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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지 Oct 15. 2023

왜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를  죽일까?

ㅡ  영아살해와 모성 이데올로기


[네 번째 이야기] 



왜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를 죽일까?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메데이아’, 1620년, 개인 소장



이 작품은 17세기 이탈리아의 바로크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의 '메데이아'다. 그리스 신화 속 인물 메데이아가 자신을 배신한 남편 이아손에게 복수하기 위해 예리한 단도를 치켜들고 그의 핏줄을 이은 자식을 죽이는 끔찍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메데이아는 자식을 죽인 모든 어머니의 아이콘 같은 존재다.                     

       

얼마 전 영아 시신을 냉동고에 유기한 사건이 일어나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를 계기로 출생 신고가 되지 않은 아이들을 전수조사하면서, 부모에 의한 영아살해 사례들이 속속 드러났다. 태어나서 1년까지의 젖먹이 아기를 고의적으로 살해하는 영아살해뿐만 아니라 유아(만 1세부터 6세)를 학대하고 죽이는 사건도 끊이지 않고 보도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 영아살해는 범죄로 처벌받지만 여전히 근절되지 않고 있다. 불편한 사실이지만, 영아살해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권에서 일어났고, 때로는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진 사회적 관행이었다.  

    


영아살해 및 유기의 역사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선사시대의 낮은 인구성장률은 질병과 식량 부족, 짐승의 습격과 함께 영아살해(infanticide)가 중요한 요인중 하나이며, 당시 영아살해율이 신생아의 15%에서 20% 사이였다고 한다. 심지어 미국의 저명한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Marvin Harris)는 구석기시대엔 20~50%에 이르렀다고 추정한다. 이러한 높은 영아살해율은 신석기혁명으로 식량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서 감소했지만, 신석기시대에도 종종 농작물 생산량에 따라 입을 줄이고 인구수를 통제하기 위해 영아살해라는 극단적 방법을 선택하곤 했다.  

    

고대 그리스인은 유아살해를 야만적이라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적잖이 행해졌다. 가족이 아기를 키울 여유가 없는 경우 살해하거나, 바구니 또는 항아리에 넣어 성문 밖이나 도로, 공공장소에 버렸다는 것이 역사학계에서 대체로 인정되는 사실이다. 영아살해 혹은 유기는 고대신화와 문학에서도 나타난다. 고대인은 자신들이 사는 세상을 신화로 표현했던 것이다. 우주의 지배자 크로노스는 자녀가 태어나자마자 삼켜버린다.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와 영웅 페르세우스 신화에서도 영아 유기 이야기가 나온다.


서양 기독교 사회는 초기부터 영아살해를 금지했지만, 문헌과 법률 문서에 영아살해와 유기 사례들이 기록되어 있다. 1460년대에 부르타뉴의 저명한 설교자인 올리비에 마이야르는 '변소, 연못, 강 부근에서 그곳에 던져진 아이들의 울부짖음'을 들을 수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 증언은 중세시대, 끔찍한 영아살해의 공포를 생생하게 불러일으킨다. 중세의 수많은 노래 가사나 미스터리 연극 속에서도 영아살해 묘사가 나오곤 한다.    

  

영아 살해는 고대 아시아 지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중국 전통문화에서는 아들만이 대를 잇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아는 덜 중요시되었다. 기근이 오면 여자 아기는 집안의 짐이었고 우선적으로 살해되었다. 전통적인 인도문화에서 소녀의 부모는 결혼 지참금을 지불해야 하므로 여아는 재정적 부담으로 간주되었고 출생 시 살해되는 경우도 많았다. 여아에 대한 차별과 영아살해는 이슬람교 이전 아라비아에서도 나타난다.      


산업혁명 이후 유럽에서는 도시 빈민층 사이에서 부양할 가족 수를 줄이기 위해 아기 살해가 빈번했고, 파리와 런던의 기아 보호소는 버려진 아기들로 넘쳤다. 20세기 들어서 임신중절 수술로 인해 원치 않은 아이를 유산시킬 수 있었지만, 영아 살해는 아직도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현상이다. 특히 일부 후진국에서는 관행이 용인되기도 하고 법적 조치도 엄중하게 시행되지 않고 있다.


