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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지 Oct 18. 2023

털 찻잔 속의 차?

ㅡ  일상의 오브제가 만들어낸 낯섦과 기이함

[다섯 번째 이야기]



털 찻잔 속의 차?


동물의 모피로 덮인 찻잔으로 차나 커피를 마신다면 어떤 느낌일까?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에는 메레 오펜하임의 기이한 찻잔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오펜하임을 유명하게 한 대표작 <털의 아침식사(Le Déjeuner en fourrure)>이다. 메레 오펜하임(Méret Oppenheim, 1913~1985)은 베를린에서 진보적이고 지적인 중산층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녀는 의사 아버지의 영향으로 칼 융(Carl Jung)의 정신분석학을 접했고, 그 영향이 일생동안 그녀의 작품 세계를 지배했다. 전쟁을 피해 스위스의 외가로 간 그녀는 조부모와 고모를 통해서도 지적인 자극을 받을 수 있었다. 할머니는 스위스의 여성운동에 참여한 지성인이었고 이모는 예술에 대한 열정과 현대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가진 신여성이었다. 1920년대 후반, 오펜하임은 다다, 초현실주의를 비롯한 모더니즘, 표현주의, 입체파 등의 작품을 접했고, 특히 15세에는 추상적 초현실주의 화가 폴 클레(Paul Klee)의 전시회를 보고 강한 영감을 받았다.


1932년, 18세에 파리로 간 그녀는 미술학교에서 공부하며, 장 아르프(Jean Arp),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프란시스 피카비아(Francis Picabia) 등 당대의 쟁쟁한 다다, 초현실주의 미술가들을 만나 교유했다. 이 풍요로운 예술적 분위기는 오펜하임을 성장시켰고, 자유분방하고 재치가 넘치는 그녀 역시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오펜하임, <털의 아침식사>, 1936년, MoMA


이 유명한 작품의 탄생은 예술가들의 사소한 농담에서 우연히 탄생했다. 1936년, 오펜하임은 파리의 한 카페에서 피카소와 그의 연인 도라 미르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때 그녀는 모피로 두른 황동 팔찌를 차고 있었다. 이 팔찌는 그녀가 초현실주의 미술가들과 협업한 이탈리아 패션 디자이너 엘사 스키아파렐리(Elsa Schiaparelli)에게 그 디자인을 팔았던 기발한  액세서리였다. 아나나 다를까 피카소도 관심을 보이며, 오펜하임에게 “털을 덧댄 건 무엇이든 보기 좋아요.”라며 성적 함축이 있는 농담을 하자, 그녀는 자기 앞에 있는 찻잔을 보며 “이 찻잔과 접시까지도 털로 덮을 수 있죠.”라며 재치 있게 되받아쳤다. 이 아이디어는 실없는 농담으로 끝나지 않고 즉시 작품 제작으로 이어졌다. 오펜하임은 곧장 상점에서  찻잔과 접시, 티스푼을 사서, 이 물건들에 동물의 털가죽을 입혀 작품으로 만든 것이다.


오펜하임은 초현실주의 운동을 이끌던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 주관한 초현실주의 전시회에 이 작품을 출품했다. 앙드레 브르통은 찻잔 세트 원래의 용도를 무시하고, 전혀 다른 낯선 오브제로 바꾼 그녀의 창의적이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극찬하며, 작품에  <털의 아침식사>라는 제목까지 지어줬다.
 

같은 해, 오펜하임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환상적 예술과 다다, 초현실주의(Fantastic Art, Dada and Surrealism)> 전시회에 초대되었다. 전시는 MoMA가 개최한 첫 초현실주의 전시로, 여기에 전시된 오펜하임의 작품은 관람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며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작품에 매료된 MoMA는 <털의 아침식사>를 구매했다.


당시 무명의 예술가였던 오펜하임은 이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으로 대중으로부터 격렬한 찬사와 반발을 동시에 이끌어냈다. 이후, 오펜하임은 끊임없이 평범한 이미지들을 변형하고, 놀라운 아이디어를 개발했으며 다른 젊은 예술가들과 협력하면서 독창성, 유머, 유쾌함으로 가득 찬 작품을 창조했다. 거기엔 퍼포먼스 활동도 포함되었다. 그녀는 "아무도 당신에게 자유를 주지 않을 것"이라며 "당신은 스스로 그것을 쟁취해야 한다"고 말했고, 늘 생각대로 행동했다.


도대체 이 털 커피잔 세트는 무엇인가? 왜 이렇게 발표되자마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작품이 되었을까? 찻잔, 접시, 티스푼으로 구성된 작품은 중국 가젤 영양의 털로 덮여 있다. 속이 빈 찻잔은 풍성한 체모로 뒤덮인 여성의 생식기를 연상시키며, 남근 모양의 티스푼은 미묘한 에로틱한 느낌을 유발한다.


