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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지 Oct 01. 2023

라파엘 전파의 전설적인 모델
엘리자베스 시달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뮤즈이자 예술가

[두 번째 이야기]



존 에버렛 밀레이, '오필리아', 1851-1852년



이 그림은 라파엘 전파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의 작품 '오필리아'다. 셰익스피어 극의 주인공 햄릿의 연인 오필리아의 비극적인 죽음을 소재로 한다. 아름답지만 실성한 처녀가 갖가지 야생화와 풀더미에 둘러 쌓인 채 물 위에 누워 노래를 부르고 있다. 오필리아의 모델은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 그 전설적인 아름다움으로 유명했던 엘리자베스 시달(Elizabeth Siddal)이다.


32세에 우울증과 약물 중독으로 요절한 그녀의 삶은 슬픈 오필리아의 운명적인 이야기와 매우 닮았다. 그녀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는 오늘날 기이하고 섬뜩한 신화로 전해져 오고 있다. 시달은 유명한 라파엘 전파의 지도자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etti)의 모델이자 아내였다. 현재는 로제티의 뮤즈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녀 자신도 당시엔 장래가 촉망받는 시인이었고 화가였다.



라파엘 전파 화가들의 슈퍼 모델


1848년, 영국 왕립 아카데미의 학생인 윌리엄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와 존 에버렛 밀레이는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etti)와 함께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를 결성한다. 라파엘 전파는 라파엘, 미켈란젤로 등의 전성기 르네상스의 고전주의를 답습한 영국 왕립아카데미의 고루하고 기교에 치우친 회화에 반기를 들고일어난 예술운동이다. 라파엘 이전의 중세와 초기 르네상스의 소박하고 단순한 양식으로 돌아가자는 기치 아래 선명한 색채와 극사실주의적인 묘사를 지향했다.


주제는 아름답고 시적이며 상징적 세계로, 주로 고대신화나 중세문학, 셰익스피어 문학에서 영감을 받았다. 신화의 인물들로 가득 찬 낭만의 세계는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화가들 모두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들은 이 세상이 18세기 산업혁명과 대영제국의 탐욕스러운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꿈과 환상을 잃어버렸고 도덕적으로도 타락했다고 생각했다. 화가들은 매혹적인 마법의 세계로 파고들었고, 예술가의 임무는 사람들에게 현실로부터 탈출구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워낙 충격적이고 다채로운 현대미술에 익숙한 관람자에게는 라파엘 전파가 전통적 미술로 보이겠지만, 당대엔 매우 급진적이고 파괴적이며 혁신적인 미학이었다. 라파엘 전파 화가들은 빅토리아 시대 고루한 영국 미술계의 악동들이었다. 그들은 관념이 아닌 자연에 눈길을 돌려 최대한 세밀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하고자 했다. 또한, 이상적인 고전 누드를 현실 세계의 강렬한 성적 매력이 있는 여성으로 대체하여 여성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1850년 겨울의 어느 날, 로세티는 윌리엄 홀먼 헌트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라파엘 전파 그룹의 다른 멤버인 월터 하웰 데베렐(Walter Howell Deverell)이 헐레벌떡 화실로 뛰어들어 와서는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가 엄청나게 아름다운 여성을 발견했어! 그녀는 키가 굉장히 크고 아름다운 몸매와 얼굴을 가졌어. 마치 위엄이 넘치는 여왕 같아!" 데베렐은 친구들에게 그녀의 회색 눈과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구릿빛 머리카락에 대해 감탄을 연발했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시달이었다.


그녀는 하얗게 빛나는 피부, 깊게 꺼진 눈꺼풀과 사색에 잠긴 듯한 차분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큰 키와 호리호리한 몸매, 각진 얼굴, 붉은색 머리카락을 지닌 시달은 빅토리아 시대의 미인 기준에 어긋나는 여성이었다. 특히, 붉은색 머리는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악, 마녀 등과 연관된 부정적 이미지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라파엘 전파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모두 시달의 독특한 외모에 매료되었다. 시달은 그들에게 여성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표준이 되었다. 붉은 머리의 시달을 그린 로제티의 그림을 포함해 그녀가 모델이 된 작품들이 성공을 거두자 아름다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 또한 서서히 바뀌었다. 서양 미술에서 그동안 이상화돼 온 여성의 미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전복한 것이다. 밀레이의 '오필리아'는 뜨거운 반응을 얻었고, 시달도 유명인사가 되었다. 화가들은 그녀를 그리려고 서로 경쟁했다. 


