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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지 Sep 23. 2023

보테로의 '뚱뚱한' 모나리자

 고단한 삶의 오아시스 같은 기쁨의 예술

[그림의 발견]이라는 새 매거진에서 미술 거장들의 삶과 작품, 그리고 그림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재미있고 유익한 미술 보따리를 풀어보겠습니다. 많이 읽어 주세요~~ (^_^)


[첫 번째 이야기]



2023년 9월 15일, 초현실적인 과체중의 인물을 묘사한 조각과 그림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콜롬비아 예술가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가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20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화가이자 조각가 중 한 명이다. 보테로의 독특한 조형 양식은 미술사에 지울 수 없는 한 획을 그었다. 그는 세계적인 주요 도시에서 50회 이상의 전시회를 열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았고, 작품들은 수백만 달러의 판매가를 기록했으며  현재 전 세계의 미술관과 공공장소에 전시되어 있다.


보테로는 유명한 예술작품들을 독자적인 스타일로 오마주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의 '라스 메니나스',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의 '아르놀피니 부부 초상화' 등의 고전 작품을 변형한 그림이 그것이다. 옛 거장들의 그림을 하게 '뚱뚱한' 형태로 부풀려 왜곡한 보테르의 작품은 풍자 코미디나 패러디처럼 보인다. 동시에, 인물에 대한 친근감, 혹은 어딘가 모르게 애정이 깃들어 있는 유머 감각이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은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고 유쾌하다. 그중 가장 유명한 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의 '모나리자'를 패러디한 비만 모나리자 버전이다.



보테로, '라 메니나', 1982년(왼쪽) / 보테로, 아르놀피니 부부 초상, 1997년(오른쪽)



'보테리스모(Boterismo)' 스타일로 그린  '뚱뚱한 모나리자'


모나리자를 변형시킨 최초의 사람 중 한 명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다. 그는 모나리자가 인쇄된 엽서 위에 연필로 콧수염과 턱수염을 그려 넣고 'L.H.O.O.Q.'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글자는 일종의 말장난으로, '그녀의 엉덩이는 뜨겁다', 즉 성적으로 흥분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콧수염 있는 자신의 얼굴과 모나리자를 합성한 달리(Salvador Dali)의 포토몽타주 '자화상 모나리자'가 뒤샹의 'L.H.O.O.Q.'에서 영감을 받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들 작품은 우아하고 여성적인 모나리자에 대한 신랄하면서도 유머러스한 공격이다. 이후, 모나리자 패러디는 앤디 워홀의 실크스크린 '채색된 모나리자', 보테로의 동글동글 살찐 '모나리자'로 이어진다.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는 시대를 초월해, 수많은 오마주와 패러디의 원천이 되고 있다.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모나리자를 기발한 형태들로  재생산하고 있다. 보테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는 너무 유명해서 더 이상 예술이 아닐지도 모른다. 영화배우나 축구선수 같은 셀럽에 가깝다."



마르셀 뒤샹, 'L.H.O.O.Q.', 1919년(왼쪽) / 살바도르 달리, '자화상 모나리자', 1973년(오른쪽)

                                    


보테로의 시그니처 스타일은 '보테리스모(Boterismo)'로 잘 알려져 있다. 2014년, 스페인의 언론사 엘 문도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뚱뚱한 여성을 그리지 않았다.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지만 사실이다. 나는 볼륨과 관능적인 형태에 관심이 있다. 여자, 남자, 개, 말을 그릴 때 항상 볼륨감을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예술가는 이유도 모른 채 직관적으로 어떤 형태에 끌린다"라고 했다. 보테로는 직관적인 미감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독자적인 색상, 형태 및 비율을 창조해 낸 것이다.


처음부터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보테로는 어린 소녀 모나리자에서 성인 모나리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모나리자 시리즈를 제작했다.



페르난도 보테로, '12세의 모나리자', 1959년



1959년, 보테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수께끼 같은 모나리자를 어리고 통통한 소녀의 모습으로 재현했다. 보테로의 첫 번째 모나리자 버전이다. 검고 칙칙한 드레스의 성인 모나리자를 분홍색 리본으로 머리를 장식하고 밝은 줄무늬 드레스를 입은 아이로 변형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어린아이다운 차림새에도 불구하고, 나란히 모은 두 손, 특유의 눈매, 알 듯 말 듯 신비로운 미소에서 여전히 레오나르도 원작의 흔적이 엿보인다.