           

모성신화    

 

오랫동안 우리 사회가 이상적으로 생각해 온 여성, 즉 이른바 '여성스러운 여자'의 이미지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성격, 긴 머리와 치마를 입은 다소곳한 모습, 자애로운 모성애를 가진 존재, 그런 것들이었다. 특히, 모성은 여성성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여겨져 왔다. 전통적인 어머니가 아닌 여성들은 신랄한 비판에 직면하곤 했다. 문학 작품이나 그림에서도 여성 또는 어머니는 일반적으로 무한한 애정으로 아이를 양육하는, 이상적이고 성스러운 존재로 묘사된다.


반면, 영아 살해의 가해자는 대체로 남성으로 나타난다. 아기 살인자를 여성이 아닌 남성으로 묘사함으로써, 아이를 보호하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모성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여성이 자녀를 죽이는 경우는 여성 전사 부족 아마조네스나 메데이아 같은 그리스 신화의 인물뿐이다.


또한, 아기 살인자는 기독교인이 아닌 유대인, 무슬림, 그리고 로마군과 전쟁을 벌인 이민족(킴브리족)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헤롯왕이 유대의 영아들을 학살하는 그림에서는 종종 터번과 같은 오리엔탈풍 모자를 쓴 병사들이 출현한다. 살인자의 이미지는 대체로 고대신화의 인물, 유럽이 아닌 지역 사람, 이교도로 나타나지만, 이는 서구 기독교 사회의 유구한 영아살해 역사의 진실에 완전히 어긋난다. 미술작품에서 아기 살인자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지 살펴보자.


피터 폴 루벤스, '무고한 아기들의 학살', 1610년, 온타리오 미술관, 캐나다 토론토


17세기 바로크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는 그림에서 어머니의 모성과 아비규환 속 학살 현장의 절망, 폭력, 슬픔, 무자비함 등 다양한 감정을 역동적으로 묘사했다. 잔혹한 병정들이 아기들을 죽이고 있고, 어머니들은 그들을 구하기 위해 맹렬히 저항하고 있다. 중앙에는 핏빛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간신히 왼손으로 아기를  안고, 오른손으로 병사의 얼굴을 필사적으로 할퀴고 있다. 그녀 옆의 군인은 아기를 번쩍 들어 이미 어린아이들의 시신으로 덮인 땅바닥에 패대기치려고 하고, 그 오른쪽, 절망적 눈빛의 아기 어머니가 양팔을 뻗쳐 이를 저지하려고 한다.


마태오 디 조반니, '무고한 아기들의 학살', 1482년,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 이탈리아 시에나



15세기 이탈리아 화가 마태오 디 조반니(Matteo di Giovanni)는 같은 제목의 그림에서 투르크 의상과 터번 등 오리엔탈풍 복식과 '무어인'으로 보이는 검은 피부의 인물들을 사납고 야만적인 분위기로 표현했다. 헤롯의 궁전 홀은 온통 비명을 지르는 어머니, 죽거나 죽어가는 아기, 피에 굶주린 병사들로 가득 차 있다. 대리석 바닥은 아기들의 시신으로 아수라장이다. 우울한 표정의 신하들이 헤롯의 왕좌 옆에 서 있고, 대리석 왕좌의 스핑크스 팔걸이를 움켜쥐고 있는 헤롯왕은 사악한 괴물처럼 표현돼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전통적인 모성 이미지와의 균열을 드러낸다. 이 참혹한 범죄는 놀랍게도 남성보다 여성, 그것도 친어머니에 의해 저질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모든 여성이 아기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은 아니었고, 출산 후 아이를 돌보지 않고 유기하거나 심지어 살해하는 어머니들은 항상 있었다.


왜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를 죽이는 것일까? 어머니의 정신적 문제 외에, 아기들이 혼외자식이거나, 병이나 기형을 가지고 태어났거나, 원치 않은 성이거나, 가족에게 경제적 부담이 되는 경우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살해되고 버려진다. 어머니가 자식을 죽이는 행위는 우리를 무척 혼란스럽게 한다. 모성이 여성의 본능이며, 어머니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녀를 사랑하고 헌신한다는 전통적인 모성애 이데올로기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즈음에서 전통적인 모성신화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모성은 타고나는 것일까? 모성애가 종족 보존을 위한 원초적 본능인가, 아니면 후천적으로 학습된 메커니즘일까?

