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슬픔에게 안녕할 때까지
내겐 조금 이상한 습관이 하나 있다. 가슴 아픈 일이나 화가 나는 일을 겪으면 당황한 나머지 그저 그 상황이 어서 지나기만을 기다렸다가 집에 돌아와 웃어버리는 것이다.
샤워기가 물방울 커튼으로 몸을 숨겨주면 피식하고 불 꺼진 방 안에 이불이 몸을 가려주면 또 피식한다. 오늘 하루의, 혹은 지난날들의 슬픔이나 아픔을 웃어넘긴다. 쿨하게 말이다.
나는 각종 불편과 아픔을 참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 지금의 허벅지 정도 오는 키를 가졌을 땐 동네 미용실에 가면 머리를 깎아주는 분들이 날 보고 아주 잘 참는다는 칭찬을 했다고 한다.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난 항상 참는 쪽이었다. 참는 일에도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억울하다. 하지만 세상살이 대부분 잘 참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들 덕분인지 참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후자의 사람들을 보며 부러운 마음을 몰래 가지고 있었다.
세상에는 참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참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서로 역할을 바꾸는 경우는 거의 없다. 불공평한 일이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몸 구석구석에 슬픔과 외로움과 아픔과 질투를 가득 쌓아놓고 아무 탈 없다는 웃음을 짓고 있는 순간은 마치 알약을 리듬감 있게 삼키지 못해 입안에서 녹아버린 것처럼 쓰다. 가장 안타까운 건 타인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했던 이런 성격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갈등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가족과 연인, 절친한 사이에서는 내가 잘 웃어넘기고 속앓이를 한다는 걸 결국 알게 된다. 그걸 들킨 순간 나는 '더 특별한 배려가 필요한 대상'이 되어버린다. 그때부터 겉만 보고 속단해선 안 되는 존재가 되어버린 나는 더 적극적으로 쿨(?)하게 웃어넘기기 시작한다.
지난해 유독 슬펐던 일이 많았다. 그만큼 웃어버린 날들도 많았을 거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웃어버린 것들에는 제대로 안녕하지 못한다. 말은 적은데 탈이 많았기 때문이다. 편하지도 정답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아버린 모든 슬픔과 아픔에게 이제 웃어버리지 않고 작별을 고하려고 한다. 그러면 언젠가 안녕할 수 있겠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