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보통 남성과 여성 두 가지로 성 구분을 한다. 그런데 여성과 남성의 이분법에 해당하지 않는 특성을 지닌 제3의 성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성별이 남성과 여성 이분법으로 구별될 수 없듯이, 사람들이 성적 매력을 느끼는 대상도 반대 성만이 아니다. 어떤 이는 이성에게, 어떤 이는 동성에게, 혹은 양쪽 모두에 끌리는 사람도 있다. 누구에게 감정적, 성적 끌림을 느끼느냐에 따라 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성애자가 된다. 또, 어떤 사람에게도 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하거나 성생활에 대한 관심이 없는 무성애자도 있다.
남녀의 이분법과 이성애자가 ‘정상’, 혹은 ‘올바름’으로 규정된 사회에서 이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성소수자가 된다. 이들은 오랫동안 ‘비정상’, 혹은 ‘정신질환’으로 낙인찍혀왔고, 비백인, 장애인 등과 함께 사회적 소수자로 분류되었다.
성소수자(LGBT)는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바이섹슈얼(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를 아우르는 말이다. 여기에 Q를 더해 'LGBTQ'로 쓰기도 한다. Q는 'queer' 또는 'questioning'의 머리글자로 성적 정체성을 명확히 할 수 없는 사람을 말한다. 성소수자를 단순히 퀴어라고도 하는데, 퀴어는 원래 ‘이상한’, '기묘한'이라는 뜻이지만, 지금은 성소수자들 스스로가 '그래, 나 이상하다. 어쩔래, 뭐 어때서?'라는 식으로 당당하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68혁명 이후 인권운동의 흐름에 발맞춰 성소수자들도 자신들의 존재를 사회에 적극적으로 노출하면서 퀴어 권리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다양성과 화합의 상징, 무지개 깃발(출처 wikipedia)
세계 각국에서 매년 성소수자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한 ‘퀴어 퍼레이드’ 행사를 한다. 성소수자의 상징인 무지개 깃발을 사용하는데, 무지개의 다양한 색깔은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라는 것을 상징한다. 여기 예술을 통해 무지개 깃발을 든 화가가 있다.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이다.
키스 해링(게티 이미지)
무지개 깃발을 흔든 화가
키스 해링은 1980년대 뉴욕 미술계의 스타로 부상한 그라피티 1) 미술가이자 사회 운동가다. 뉴욕의 길거리와 지하철 낙서에 영감을 받은 키스 해링은 지하철 공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곳은 그의 화실이었고, 빈 벽면은 캔버스가 되었으며, 뉴욕 통근자들은 작품의 관람객이었다. 분필로 그린 수백 점의 ‘지하철 그림’들은 점차 사람들 사이에서 친숙해지고 입소문도 났다. 지하철은 그의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실험실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그는 빛나는 아기, 짖는 개, 춤추는 인물의 모습 등 자신의 시그니처(signature)가 될 일련의 이미지를 개발했다.
'짖는 개(Barking Dog)'는 해링의 가장 대표적인 상징적 이미지 중 하나로, 1980년부터 1985년까지 이어진 뉴욕 지하철 그라피티 시리즈에서 처음 선을보였다.짖어대는 개는 사회에 만연한 억압과 차별, 폭력에 항거한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역시 그의 작품 중에서 잘 알려진 이미지인 '빛나는 아기(Radiant Baby)'는 손을 바닥에 짚고 무릎을 꿇어 기어 다니는 아기의 단순화된 형상이다. 해링은 이 아기가 선한과 순수함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키스 해링은 공공기물 훼손으로 여러 번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사람들은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그의 낙서 그림을 좋아했다. 그라피티와 팝 아트의 교차점에 서 있는 듯한 키스 해링의 작품은 또 하나의 참신한 현대미술 양식으로 갈채를 받았다.