      

흥미로운 것은 동물의 세계에서도 '새끼 살해'는 곤충, 어류, 조류, 포유류에 이르기까지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이다. 황새 부모는 먹이에 비해 새끼 개체수가 많을 때, 종종 가장 발육이 늦고 생존 가능성이 낮은 새끼를 잡아먹는다. 쿼카(캥거루과에 속하는 호주산 소형 포유류 동물)는 포식자에게 쫓길 때 새끼를 주머니 밖으로 흘려 적의 관심을 그것으로 돌린 후 혼자 도망친다. 일부 캥거루와 왈라비 등 다른 유대류에게서도 비슷한 행동이 관찰된다. 이 같은 행동은 종의 생존 전략이다. 약한 새끼에게 투자하는 것보다 번식 능력이 있는 어미가 살아남는 것이 자연의 세계에서 진화론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자연의 세계에서는 부모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자식을 희생시키기도 한다. 사회생물학적 관점에서는, 인간의 영아살해도 자연의 '새끼 살해'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물론, 고등한 문화를 가진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 인간은 포식자를 교란시키기 위해 자식을 버리진 않는다. 극심한 기아가 닥친 시대에 간혹 자식을 잡아먹었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긴 하지만 자식을 먹는 일은 극히 드물다. 인간은 생물학적 측면과 문화적 측면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생물학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도 동물의 한 종이므로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생물학적 범주 안에서 관찰, 연구할 수 있고, 때로 매우 유의미한 동질성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사회의 영아살해 역시 도덕과 윤리의 차원에서만 볼 게 아니라 생물학적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피임이나 낙태 등 의학적 지식과 기술이 낙후되고 사회복지 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대에, 아이는 가족의 삶에 재앙이 되기도 했다. 많은 아이들이 집안일을 도왔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들이는 중요한 노동력 자원이었다. 빈곤층에서는 집안에 어떤 보탬도 되지 않고 보살핌만 필요한 아이는 그저 짐이었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지금도 아이가 병약하거나 가난 때문에 여러 아이를 기를 여력이 없는 경우, 미혼모의 아이, 혹은 불륜으로 태어난 아이일 때 영아살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 어머니 자신의 삶을 위해 자식을 희생하는 것이 동물의 '새끼 살해'의 메커니즘과 비슷하다.  

  

사실, 어머니가 된다는 건 쉽지 않다. 어머니라는 자리는 극한의 노동 집약적, 감정적 노동을 요구한다. 실제로 많은 여성이 어머니가 되었을 때 이른바 '모성의 양가성(maternal ambivalence)'을 겪는다. 자녀를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분노, 미움, 슬픔, 죄책감 같은 복잡하고 모순된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어머니는 자녀에게 모든 것을 희생하는 존재였다. 이러한 모성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어머니들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좋은 어머니'의 이상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금기다. 많은 여성이 어머니에 대한 사회의 높은 기대치와 맞닥뜨리면서,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부정적 감정과 죄책감에 시달린다. 자칫 '나쁜 어머니'라는 혹독한 사회적 비난을 받을까 봐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 여성의 자기실현과 성취 욕구가 높아짐에 따라 좋은 어머니와 독립적 자아 사이에 고통스러운 괴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면서 여성들 스스로 어머니는 자녀에게 모든 것을 희생하는 헌신적 존재라는 관념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었다. 정신과 의사와 심리학자들은 '좋은 어머니' 신화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고 어머니 자신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며 지나친 죄의식을 갖지 않도록 조언한다.


결혼과 출산을 당연시하지 않고, 모성 이데올로기에 거부감을 갖는 세대도 등장했다. 사회는 여전히 여성들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압박하고 모성을 요구하지만, 이들은 이런 사회적 압력에 저항한다. 무조건적인 모성 이데올로기를 강박하는 것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심각한 저출산 현상에서 볼 수 있듯이.


영유아 살해는 계속 일어나고 있다. 최근 영아 살해·유기범에 대해 처벌을 강화하는 형법 개정안이 통과되었고, 출생통보제가 내년부터 시행되며 보호출산제도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이런 제도들이 과연 생물학적, 사회학적 뿌리가 깊은 영아살해를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을까?


법 제정 이전에,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는 충분한 사회적 여건과 국가의 지원, 미래사회를 위해서 아이를 소중히 여기는 공동체의 가치를 먼저 정비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는다면, 돌이킬 수 없는 초저출산 현상은 물론 영유아 살해와 유기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모성 이데올로기에만 의존하기엔 역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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