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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우영 Oct 11. 2022

한 방향을 바라보는 출발점에 서서

[숲세권 아파트 설계의 기록 마지막 편]

내게 건축은 무엇인가? 숱하게 실패하며 ‘좋은 건축물’을 만들자고 끊임없이 제안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수익률에만 집중하면 서로 편하게 일할 수 있는데 어려운 길을 늘 제안하고 실패해도 또 제안한다. 이번 숲세권 설계 프로젝트도 그중에 하나였다.

 

숱하게 실패해 왔다면 실패한 모든 프로젝트에는 반드시 공통된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도모하고 있다면 거기에도 공통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바둑을 복기하듯 왔던 길을 되돌아 가보기


숲세권 아파트 설계의 기록 3편을 마치고 몇몇 프로젝트의 과정을 곱씹어 보았다. 3편에서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내기 전에는 다음으로 갈 수 없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오랫동안 미루어 왔던 중요한 질문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실패를 반복해도 왜 끊임없이 좋은 건축물을 위한 제안을 계속하고 있는가? 실패 사례들을 되짚는 것은 유쾌하지 않은 과정이지만 생각의 끝에 답이 있으리라.


바둑을 복기해 보면 알 수 있다. 어느 순간 “아!” 하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다시 바둑을 둬도 그 장면은 쉽게 돌이켜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상대와의 수가 차곡차곡 쌓였으니 한 수를 무른다고 해서 판이 바뀌지는 않는다. 실패를 거듭한 그간의 프로젝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음 일을 의뢰받고 현장을 답사하면 모든 프로젝트는 새롭게 다가온다. 모든 땅이 다르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땅과 처음 마주했을 때의 두근거림은 언제나 새롭다. 이때 나의, 건축가로서의 생각은 이 일을 바라보는 건축주의 생각을 크게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주어진 땅의 문제를 해결하고 어떻게 하면 좋은 건물을 만들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직진한다. ‘좋은 건물’을 만들자는 데에 누구도 이의가 있지 않을 거라는 단순한 생각이다.


현장을 답사하고 나면 계약이나 일정의 조율도 없이 땅의 문제에 집중하고 그 결과물을 건축주에게 제안하게 된다. 스케치 안을 들고 건축주와 마주하게 될 때, 이때 거의 모든 장면은 비슷하다.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앞으로의 이 프로젝트가 대단한 일을 해낼 것 같은 장면, 나와 건축주 사이의 믿음이 생기게 되는 그런 장면이 있다. 어쩌면 일을 바라보는 서로의 목표가, 목적이 다르다는 것을 잠시 잊은 것이다.


각자가 자기 방향만 바라보는 팀 프로젝트


그런데 생각해보면 숱한 실패의 이유는 프로젝트에 대한 서로의 생각이 다른 데서 기인한다. 건축주는 설득과 감동으로 시작했던 건축사의 제안을 어느 순간부터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직접적인 비용이 발생하기 시작하고 각 파트너들의 이해관계가 현실이 되면서, ‘다른 안이 더 나은 거 아닌가? 사업의 수익에 이게 최선인가?’ 하는 생각이 지배하기 시작한다. 여기가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거나 프로젝트가 여지없이 먼 길을 돌아갈 준비를 시작하는 지점이다.


토지 매입부터 분양까지 프로젝트 킥오프와 동시에 째깍째깍 대출이자 납입이 시작된다.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고 투입 비용을 최소화해야 하는 건축주는 가장 현실적인 안으로 의사결정을 수정하기에 이른다. 그에 따른 수없는 설계 변경은 결과적으로 프로젝트 기간을 당기는 데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불필요한 기간 연장에 따른 추가 비용으로 이어지지만 건축주를 포함한 파트너들은 전체가 연결된 지형을 고려하거나 장기적 관점으로 프로젝트를 바라보기 어려워진다.


이 정도 되면 건축사의 설계의도는 어느새 간데없고 시공사를 포함한 프로젝트의 모든 관계자들이 각자에게 이익이 되는 (결국 장기적으로는 이익이 되지 못하지만) 솔루션에 집착하고 제각각 충돌하기 시작한다. 이 즈음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건축사로서 나는 건축주가 목표하는 수익률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숱한 변경안을 새롭게 제안하는 중이다. 물론 그 제안이 의기투합했던 본래의 콘셉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노력 중이나 쉽지 않은 일이다. 설계안이 확정되지 않았으니 사업일정은 그만큼 늘어나고 처음 설계안은 조금씩 조금씩 변경되어 이미 다른 결과물로 가고 있는 중이다.