테이트 갤러리의 디렉터 출신 미술 저널리스트인 윌 곰퍼츠(Will Gompertz)는 작품의 성적 암시에 주목한다. 모피 찻잔에 입을 대고 마시는 것은 오럴 섹스를 연상시키는 에로티시즘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본래 찻잔이 주는 휴식과 즐거움의 이미지를 털로 뒤덮음으로써 불쾌하고 역겨운 것으로 바꿔버리는 역발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만지면 포근하고 부드러운 촉각을 주지만 입에 닿는다면 끔찍한 느낌을 줄 털을 찻잔에 덧대어, 두 개의 서로 이질적인, 전혀 어울리지 않은 물체(오브제)들을 결합한 데서 독특한 효과를 창출해냈다고 해석한다. 원래의 찻잔의 기능에 반하는 엉뚱한 모습이 된 낯선 물체를 보면서 사람들은 당황하고 혼란에 빠진다.


한편, 미술사학자인 휘트니 채드윅(Whitney Chadwick)은 차갑고 매끄러운 도자기(찻잔)와 금속(티스푼)을 따뜻한 모피로 바꾸어 초현실적인 마법의 변형을 획득했다고 설명한다. 1936년 MoMA에서 이 작품이 전시되었을 때, 한 여성이 기절했는데, 이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모호한 불안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 오펜하임이 노렸던 심리적 반응이 아니었을까?


이렇듯, 오펜하임은 이질적인 일상의 평범한 사물들을 엉뚱하게 조합하여, 매우 독특한 어떤 것, 혹은 수수께끼로 만들어 버린다. 그녀의 작품은 다른 초현실주의 화가들과 달리 그림 속의 이미지를 통해 머리로 상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놓인 실물을 통해 모피 찻잔으로 차를 마시는 기분, 그 까끌거리고 입 안에서 엉키는 털을 즉각적인 촉각으로 느끼도록 유도한다.


사실, 우리는 주변 환경에서 보는 모든 물체들의 모습을 너무 당연하고 고정적인 것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찻잔은 차를 마시기 위한 컵이기 전에는 흙이었고, 다시 흙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변적 물질이다. 어떤 특정한 형태를 가진 찻잔의 모습으로 영원히 남아 있지는 않다.



일상의 오브제가 만들어낸 낯섦과 기이함


쟁반 위에, 오븐용 닭고기처럼 끈으로 묶인 낡고 더러운 하이힐이 올려져 있다. 구두가 여자와 연관된 사물이라서 그런지 기괴한 식인행위를 연상시키며, 뭐가 알 수 없는 불길하고 불안한 느낌을 갖게 한다. 타원형 쟁반과 묶인 구두 사이의 틈새는 오럴 섹스를, 구두 자체는 성적인 페티시(fetish: 신체의 특정 부분이나  물건을 통해 성적 흥분을 느끼는 경향)를 암시한다. 오펜하임은 정신분석학적 요소를 그녀의 작품에 집요하게 도입했고, 이 작품도 이런 성향을 보여준다.



나의 간호사(Ma Gouvernante), 1936년, MoMA



오펜하임, <장갑 >, 1985년, MoMA/  <한 쌍>, 1956년



회색의 염소 가죽에 미세한 붉은 정맥을 프린트를 한 작품이다. 손과 장갑은 초현실주의의 주요한 소재였고, 오펜하임에게도 그랬다. 모피 코트처럼 장갑도 멋쟁이 여성들 사이에서는 패션 아이템이었다. 오펜하임은 일찍이 패션 디자이너 엘사 스키아파렐리와 협력해 모피 장갑과 같은 패션 아이템들을 제작했고, 아방가르드 미술과 패션을 연결하려고 했다.


오펜하임은 늘 발상의 전환을 즐겼고, 상식을 대담하게 파괴했다. 장갑은 원래  손의 피부를 보호하려는 것인데, 여기서는 핏줄을 장갑에 스크린 인쇄하여 연약함을 부여함으로써 장갑의 본질과 목적에 도전한다. 한 켤레의 여성용 앵클 부츠가 서로 맞닿아 있는 <한 쌍(Das Paar)>은 신발 한 켤레 간의 열정적인 키스를 묘사한다. 오펜하임의 작품에는 이렇듯 초현실주의적 혼돈과 다다적인 탈맥락화,  집착과 욕망이 내포돼 있다. 오펜하임에게 물체는 결코 불활성의 물질이 아니다. 구두, 찻잔, 장갑 등의 물건들은 신체와 접촉하면서 어떤 생명력을 흡수한다. 장갑 한 켤레에 새겨진 정맥에서 보듯이, 생명의 숨결은 무생물을 관통해 살아난다.이것은 대상을 기괴하게 만들어버린다. 우리에게 친숙했던 일상의 오브제들의 갑작스러운 돌변이 불안과 불확실성의 감정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오펜하임, <다람쥐>, 1969년/  <모피 팔찌>, 1936년



예술가라기보다는 남성 미술가들의 뮤즈?