처음에 보테로는 모나리자가 아니라 콜롬비아 소녀의 초상화를 그리려고 했다. 어느 날, 청소부 아주머니가 그림을 보고 모나리자처럼 보인다고 말하자 보테로는 미소를 지으며 작품의 제목을 모나리자라고 지어버렸다. 통통한 뺨과 순진하고 귀여운 얼굴을 한 어린 시절의 모나리자를 묘사한 셈이 된 것이다. 1959년 이후, 그는 계속해서 모나리자 버전을 몇 점 더 제작했다.



보테로, ' 모나리자', 1959년(왼쪽) / 보테로, '아홉 살의 모나리자', 1960년경(오른쪽)



보테로의 모나리자 그림은 그의 작품에서 특히 중요하다. '12세의 모나리자'(1959)는 1961년, 우연히 뉴욕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큐레이터인 도로시 밀러의 눈에 띄어 MoMA에 팔렸다. 그녀는 현대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명이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당시 미술사조를 지배했던 추상표현주의 양식과 완전히 대조적인, 고전에 영감을 둔 구상미술 모드였기 때문에 평론가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다. 보테로의 품에 대한 계속되는 논란은 오히려 의 경력과 명성에 도움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그를 국제적인 화가로 만드는 전환점이 되었다.



페르난도 보테로, '모나리자', 1978년



모나리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자 최고의 가치를 지닌 명화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수수께끼 같은 미소, 수학적 율과 균형, 완벽한 조화 등이 '모나리자'를 분석하고 설명할 때 붙는 수식어들이다. 그런데 보테로는 모나리자를 과도하게 부풀린 자신의 스타일로 변형시키는 위험을 감수했다. 그 결과는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섬세하고 우아한 모나리자와는 거리가 먼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다. 그럼에도, 작고 통통한 20세기 모나리자의 친절한 눈매는 깊은 평온함과 부드러움, 푸근함을 발산하고 있다. 그림의 뒷배경으로는 밝고 생생한 녹색의 산이 길게 펼쳐져 있다. 주변 풍경 또한 모나리자에서 엿보이는 안정감과 조응하여 모종의 이완감과 평화로움을 느끼게 한다.



보테로 작품의 미학적 배경


1932년, 콜롬비아 메데진에서 태어난 보테로는 유럽의 여러 도시를 다니며 전통 회화를 연구하면서 다년간 아카데믹한 기술을 연마했다. 1952년, 그는 스페인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미술학교(Academia de San Fernando)에서 공부했다. 이때,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 특히 당시 그의 우상이었던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cisco de Goya)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모사해 관광객들에게 판매하면서 생계를 꾸렸다. 1953년엔, 파리로 이주하여 루브르 박물관에서 거장들의 그림을 연구했고, 이 피렌체로 이주해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을 모사하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1960년, 뉴욕으로 이주하고 나서  그의 전형적 양식인 통통하고 동글동글한 형태를 개발해 냈다.


한편, 그의 작품은 그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오기 이전의 지역 토착민들의 미술 양식과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와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José Clemente Orozco), 다비드 시케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 등이 이끈  멕시코 벽화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920년대, 리베라, 오로스코, 시케이로스가 주축이 되어 멕시코의 고유한 고대 문화와 민중 예술의 전통에 입각한 새로운 미술운동을 벌였다. 그들은 우선적으로, 공공건물에 벽화 그리는 일을 시작했다. 멕시코의 신화와 전설, 역사적인 사건과 민중의 생활에서 소재를 취한 기념비적인 그림을 통해 대중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가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보테로에게 대규모 공공 작품에 대한 동기를 부여했고, 볼륨을 다루는 방법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토착민의 삶과 정서를 묘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했다. 보테로는 국제적인 예술가였지만, 늘 그의 예술이 콜롬비아에 뿌리를 두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특히 리베라의 작고 통통한 인물들은 보테로의 조형적 작업에 깊은 영감을 준다.