다음 작품은 로제티가 그린 엘리자베스 시달의 모습이다. 유령 같은 미묘한 분위기를 발산하는 이 초상화는 베아트리체를 잃은 슬픔에 대해 쓴 단테의 책 <새로운 삶(La Vita Nuova)>에서 영감을 받았다. '베아타 베아트릭스(Beata Beatrix)'는 '축복받은 베아트리체'라는 뜻이다. 로세티는 그림에서 단테의 이상적 연인 베아트리체를 2년 전 죽은 아내 시달의 모습으로 그렸다. 그녀의 붉은 머리는 영적 세계의 상징인 듯한 희미한 빛에 빛나고 있다. 불길한 느낌을 주는 빨간 비둘기는 그녀의 무릎에 노란색 꽃을 떨어트리는 죽음의 사자다. 지상에서 죽음의 세계로 건너가는 삶의 마지막 순간, 그녀는 눈을 감은 초월적인 표정으로 앉아 있다. 그녀는 왜 이렇게 음울한 형상으로  그려졌을까?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베아타 베아트릭스', 1864-1870년



로제티와의 불행한 관계, 그리고 끝으로 가는 시작


1849년, 로제티는 데버렐의 모델인 시달을 만났다. 그는 그녀에게 '리지(Lizzie)'라는 별명을 붙여주었고 곧 연인관계로 발전했다. 로제티는 질투심으로 인해 그녀를 독점했고 다른 화가의 모델로 활동하는 것을 막았다. 1851년, 혹은 1852년경 그들은 약혼했다. 그는 단순히 '엘리자베스 시달'이라고 제목을 붙인 연필 스케치를 했는데, 책을 읽거나 앉아서 휴식을 취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시달을 묘사했다. 그녀는 로세티 시의 뮤즈이기도 했다.


로제티는 명망 있는 이탈리아 귀족집안에서 태어났다. 로세티의 아버지 가브리엘레는 시인이자 민족주의 정치인이었다. 1821년, 부친의 혁명적 활동으인해 로제티의 가족은 조국을 떠나 영국으로 망명하여 런던에서 살게 되었다. 로세티는 노동자 계급 집안 출신인 시달을 자신의 가족에게 소개하는 것을 꺼려했다. 누이들은 그녀를 무척 싫어했다. 시달과 로세티의 관계는 10년 동안 약혼 상태로 지속되었지만, 로세티는 결혼을 할 생각이 없었다. 가족이 그들의 관계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결혼에 대한 혐오감까지 있었던 로제티는 그녀와의 혼인을 계속 연기했다. 뿐만 아니라 로제티는 계속 다른 여성들과 관계를 가졌다. 시달은 우울증에 빠져 약물에 중독되고 건강이 몹시 악화됐다. 1860년 봄, 그녀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죄책감을 느낀 로세티는 그제야 시달과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시달과 로세티는 그해 헤이스팅스 해변 마을의 성 클레멘트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시달은 어린 시절부터 매우 병약했다. 아버지로부터의 유전질환을 이어받아 결핵과 장 질환을 앓았고, 거식증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신경통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고 통증을 줄이기 위해  '로더넘(Laudanum)'이란 약물을 복용해야 했다. 로더넘은 알코올과 아편을 섞어 만든 것으로 당시 만병통치약으로 통했다. 어쨌든, 시달은 임신을 했고 짧은 순간이나마 행복하고 건강해 보였다. 시달은 임신에 대해 매우 기뻐했지만 로더넘에 중독되어 있었고, 아마도 1861년 딸을 사산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아기가 죽은 후 깊은 우울증이 그녀를 덮쳤다. 게다가 소문난 바람둥이였던 로제티의 여자관계로 인해 결혼생활은 더욱 고통스러웠다.