수익 보장을 원하지만 반복되는 시행착오의 딜레마


그렇다면 좋은 건축물이란 무엇인가? 아파트 설계와 같은 경우는 첫째, 수익이 보장되어야 하고 둘째, 입주민과 방문자의 좋은 경험이 쌓여 시간이 갈수록 가치가 더 올라가는 건축물을 말한다. 1, 2, 3편에서 제안한 설계는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둔 것이고 나는 두 번째에 관심이 더 많지만 수익이 보장되지 않는 제안은 뜬구름과 같아서 이 두 가지를 다 만족시키는 제안을 하려고 애쓴다.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대부분의 건축주들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 글에서는 주택사업의 수익보장에 관련된 이슈에 집중해서 정리를 해보자. 수익 보장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프로젝트 기간의 단축이다. 대부분의 경우 토지매입부터 대출 이자 등 비용이 발생하기 시작하고 분양까지의 시간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일단 시작된 프로젝트의 시간은 돈이다. 분양까지 빠르게 가야 한다. 그러나 건축 기간이 늘어나는 경우가 허다한데 크게 세 단계로 볼 수 있다. 첫 관문은 설계 후 법적 이슈나 여러 이유로 허가를 받기까지, 다음은 착공 후 설계의 변경과 커뮤니케이션의 이슈 등으로 준공 전까지, 마지막으로는 준공 이후 분양 완료까지 기간이 늘어질 경우다.


시간의 단축은 곧 시행착오의 단축을 의미한다. 불필요한 변경 과정, 번복되는 의사결정, 커뮤니케이션 오류 등을 미리 최소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전체 그림을 놓고 설계와 시공이 하나가 되면 훨씬 빨라진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가치사슬은 길고 시행사(건축주), 건축사, 시공사, 인테리어, 마케팅 등이 순차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니 시간 단축을 위해 설계를 빨리 해서 시공으로 빨리 넘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다음은 어떻게 빨리 시공해서 분양으로 빨리 가게 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러나 변수는 많고 모든 것을 미리 예측하고 예비할 수 없기 때문에 단계별로 지속적인 이슈가 발생한다. 게다가 다 지어놓고 분양에서 여러 이슈가 새롭게 발생하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을 다 쪼개서 일을 하다 보니 뒤로 갈수록 일이 더 커지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판에서 설계를 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건축사로서 어떻게 도울 것인가


지금까지는 좋은 건축물, 즉 건축주의 수익률과 사용자(입주자)의 경험 측면에서 최적의 설계 도면을 제안하는 데에 집중해오지 않았을까. 물론 이외에도 허가 단계, 시공단계 등에서 수없이 발생하는 이슈들을 조율하기 위해 동분서주 시간에 쫓기며 최선을 다해왔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내가 먼저 시행착오의 시간을 줄이고 모든 파트너가 한 방향을 바라볼 수 있도록 방법을 먼저 고민하고 노력해왔는가? 효율적인 협업의 구조에 대해 얼마나 적극적으로 생각해왔는가?


토지부터 건축물의 콘셉트, 설계, 시공, 인테리어, 분양에 이르기까지 전 단계를, 전체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주체는 나다. 그러나 건축주와의 신뢰가 수익이라는 관문 앞에서 흔들리고 결국 서로가 수단으로 전락하기 시작할 때도 나는 설계 도면에 집중하여 최선의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에 충실해왔다. 그런데 지금까지 실패 (건축주는 단기적 수익률을 올리는 데에 성공했을지 몰라도 좋은 건축물의 필요조건에는 결국 미치지 못하는 타협된 결과물이자 장기적으로 가치가 상승할 수 없는 건축물) 사례를 복기해보면 이 관점에서 벗어나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쉽지 않은 얘기지만 다른 방법은 없다.  



설계 도면을 넘어선 건축 디자인 매니지먼트


시행사(건축주), 시공사 등의 관점에서 정리해보자. 건축 프로젝트에서 수익을 많이 낸다는 것은 리스크를 줄인다는 것이다. 수익 목표를 설정해 놓으면 그 목표로 가는 데에 맞닥뜨리는 여러 변수를 줄여주는 것이 수익을 보장하는 길이다. 눈에 보이는 가장 큰 비용은 시공비와 사업 기간이다. 기간이 늘어나는 여러 변수를 사전에 제거하거나 최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둘러보면 시행사(건축주)나 시공사, 감리도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전체를 볼 수 있는 눈이 건축사에게 있으니 이 두 가지가 늘어나지 않게 하는 역할도 건축사에게 있다.


이런 역할을 위해 일정 규모 이상의 프로젝트에서는 CM(Construction Management)사를 별도로 선정하기도 한다. 건설사업관리를 뜻하는 CM서비스는 시공관리뿐 아니라 기획, 타당성 조사부터 설계, 시공, 준공에 이르는 모든 관리를 말한다. 이들을 고용하기 위해서는 사업규모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CM의 역할은 결국 시공관리를 통한 사업비의 절감에 가장 특화되어 있다.  도면 검토부터 (필요하면 설계 수정) 시작해서 공사비를 줄여나가는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내가 만난 거의 모든 건축주들은 사업규모나 기타 이유로 인해 별도의 CM사를 선정하지는 못했다. 결국 건축관계자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비용을 줄여 전체 사업비를 절감하는 방식을 택하게 된다. 사업 전체를 바라보는 건축사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오직 건축주의 단기적 수익만을 위해 일한다면 나에게는 건축사로서 존재할 이유가 없어진다. 건축주의 수익을 보장하고자 하는 이유는 이 긴 여정에서 좋은 건축물이라는 결과물을 얻기 위한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프로젝트의 콘셉트 단계부터 끝까지 전체를 이 관점에서 조율하고 이끌 수 있는 주체는 결국 나다. 좋은 건축물로 가기 위한 여정, 설계도면을 벗어난 살아있는 협업 관리, 단순 시공 관리가 아닌 건축 디자인 매니지먼트라는 더 큰 관점이 필요하다.