키스 해링, ‘짖는 개’(왼쪽)/ ‘빛나는 아기’(오른쪽)
그는 이전 세대의 추상미술이나 개념미술과 대조되는 미학을 창출했다. 예술은 모든 사람이 즐길 수 있어야 되며,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한 키스 해링은 공공장소에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키스 해링의 그라피티는 AIDS, 약물 남용, 섹슈얼리티 등 그가 거주했던 뉴욕에서 경험한 문제들에서 종교, 전쟁, 핵 위협과 같은 전 인류의 공동 문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사회문제를 다뤘다. 특히, 그 자신이 동성애자였던 키스 해링은 성소수자와 차별받는 이들을 위해 앞장섰다. 나중에는 거리의 벽이 아닌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뉴욕 소호(SoHo)에 가게를 열어 자신의 그림 디자인을 티셔츠, 장난감, 포스터로 상품화해서 판매했다.
요즘은 우리 주변에서도 그의 그림이 그려진 핸드폰 케이스, 컵, 신발, 옷을 흔히 볼 수 있다. 검정과 흰색, 혹은 선명하고 밝은 원색, 활기찬 선, 단순하고 순수한 형태, 어린이같이 자유롭고 천진한 그림에서는 따뜻함과 긍정적인 에너지가 느껴진다. 개성 있는 만화적 캐릭터로 표현된 사람과 개, 동물의 형상이 서로 얽히고설킨 구성에서 보이는 재치와 유머는 미소를 부른다.
키스 해링, 무제(하트를 가지고 있는 두 인물), 1987년
하트는 키스 해링 작품의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 중 하나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어깨를 감싸고 무언가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듯한 장면이 묘사돼 있다. 두 사람 위 붉은 하트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 신뢰를 나타낸다. 그것은 사랑과 긍정의 상징이다. 연인 간의 사랑, 혹은 더 넓은 범위의 인류애를 나타내기도 한다.
키스 해링, 무제(하트를 가지고 있는 두 인물), 1982년
하트를 가지고 있는 두 인물은 아마도 사랑에 빠진 남자들일 것이다. 춤추는 듯한 신체적 움직임과 빛나는 하트는 두 인물의 행복감을 나타낸다.
키스 해링, 무제(댄스), 1987년
위 그림의 춤추는 인물들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명의 에너지를 표현한다. 음악의 리듬에 따라 몸을 흔들며 춤을 추는 1980년대 뉴욕의 게이 클럽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머리 위로 손을 높이 들고 있는 인물의 몸짓에서는 자유와 황홀경을 만끽하는 삶의 환희가 엿보인다. 키스 해링은 이런 온건한 동성애 이미지에서 점차 노골적인 성적 묘사로 나아간다. 그는 섹스를 금기가 아니라 아주 멋진 향유의 대상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키스 해링이 한창 활동했던 시기는 미국에서 AIDS가 절정에 달했던 1980년대였다. 당시 사람들은 동성애가 추악하고 비도덕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그림은 게이 공동체가 사회의 곱지 않은 시선에서 벗어나 밝고 긍정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힘을 주었다. 그는 작품을 통해 섹스와 삶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존재는 성소수자들이 자신들의 인권을 위해 맞서 싸울 때 가장 설득력 있는 목소리 중 하나가 되어 주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강력한 메시지를 내는 것이 그의 예술의 이유였고, 그중 한 가지는 사회에 성소수자에 대한 개방적인 시각을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해링은 1988년, 에이즈 진단을 받았고, 1990년 31세의 젊은 나이로 AIDS 관련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생애의 마지막 몇 년은 에이즈 퇴치를 위한 창작 활동에 바쳤다. 키스 해링 재단을 설립하여 에이즈 단체와 청소년 기구에 자금을 지원하고 그가 디자인한 이미지들을 무료로 제공했다. 침울한 주제는 그의 작품에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변신했다. 쾌활하고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들로 구성된 팝 아트 스타일의 작품은 정치적 메시지에 관계없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키스 해링, 무제(춤추는 인물들), 1986년
키스 해링은 매년 뉴욕에서 성소수자 행사를 주최하는 비영리 단체 ‘헤리티지 오브 프라이드(Heritage of Pride)’2)를 위해 이 로고를 만들었다. 동성애는 항상 사회적 금기의 음습한 그늘 속에 숨겨져 있었다. 키스 해링은 그들이 더 이상 숨을 여유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의 작품은 그들이 목소리를 내고, 춤을 추고, 살고, 성의 기쁨과 삶의 행복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지=공포’는 AIDS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그의 목적은 사람들이 AIDS를 공론화하고 예방하도록 장려하는 것이었다.