1862년 2월 10일 저녁, 그녀와 로세티는 시인 친구 알제논 찰스 스윈번과 함께 근처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시달을 집에 데려다준 후, 로제티가 '워킹맨스 칼리지(Working Men's College)'에서 야간 강의를 하고 돌아와 보니 그녀는 약물에 중독돼 의식이 없었다. 의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리지 시달은 1862년 2월 11일 새벽에 3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불과 2년 만에 끝났다. 검시관은 실수로 약물을 과다 복용한 것으로 결론 내렸지만, 약간의 지적 장애가 있는 그녀의 오빠에 대해 로제티에게 "해리를 돌봐주세요"라는 말을 쓴 유서가 있었다는 사실로 보아 자살로 추정된다. 슬픔과 가책에 사로잡힌 로제티는 자신의 시를 그녀에게 헌정하기 위해 관 속에 넣었다. 아내가 사망한 지 몇 년 후, 로제티는 불면증을 치료하기 위해 술과 수면제를 취하기 시작했다.


시달의 이야기는 그녀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죽은 후에도 사라지지 않은 슈퍼모델의 아름다움에 대한 신화는 오늘날까지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매혹적인 이야기로 남아 있다. 1869년, 로제티는 시집을 출간하기 위해 죽은 아내의 관 안에 두었던 시를 다시 꺼내려고 했다. 그는 친구 찰스 하웰에게 그녀의 관을 열어 머리 옆에 두었던 자신의 시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하웰로부터 그녀의 윤기 나는 풍성한 구릿빛 머리카락이 계속 길어 온몸을 덮었고 시신이 전혀 썩지 않은 채 마치 살아있을 때처럼 아름답게 보존돼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 충격적인 소식에, 새로운 연인 제인 모리스에게서 정신적 안정을 찾았던 로제티는 다시 신경쇠약증과 알코올 중독, 우울증에 빠진다. 그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고, 끝내 1882년 신장 질환으로 사망한다.



로제티, '자화상', 1847년(왼쪽)/ 로제티, 로제티, '레지나 코르디움', 1860년(오른쪽)




그녀는 재능 있는 시인이자 화가였다


로제티의 뮤즈로만 초점이 맞춰진 채, 시달이 한때 라파엘 전파의 중요한 화가였다는 사실은 미술사에서 묻혀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라파엘 전파 화가들의 인기 있는 전문 모델인 동시에 그 자신도 혁신적인 예술가였다.


젊은 시절, 런던 시내의 모자 가게에서 일하던 시달은 월터 하웰 데베렐의 눈에 띄어 화가의 모델 일을 시작했고, 1850년 마침내 로세티 앞에 모델로 섰다. 빅토리아 시대의 모델이란 화가에게 매춘을 한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짙었기 때문에 평범한 여성에게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어쨌든 1853년부터 시달은 예술가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로제티의 모델이 된 시달은 그에게 그림 그리는 법을 배웠다. 그녀의 실력은 빠르게 성장했다. 당시 영국의 저명한 미술비평가인 존 러스킨(John Ruskin)은 이때 시달의 작품을 보고 그녀가 천재라고 말했다. 심지어, 로세티보다 더 나은 예술가라고 평가했다.


그녀는 자신이 제작한 예술품의 소유권에 대한 대가로, 권위 있는 평론가 러스킨으로부터 연봉 후원을 받았다. 1855년부터 1857년까지 러스킨은 시달이 작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후원금을 제공했고, 그녀가 제작한 모든 드로잉과 그림에 연간 150파운드를 지불했다. 그녀는 이때 유화뿐만 아니라 많은 스케치, 드로잉, 수채화를 제작했다.


로제티 역시 친구인 포드 매독스 브라운(Ford Madox Brown)에게 시달의 재능과 풍부한 창의성이 자신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시달은 아마도 로제티에게 많은 예술적 영감을 듯하다. 로제티는 같은 주제로 그림을 그릴 때 종종 그녀를 모방했으며, 시달의 사후 그녀의 작품 디자인들을 갖다 쓰기도 했기 때문이다. 


'샬롯의 여인'은 시달의 최초의 작품 중 하나다. 미술학교에서 훈련받지 않은 그녀의 데생 실력은 서툴렀지만, 이것이 바로 전통적인 기술 훈련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순수한 예술을 지향했던 라파엘 전파 화가들시도한 바로 그것이었다.