이쯤 되면 건축사로서 나의 역할은 분명해진다. 땅을 분석하고 건축주의 사업목적에 맞는 최적의 콘셉트를 제안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출발점에서 처음부터 한 방향을 볼 수 있도록 나부터 접근해야 한다. 그 방향이 옳다면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잡는 일부터 마다 하지 말아야 한다. 그동안 피해왔던 순간을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계약의 범위와 비용, 권한, 책임을 구체적인 설계 작업 전에 먼저 명확히 하는 시간이다. 서로의 역할과 책임, 비용과 일정을 합의하고 출발점에 서야 한다. 그리고 출발 이후 벌어질 문제들을 미리 챙겨야 한다. 그렇게 시작해서 한 방향으로 달려가서 도착한 곳은 결국 사용자들의 공간 경험이 쌓이는 지점일 것이다.


한 방향을 본다는 것은 서로 성장한다는 것


그런데 지금 나는 설계 도면 값을 받고 일한다. 이 당연해 보이는 관행적 방식 밖으로 한 번도 벗어나고자 한 적이 없다. 계약서를 작성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땅에 집중하고 있고 문제 해결을 해나가는 과정에 깊숙이 들어가 있다. 앞선 글에서 정리한 것처럼 모든 답은 그 땅이 가지고 있다. 이 답을 찾아내는 과정이 내게는 설렘이며 좋은 건축물을 위한 콘셉트 도출의 중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시공 단계부터 건축사의 역할은 거의 요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계 도면에 국한된 비용을 받기로 했으니 매번 다음 프로젝트로 빨리 넘어가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나의 모든 의사결정과 협업 방식이 서로의 시간을 줄여주기 위한 관점으로 전환될 때 마침내 모두 한 방향을 볼 수 있다. 쉬운 문제는 결코 아니다. 그러나 시작할 수밖에 없다. 시행사의 금융 관리부터 설계, 시공, 분양에 이르기까지 건축 전반에 대해 관리하되, 오직 목적은 모든 파트너들의 시간을 줄여주기 위함이 되어야 하고 그 결과는 수익률로 이어질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내가 놓지 않고 붙들고 있을 기준점은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가’가 될 것이다. 즉, 이 방향이 좋은 건축물로 가기 위한 방향인지 끊임없이 물으며 갈 것이다.


수익뿐만 아니라 좋은 건축물이라는 결과물까지 얻게 되었으니 이 과정에서 건축주도, 시공사도, 나도, 누구도 이 과정에 대한 경험만큼, 결과물의 가치만큼 성장해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한 방향을 본다는 것은 서로의 성장을 위해 일한다는 뜻임을 깨닫는다. 기존의 관점으로는 각자 단기적으로 돈을 벌었을지 몰라도 그 프로젝트의 끝에서 성장하지 못했다.


한 번에 되지는 않을 것이다. 건축주는 건축사와 초기 논의했던 콘셉트가 끝까지 갈 수 있게 끌고 가야 하는데 그 힘은 설계와 시공에서 나온다. 설계가 최대한 변경되지 않고 끝까지 가려면 (그래야 불필요한 시간을 줄일 수 있으므로) 변수를 미리 예측하고 반영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도 필요하다. 설계 도면의 작은 요소 하나 바꾸는 일이 얼마나 많은 비용 낭비를 초래하는지는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다. 설계 기간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 결국 사업기간을 단축하는 요소가 된다.


실제로 이 고민을 하는 과정에서 여러 프로젝트 의뢰를 거절했다. 지금까지 겪었던 시행착오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계사무소를 운영해야 하는 현실적인 이슈들이 있으니 쉽지 않은 의사결정이고 당분간은 모든 일이 더 어려워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나의 의사결정 방식이 변화하고 있다면, 그리고 협업의 원리가 제대로 동작할 수 있을 때까지 조금씩 시도한다면 분명히 결과로 나타나리라 믿는다.



처음부터 끝을 염두에 두라


건축은 정해져 있지 않은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건축주뿐 아니라 건축사, 시공자, 인테리어 등 (은행 관계자 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가는 일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실패는 결국 한 방향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방향을 바라본 출발점에 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무실 벽면에는 오래된 메모지가 붙어있다. 문득 이 메모의 의미를 비로소 읽는다.


  

" 끝까지 잘 생각하라. 처음부터 끝을 염두에 두라 "

그렇다. 끝까지 잘 생각하라. 처음부터, 한 방향을 바라보는 ‘모두의 끝’을 염두에 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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