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지아? 조지아?
11시 10분, 밤새 달려온 기차는 조지아의 수도인 트빌리시 기차역에 지친 몸을 풀었다. 한 나라의 수도에 위치한 기차역인데도 소도시의 평범한 역같이 번잡스럽지도 않고, 규모가 크지도 않았다. 제일 급선무는 환전을 하는 것이다. 기차 안에서는 물 사정이 좋지 않고, 화장실도 좁고 불편해서 제대로 씻을 수가 없었다. 대충 세수라도 하려면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이곳에서는 화장실 사용료를 받기 때문에 잔돈이 필요했다. 푼돈 몇 푼이지만 일일이 잔돈을 챙겨야 하는 성가심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아르메니아 예레반행 기차표까지 예매를 하고, 택시 두 대에 나눠 타고 숙소로 향했다. 시내 중심가인 ‘자유 광장’ 근처에 있는 숙소(City Hotel)는 아담하고 깨끗했다. 체크인을 하고 방에 가서 짐을 풀고 샤워도 했다. 13시 20분에 다시 만나 점심 식사를 하러 ‘자유 광장’으로 나왔다.
조지아는 면적이 77,000㎢ 정도이고, 인구는 496만 명 정도인 코카서스 지방 남부이자 흑해의 동안에 위치한 자그마한 공화국이다. 1991년에 소비에트 연방에서 독립했다. 그래서 러시아어를 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공용어는 조지아어이다. 화폐 단위는 라리(GEL)인데, 1라리는 한국 돈으로 430원 정도다. 국토의 2/3가 산이며, 흑해에 면한 서부는 습윤한 아열대 기후를 보이고, 동부는 건조한 스텝 기후다. 날씨는 대체로 한국과 비슷했다. 동부에서는 목축, 서부에서는 포도, 레몬, 담배, 올리브 재배와 양잠이 성하다. 석탄, 원유 등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중공업도 상당히 발달한 편이다.
조지아에는 ‘압하지아’라는 자치국과 ‘남오세티야’라는 자치주가 있다. 2008년 남오세티야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분쟁을 겪은 이후 당시 대통령인 사카슈빌리가 ‘그루지아’라는 국명을 ‘조지아’로 바꿨다.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가까스로 재선 된 사카슈빌리에게 부정선거 의혹이 쏟아졌고, 곤경에 빠진 사카슈빌리가 찾은 돌파구가 전쟁이었다. 2008년 사카슈빌리는 러시아를 상대로 도발하다시피 한 남오세티야 전쟁에서 대패했다. 항구 도시 포티를 비롯해 고리, 세나키, 주그디디 등의 도시가 잠시나마 러시아군에 점령되었고, 트빌리시는 공습까지 받았다. 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헤아릴 수 없는 전쟁 난민이 발생했다. 같은 해에 조지아는 독립국가연합(CIS)을 탈퇴했다. 대부분의 나라가 개칭된 ‘조지아’보다는 ‘그루지아’라는 옛 국명을 사용했는데, 무슨 영문인지 ‘조지아’라는 명칭을 가장 먼저 사용한 나라는 한국이었다. 한국은 2011년부터 ‘그루지아’를 버리고 ‘조지아’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조지아인들은 자기 나라를 ‘그루지아’도 아니고 ‘조지아’도 아닌 ‘사카르트벨로’라고 부른다.
조지아는 러시아의 대문호들이 문학적인 상상력을 펼친 곳으로도 유명하다. 1829년에는 푸시킨(1799~1837)이 이곳을 방문했었고, 젊은 시절,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오가며 도박으로 방탕한 세월을 보내던 톨스토이(1828~1910)가 막대한 부채를 짊어진 후인 1851년에 도망치다시피 향한 곳도 코카서스였다. 이곳에서 톨스토이는 코카서스 주둔군에 자원했고 4년 동안 복무했다. 그의 여러 초기작은 그 시기에 쓰였거나 그 시기를 소재로 했다. 소설 『어머니』로 유명한 막심 고리키(1868~1936)도 트빌리시 철도 기지창에서 페인트공으로 일하면서, 트빌리시의 일간지 『캅카스』에 그의 처녀작인 단편 「마카르 추드라」를 발표했다. 이때 쓴 필명이 ‘비통한 자’라는 의미의 ‘고리키’였다.
월북 작가인 소설가 이태준(1904~1970)도 1947년 러시아 여행길에 조지아를 방문했다. 그 결과물인 『소련 기행』은 당시 남북한 모두에서 널리 읽혔다고 전해진다. 이태준은 러시아를 여행하는 동안 만나는 사람들마다 소설가이면서 1928년 소련으로 망명한 포석 조명희(1894~1938)의 행방을 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끝내 소재를 찾지 못했다. 조명희는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인 1937년에 체포되었고, 1938년 인민의 적이란 오명을 쓰고 총살된 것을 이태준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숙소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여행자들의 거리에 인접해 있는 ‘자유 광장’은 구시가지의 중심에 해당한다. 19세기 초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자유 광장’의 첫 이름은 ‘예레반 광장’이었다. 이곳은 한 무리의 은행 강도들 때문에 일약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남코카서스 지역이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인 1907년 어느 날, 무장 경비원과 돈을 실은 마차가 러시아 제국 은행 티플리스 지점을 떠나 우체국으로 향할 때, 총성과 수류탄의 굉음과 포연 속에서 그 돈을 탈취한 자들이 있었으니, 스탈린의 동지였던 카모 일행이었다. 그 들이 탈취한 돈은 자그마치 31만 루블, 지금으로 따지만 대략 350만 달러쯤 된다. 이 돈은 스탈린과 카모에 의해 핀란드에 있던 레닌에게 전달되어 혁명 자금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광장의 중앙에 세워졌던 레닌 상은 1991년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2006년 완공된 자유탑이 세워져 있다. 대리석 탑 위에 말을 탄 채 광장을 내려 보고 있는 성 조지 상은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낮의 햇빛을 받아 금빛을 발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