당시 미국은 추상표현주의, 팝아트 등 미국적 회화가 대세였고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마크 로스코(Mark Rothko), 앤디 워홀(Andy Warhol) 등이 미술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보테로의 구상 작품은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미국 비평가들은 이 콜롬비아 출신 화가에 대해 문화적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작품에 냉소적이었다. 너무 대중적으로 보이는 미술을 경멸하는 엘리트주의였다. 그러나 대중은 달랐다. 사람들은 풍선처럼 부푼 몸을 가진 남녀와 동물에서 유머와 해학, 편안함을 느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 함께 춤추고 먹고 마시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보테로의 그림은 대중에게 쉽게 다가갔고 인기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난해한 현대 미술에 대해 겁을 먹고 있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테로의 작품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1990년대, 보테로는 납치, 학살 및 차량 폭탄 테러에 관련된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 폭력을 다루는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면서 보다 사회 및 정치 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보테로는 자신의 조국 콜롬비아에는 두 얼굴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그가 항상 그리는 유쾌하고 친절한 보통 사람들의 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마약 카르텔과 정치적 폭력과 같은 끔찍한  얼굴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알았던 따뜻하고 정감 넘치는 콜롬비아가 아니다. 이것은 더 폭력적이고 더 현실적인 콜롬비아다. 이는 우리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이라크의 아부 그라이브(Abu Ghraib) 교도소에서 미군이 이라크 수감자들을 고문한 사건이 밝혀진 후, 보테로는 이 인권 침해 스캔들에 대한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2004년, 목줄에 묶인 죄수, 피라미드 모양 켜켜이 쌓인 시체, 십자가에 못 박힌 자세로 서 있는 죄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잔혹한 방법의 고문을 찍은 사진이 폭로됐을 때 전 세계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다.


그는 작품을 통해 현실을 바꾸려는 게 아니라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여 사람들에게 기억하고 생각하게 하고 싶다고 했다.  보테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예술이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내 그림들이 무언가를 고칠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예술가로서 내 나라와 나의 시대에 대한 증언을 남기고자 할 뿐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사회의 광기를 보여주며,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무엇인가를 변화시키려고 예술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아시스, 삶의 고단함에서 피난처가 되는 미술


보테로의 명성은 그의 독특하고 일관된 '보테리스모' 스타일에서 비롯되었다. 비만을 혐오하는 시대엔 단순히 '뚱뚱한' 것으로 여겨지는 그의 인물은 어찌 보면 관능적일 수도 있다. 보테로의 인물들은 지나치게 통통한 여성의 몸에 탐닉한 루벤스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루벤스는 육체적 쇠약이 영적인 취약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비만해 보이는 누드를 통해 육체적 아름다움, 건강함, 관능과 욕망, 다산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의 이런 화풍은 '루베니스크(Rubenesque)', 또는 '루벤시안(Rubensian)'이라고 불리게 된다. '루베니스크'와 '보테리스모'는 어떻게 다를까? 보테로는 풍만한 관능미를 넘어서서 유머러스한 볼륨, 천진한 장난스러움을 추구한다.


많은 현대인이 과체중, 비만으로 고통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간이 몸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예술은 비만에 대한 개인과 사회의 생각의 변화를 보여준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비만은 종종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상층 엘리트 계층의 상징과도 같았다. 이제 루벤스적인 풍만함은 현대사회에서는 '건강하지 못함'의 동의어다. 그러나 과도하게 마른 체형에 대한 집착과 신체에 대한 사회적 기준에 압박을 받는 현대인이 과연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것일까? 건전한 몸은 보테로의 이상과 현대건강 상식의 중간 그 어디쯤에 있을 것 같다.


보테로는 자신을 '가장 콜롬비아 예술가'라고 자처한다. 그는  콜롬비아 역사와 문화, 민중의 삶을 그리려고 했다. 종종 어둡고 무거운 주제도 있었지만, 보테로는 여전히 통통한 고양이, 서커스 광대, 춤추는 연인과 같은 단순한 기쁨의 순간을 묘사하는 그림을 주로 그렸다. 그는 예술이 "오아시스, 삶의 고단함에서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라고 믿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확실히 재미있고 유쾌하며 휴식을 주는 어떤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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