만 레이의 사진 모델 오펜하임



오펜하임은 70세 넘어서까지 계속 작품 활동을 했지만, 그 시대에 함께 작업했던 다른 초현실주의 남성 예술가만큼 유명해지지 못했다. 젊은 시절 오펜하임은 <털의 아침식사>로 반짝했을 뿐이다. 그녀는 예술가라기보다는 마르셀 뒤샹, 알베르토 자코메티, 만 레이 등의 뮤즈로 알려졌다. 그들 중 막스 에른스트의 연인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독립적인 미술가가 아니라 남성 예술가의 뮤즈로 취급되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불안과 우울증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그녀는 1937년 마침내 에른스트와의 관계를 끊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 여파로 1년 반 동안 전혀 창작 활동을 하지 못했다.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한 후에도 개인적인 실험에 집중했을 뿐 전시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진보적인 가정에서 활달하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성장한 오펜하임도 1930년대 전위 미술 그룹 내의 남성 주도적 문화에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초에 등장한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미술운동은 기존의 낡은 가치관을 뒤엎고 인간 해방을 꿈꾸었지만, 여전히 남성 미술가들이 모든 것을 주도했고 여성 미술가들은 그들의 보조자 혹은 뮤즈로 취급되었다.  미술운동사상 여성 미술가들이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참여하고 활동했으나, 1934년까지만 해도 공식 사진을 찍을 때는 남자들끼리만 찍었고, 여성들은 토론회에서도 배제될 정도로 그룹 내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초현실주의 그룹의 남성들은 여성을 동등한 예술가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남자 창작자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는 매력적이고 감각적인 뮤즈에 불과했다.


다다, 초현실주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여성의 특성을 비이성, 감성, 직관으로, 남성의 특성을 이성, 논리, 지성으로 이분화하고, 여성적인 것이 남성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성은 남성을 현실과 윤리, 이성의 억압으로부터 사랑, 성적 해방, 무의식, 자유, 방종, 환각, 광기의 세계로 이끄는 신비롭고 순수한 존재, 성녀, 혹은 악녀, 팜 파탈, 매춘부로 규정되었다. 얼핏 보면, 남성을 정신적으로 해방시키는 소중한 존재로서의 여성을 찬미한 것 같으나, 그 본질은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본 것이 아니라 타자 혹은 일종의 수단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펜하임이 초현실주의 그룹에 더 이상 머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방가르드 운동에 참여한 여성 미술가들은 전통적인 사회의 여성의 역할에 반기를 든 대담하고 독립적인 여성들이었다. 겉으로는 이런 여성들의 용감함을 격려하는 것 같았지만, 여성에 대한 그들의 의식은 이전의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구태의연했고 모순에 가득 차 있었다. 여성 미술가들은 그들이 남성 작가들과 동등하지 않고 남자들처럼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오펜하임도 막스 에른스트를 떠났고, 역시 그의 또 다른 뮤즈였던 레오노라 캐링턴도  떠난 것이다. 


다음 작품은 이런 상황 속에서 좌절감을 느낀 오펜하임의 항변 같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모호한 섹슈얼리티는 여성의 남성적 측면과 남성의 여성적 측면을 강조하며 젠더 정체성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에 반대한 오펜하임의 생각이 나타나 있다. 여성의 가슴과 남성의 페니스를 재현한 듯한 형상과 <먼 친척>이란 제목을 통해, 남성성과 여성성은 '멀지만 가깝다'는 의미를 말하려고 한 게 아닌지.


오펜하임, < 먼 친척.>, 1966년



그녀는 슬럼프와 우울증을 딛고, 1950년대부터 스위스 베른의 자유로운 창조적 분위기 속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초현실주의를 비롯한 한정된 영역에 안주하는 것을 거부하고, 기하학적, 추상적 형태와 풍경 등 여러 장르와 양식에 걸쳐 작업했다. 그녀는 일반적으로 1930년대 초현실주의 테두리 안에서 작업한 작가로 알려져 왔으나, 사실상 1950년대 이후에는 다양한 경향의 미술 경향을 보였다. 분야도 보석 디자인, 조각, 그림, 가구, 퍼포먼스, 시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채로운 활동을 했다.



새롭게 쓰는 여성 미술사


1967년 오펜하임은 스톡홀름의 대규모 회고전으로 다시 인정을 받았다. 그녀의 작품들은 이즈음 잊힌 여성 미술가들을 미술사에 다시 소개하려는 페미니스트 미술사학자와 예술가들에 의해 부활되었다. 1970년대를 기점으로, 젊은 페미니스트 미술사학자들은  새로운 여성 미술사를 쓰려고 했고, 그중 한 사람인 오펜하임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녀는 미술사에서의 남성과 여성의 불평등을 인정했고, 여성에 대한 부당한 대우와 선입견에 강력히 반발했으며, 진정한 예술가로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러나 오펜하임은 여성 미술가가 아닌 그냥 미술가로 대우받기를 원했다. 그녀는 페미니스트들이 자신을 페미니즘 미술사 안에서 여성 미술가로서 특별한 위치를 부여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가 페미니스트였건 아니든 간에, 결과적으로 그녀의  명성은 이들의 도움을 받은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한편, 그녀의 작품은 1960년대, 70년대의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의 수많은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주디 시카고(Judy Chicago)의 <저녁 파티(Dinner's Party)>의 식탁은 오펜하임의 아이디어를 확장한 것이며,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와 에바 헤세(Eva Hesse)의 괴기스러운 형태 역시 오펜하임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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