 엘리자베스 시달, '샬롯의 여인', 1853년, 펜, 잉크, 연필



「샬롯의 숙녀」(The Lady of Shalott)는 19세기 영국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Lord Tennyson)의 아름다운 시다. 존 윌리엄 워터 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를 비롯한 여러 라파엘 전파 예술가들이 즐겨 사용한 모티프였다. 중세 샬롯성 영주의 딸 일레인은 바깥세상을 보면 죽는다는 저주를 받아 탑에 갇혀 지낸다. 온종일 실내에 갇힌 그녀는 직물을 짜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거울을 통해서만 바깥세상을 본다. 그러던 어느 날, 말을 타고 창밖을 지나가는 원탁의 기사 랜슬롯을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진 그녀는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를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나룻배에 몸을 싣는다. 이는 그녀의 파멸,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 거울에 비친 랜슬롯은 자신에게 끊임없이 사랑의 고통을 안겨준 로제티가 아니었을까? 시달은 아마도 샬롯의 여인의 비극적인 이야기에 깊이 공감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시달, '레이디 클레어', 1857년, 수채화



그녀의 작품엔 기묘하고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 마음을 끄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레이디 클레어」(Lady Clare) 역시 테니슨의 낭만적인 시다. 레이디 클레어와 그녀의 약혼자인 롤랜드 경의 이야기다. 레이디 클레어의 유모가 자신이 그녀의 친모라는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클레어는 이제껏 그녀의 삶이 거짓이었으며 자신의 신분과 재산에 대해서도 권리가 없음을 깨닫는다. 또, 불행하게도 그녀의 약혼자 롤랜드 경과 더 이상 같은 귀족 계층 신분이 아니라는 것도 인지하게 된다. 그녀는 사랑을 잃을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롤랜드 경에게 진실을 말할 것을 결심한다. 친모는 클레어에게 이를 비밀로 간직하라고 애원한다. 그림은 클레어에게 간청하며 매달리는 친모를 뿌리치고 윤리와 양심에 따라 행동하려는 단호한 클레어의 모습을 묘사한다. 이 작품에서 보다시피, 시달은 늘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과 풍부한 색채, 중세적인 낭만과 정서를 가진 작품을 제작했다.


엘리자베스 시달, '유령의 숲', 1856년, 종이, 구아슈



한 비평가는 '유령의 숲'(The Haunted Wood)에 대해 블레이크의 섬뜩한 그림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긴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여성이 나무 기둥 사이의 유령 같은 인물에게 손을 뻗고 있다. 이 작품의 평면적 구성은 중세 필사본 삽화의 영향을 보여준다. 인물의 어색하고 각진 팔다리는 나뭇가지와 평행을 이루고 있다. 미묘한 색상과 형태로 그려진 어두운 숲 속의 여성들은 수수께끼 같다. 그림은 당시의 다른 예술가들이 아카데믹한 훈련에 대한 반발로 추구했던 '나이브(naive)'한 미학의 특성을 보여주며, 로세티의 후기 수채화와 드로잉 영감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


예술에 대한 교육이나 경험이 없는 엘리자베스 시달은 로세티에게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곧 자신만의 개성을 가진 독자적인 스타일을 개발했다. 시달은 로제티와 마찬가지로, 아서왕의 전설과 테니슨의 시를 포함한 중세 주제에 끌렸다. 그녀는 중세 필사본과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연구하면서, 독창적이고 풍부한 표현력을 발전시켰다. 붓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예술가로서 가시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아카데믹한 미술적 훈련을 받은 동료 화가들의 질투와 부러움을 샀다. 한편, 고루하고 아카데믹한 관습을 깨뜨리려고 한 로세티는 그녀의 순수하고 창의적인 스타일에서 영감을 받았고 자신의 예술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두 사람의 협업은 결실이 풍부했고 상호 호혜적이었다.


엘리자베스 시달, '성 아그네스 축일 전야', 1853-1860년, 수채화



'성 아그네스 축일 전야(St Agnes' Eve)'는 시달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테니슨의 시를 기반으로 한다. 순결의 수호성인인 성 아그네스 축일에 한 수녀가 무릎을 꿇고 창밖의 먼 구름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다.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그리스도와 교회, 수녀, 성도는 영적 부부관계로 맺어진다. 결혼 대신 교회에 헌신 서약을 한 그녀는 리스도의 신부이다. 그림은 그녀가 교회의 신랑인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간절히 기다리고 모습을 보여준다.


