗나갔지만 어깨를 스쳤고, 그녀는 피로 붉게 물든 채 쓰러졌다. 결투에서 승리한 마담 드 폴리냑은 부상을 입은 채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연적에게 의기양양하게 "나 같은 여자의 연인을 빼앗으면 어떤 최후를 맞는지 가르쳐 주지."라고 말했다. 그녀는 이제 공작이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며 기뻐했다. 그러나 리슐리외 공작의 사랑은 금세 프랑스 섭정의 딸인 샤를로트 아글레앙 도를레앙에게로 옮겨갔다. 이 결투 사건은 리셜리외 공작의 편지 기록으로 역사에 남았다.
에밀 앙투안 바야르, ‘결투, 그리고 화해’, 1891년 이전
19세기엔 두 오스트리아 귀족 여성이 토플리스(Topless) 결투를 벌여 장안의 화제가 된 적도 있다. 1892년 신문 기사에 따르면, 오스트리아 귀족 여성인 폴린 메테르니히(Pauline Metternich) 공주와 아나스타샤 킬만세그(Anastasia Kielmannsegg) 백작부인이 파두츠의 한 행사에서 무대 꽃장식에 대해서 논쟁하다가 결투를 벌였다. 메테르니히 공주는 나폴레옹 3세 치하에서 파리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의 아내였다. 존경받는 사교계 명사인 그녀에게 꽃들이 어떻게 배치돼야 하는지를 비롯한 행사의 모든 세부 사항은 무척 중요한 문제였다. 결투의 승자는 없었고 두 여성 모두 상처를 입었다. 메테르니히 공주는 코에 상처를 입었고 킬만세그 백작부인은 팔을 베었다. 당시 여성들끼리의 결투가 드문 건 아니나 토플리스 결투였기 때문에 단연코 화제로 떠올랐다. 의학적 지식을 가진 심판 루빈스카 부인은 옷의 천이 상처에 닿으면 감염을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해 웃옷을 벗고 싸우게 했다. 루빈스카 남작 부인이 결투를 훔쳐보는 주변의 남자들을 향해 "훔쳐보지 말라, 이 천하고 음탕한 자들아!"라고 외쳤다는 설이 전해져 온다.
결투의 역사와 결투 유전자
'결투(duel)'라는 단어는'둘 사이의 전쟁'을 뜻하는 라틴어 'duellum'에서 유래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결투는 아마도 성경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일 것이다. 그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결투자들은 종종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과나 관용, 타협의 해결 방법 대신 생명을 건 위험한 결투를 선택했다.
결투의 가장 초기 형태는 결투에 의한 재판이었다. 고대 게르만법에서 유래한 이 방식은 결투에서 이긴 사람이 무죄, 진 사람이 유죄였다. 이른바 '재판 결투(judicial combat)'라고 일컬어졌는데, 신이 결투의 승패로 옳고 그름을 판결해 준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카이사르와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게르만 부족은 칼을 사용한 단 한 번의 결투로 다툼을 해결했다. 게르만족의 침략과 함께 중세 초기에 서유럽에서 이 관습이 확립되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개인들 간 다툼이 생겼을 때 증인이나 증거가 부족한 경우, 공식적인 재판을 대신해 당사자들끼리 사적인 결투로 해결했다. 일찍이 가톨릭 교회는 결투를 야만적인 관례라고 생각하고 금지했다. 1215년의 라테라노 공의회에서는 결투에 참가한 사람이나 심판을 파문했고, 16세기의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도 결투는 죄로 규정했다.
근대에는 이른바 '명예의 결투'가 유행했다. 명예의 결투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인신공격이나 모함을 받았을 때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결투하는 게 남자다운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결투는 나약함, 여성스러움에 대척점에 있는 존경할 만한 행위였다. 이런 사적인 결투는 사회 질서를 위협하기에 국가에서는 엄벌로 다스리려 했지만, 19세기까지도 사라지지 않았고 상대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살인을 해도 대부분 법적으로 처벌되지 않고 넘어갔다.
프랑스에서는 명예 결투가 매우 널리 퍼져 있었다. 샤를 9세는 결투에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나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그러나 20세기에도 프랑스에서는 여전히 이따금씩 결투가 열렸고, 독일에서는 나치 치하에서 다시 합법화되었으며,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권 역시 결투를 장려했다.
인간의 약점을 꿰뚫어 본 셰익스피어는 “결투는 인생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관습이다”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현대인은 이에 동의할 것이다. 하찮은 시비로 인해 칼과 총이 동원된 치명적 결투를 한 옛사람들이 우스꽝스럽고 한심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과거 결투 문화의 흔적이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문 경기장과 입장료를 내는 관객이 추가되고 살의 대신 스포츠 경쟁 정신으로 대체되긴 했지만, 결투의 행태는 현재의 프로 격투기와 놀랍도록 비슷하다. 총잡이들이 서로 마주 보고 서서 누구 더 빨리 총을 빼서 쏘느냐로 승자를 정하는 서부극의 통속적인 결투 클리셰(cliché)는 또 어떤가. 도로에서 가끔 일어나는 자동차 보복 질주도 자존심을 건 일종의 결투다.
현대사회에도 어떤 형태로든 결투를 시도하는 사람들, 결투하라고 남을 충동질하는 사람들은 늘 있다. 최근 테슬라 최고경영자인 일론 머스크와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가 SNS를 통해 농담반 진담반 브라질 격투기인 주짓수 시합을 하자는 이야기를 주고받은 후, 현피 여부가 사람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그들의 결투를 한껏 기대하는 우리 자신을 보라. 결투 유전자는 우리의 정신에서 멸종되지 않았다. 역사에서 봤듯이, 남성과 여성도 가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