키스 해링, ‘무지=공포’, 1989년
키스 해링, ‘안전한 섹스’, 1988년
무지개 깃발은 세상 모든 곳에서!
키스 해링의 무지개 깃발은 성소수자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억압과 불평등이 있는 곳에서 휘날렸다. 다음 작품들은 청소년, 인종, 마약 문제에 이르는 그의 다양한 사회적 관심을 보여준다. “우리 청소년들(We The Youths)’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연립 주택 벽면에 그린 것이다. 원색의 아름다움과 천진난만한 형상은 그가 어린이, 청소년에 대해 갖고 있던 사랑을 드러낸다.
키스 해링, ‘우리 젊은이들', 1987년, 필라델피아
키스 해링, ‘크랙 이즈 왝’, 1986년, 이스트 할렘 핸드볼 코트
1986년, 키스 해링은 이스트 할렘 핸드볼 코트 한쪽에 허가받지 않고 ‘크랙 이즈 왝(Crack is Wack)’이라는 벽화를 그렸다. ‘크랙은 나빠’라는 의미다. 크랙은 1980년대 중후반 미국사회에 엄청나게 퍼진 코카인의 일종이다. 벽화는 크랙 코카인 남용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담았다. 죽음과 파멸을 상징하는 두개골이 한 손엔 크랙 파이프를, 다른 손엔 0달러 지폐를 들고 있으며, 해골 주변엔 중독자들로 아수라장을 이룬다. 마약 거래로 번 더러운 돈은 불태워진다. 상형문자 같은 형태들로 마약 중독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키스 해링 ‘자유 남아프리카 공화국’, 1985년,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항의 메시지
혐오와 편견을 녹이는 마법 같은 그림
키스 해링, '최고의 친구(Best Buddy)', 1990년
파란 하늘과 점선으로 표현된 땅을 배경으로 단순한 형태의 두 인물이 마주 보며 포옹하고 있는 모습이다. 인물들은 얼굴과 성별을 알 수 없도록 단순화된 형태다. 각각의 관람자가 특정한 사람을 상상하고 대입할 수 있는 개방성을 의도한 듯하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빛나는 광선은 친근한 감정으로 묶인 사랑과 우정을 표현한다. 성, 인종, 세대, 계급 간 대립과 충돌의 인간사회에 제안하는 희망적 메시지다. 키스 해링이 말하는 사랑은 세상의 모든 것으로 확장된 사랑이었다. 사랑을 아는 사람은 누구도 혐오하거나 배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예술가로 타고났고, 예술가로서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나는 가능한 한 오래 살면서 많은 사람을 위해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그림은 사람과 세상을 하나로 묶어줍니다. 그림은 마법처럼 존재하지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키스 해링은 미술을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 사용하려고 했다. 키스 해링만의 간결하고 독특한 도상들은 어떤 말보다 효과적으로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는 무거운 주제를 밝게, 그리고 쉽고 대중적인 이미지로 표현해 사랑을 받았다. 그는 이 사랑스러운 그림들이 사람들의 혐오와 편견을 녹이는 마법 같은 역할을 하기를 바랐다. 키스 해링의 삶은 너무나 짧았지만 그가 창조한 시각적 이미지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에 울림을 준다.
주
1) 그라피티(graffiti)란 락카, 스프레이, 페인트 등을 사용해 공공장소나 벽에 그림을 그리는 문화다. 1960대 후반 미국 뉴욕 거리에서 흑인들이 저항적 구호나 그림을 그리는 데서 시작되었는데, 인종차별, 환경오염, 반핵운동 등 현대사회의 여러 문제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2) 1950~60년대 미국의 동성애자들을 사회의 편견과 혐오에 노출돼 있었고 법적으로도 전혀 보호받지 못했다. 1969년, 경찰이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게이 바 스톤월 인(Stonewall Inn)을 경찰이 급습하자, 이에 동성애자 집단이 이에 맞서 데모를 일으킨 사건인 ‘스톤월 항쟁’을 기념하기 위해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 자, 트랜스젠더들이 모여 퀴어 퍼레이드(queer parade)를 하고 축제를 벌인다. 이 퍼레이드는 성소수자들이 자긍심을 높이고,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벌이는 행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