엘리자베스 시달, '음악을 듣는 연인들', 1854년



전경에 한 소녀와 젊은이가 앉아 있고 옆에는 아이가 서 있다. 그들 앞에 이집트인 또는 인도인으로 다양하게 해석되는 두 명의 여성이 무릎을 꿇고 있다. 이 그림은 해부학적으로 서툴고 어색한 인물 묘사, 강한 윤곽선, 불확실한 원근법 및 중세 의상 등 초기 라파엘 전파 양식으로 그려졌다. 수수께끼 같은 인물은 시나 성경 속 이야기가 아니라 시달의 독창적인 상상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 시달, 서기 손더스, 1857년, 수채화



시달이 그림을 그린 기간은 몇 년 되지 않는다. 이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수백 점의 독창적인 예술 작품을 제작했고, 빅토리아 시대 아방가르드 미술계에서 예술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녀는 1857년, 런던 피츠로이 스퀘어(Fitzroy Square)의 러셀 플레이스(Russell Place) 4번가에서 열린 첫 번째 라파엘 전파 전시회에서 자신의 작품을 전시한 유일한 여성 예술가였다. 전시회에 대해 쓴 런던의 신문은 시달의 이름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녀의 그림은 로제티 스타일을 추종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 그녀의 그림 한 점이 미국의 영향력 있는 미술품 콜렉터 찰스 엘리엇 노턴(Charles  Eliot Norton)에 의해 구입되었다.

 

그가 구입한 '서기 손더스(Clerk Saunders)'는 사망한 연인 손더스가 여주인공 마가렛을  찾아오는 오래된 스코틀랜드 민요의 한 장면을 그린 것이다. 벽을 통과하여 마가렛의 방에 들어온 손더스의 유령이 그녀에게 사랑을 표현한다. 창백한 두 인물은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평면적 구성, 중세 모티프, 생생한 색상은 모두 라파엘 전파 양식의 특징이다. 엘리자베스 시달은 라파엘 전파 운동에 적잖은 미학적 공헌을 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엘리자베스 시달, '기사의 창에 페넌트를 부착하는 여인', 1856년, 종이에 수채화



로제티의 '일곱 개의 탑의 선율'(1857)과 시달의 '기사의 창에 페넌트를 부착하는 여인'(1856) 같은 작품을 비교해 보면, 색채와 인물의 구성이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디어의 일부는 종종 로제티가 아니라 시달의 것이었다.


로제티, '일곱 개의 탑의 선율', 1857년, 종이에 수채화



짧고 비극적인 생애였지만, 라파엘 전파 예술가로서의 그녀의 존재는 미술사가들에 의해 점점 더 인정받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시달의 예술적 독창성과 영향력을 보여주는 스케치, 드로잉 및 수채화 그림이 잘 보존돼 있다.


또한, 엘리자베스 시달은 1852년부터 1861년까지 시인으로 활동하며 100편 이상의 시를 썼다. 생전에 출판되지 않은 그녀의 시는 주로 어두운 주제, 잃어버린 사랑 또는 진정한 사랑의 불가능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비평가 윌리엄 건트(William Gaunt)는 "그녀의 시구는 고대 발라드처럼 단순하고 감동적이며, 그녀의 그림은 최고의 라파엘 전파 작품만큼이나 진정한 중세 정신을 보여준다."라고 평가한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는 미술사에 빛나는 걸출한 화가였다. 그러나 자신만을 사랑하고 헌신했던 또 다른 재능 있는 예술가 엘리자베스 시달의 생을 너무나 빨리 소진케 한 사람이기도 하다. 시달이 병약한 여성이긴 했으나 10년간의 기다림, 로제티의 끊임없는 외도는 그녀를 약물 중독과 깊은 우울증의 나락으로 몰아넣은 주요 원인이었다. 이 때문에 로제티 자신도 그녀의 사후 20년간이나 자책 속에서 살다가 생을 마쳤다. 미술사에서는 종종 연인, 아내, 가족, 친구 등 주변 인물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삶을 빼앗은 위대한 예술가들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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