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컵에서 발견한 배려의 방식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새 카페가 문을 열었다. 그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꽤나 놀랐다. 카페에 직원은 온데간데 없고, 바리스타 로봇이 커피를 만들면 배달 로봇이 그 잔을 이어받아 자리로 배달까지 해주는 게 아닌가!
커피 맛도 나쁘지 않은 데다 24시간 쉬지 않는 로봇 덕에 카페가 항상 열려있으니, 벌써 괜찮은 카페의 조건을 갖춘 셈. 하지만 그 카페가 내 마음에 쏙 든 이유는, 음료 주문부터 수령까지의 모든 과정 동안 사람을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낯선 이와는 눈만 마주쳐도 정신력 소모가 있는 나에게, 점원을 대할 일 없는 로봇카페야 말로 단연 최고의 휴식처였다.
워낙 새로운 유형의 카페이다 보니, 기존 카페들과 다른 점을 구석구석 찾아보는 재미가 있었다. 바리스타 로봇과 서빙 로봇의 어색하리만치 정형화된 움직임은 물론이거니와, 음료 속 얼음의 형태나 컵의 재질에도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특히 나를 사로잡은 것은 이 카페만의 독특한 컵 표면 질감. 이 가게의 종이컵 겉면에는 잘 미끄러지지 않는 재질의 엠보싱 코팅이 되어있었다. 무심결에 컵을 잡는다면 잘 느끼지 못할 수 있지만, 이는 분명한 차이. 덕분에 별도의 홀더 없이도 기존의 종이컵보다 안전하게 잡을 수 있었다.
왜 이런 독특한 컵 디자인이 탄생했을까? 컵을 만든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저 돈의 논리에 의한 개발일수도 있다. 아마 컵에 홀더까지 끼워서 서빙 할 수 있는 로봇을 개발하는 것보다, 홀더가 아예 필요 없는 컵을 개발하는 쪽의 비용이 더 적었기 때문에 생긴 변화일 것이다. 그래도 달리 생각해보면, 손님 입장에서도 컵을 편히 잡을 수 있게 되었으니, 사람의 안전까지 동시에 고려한 배려가 담긴 디자인이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바리스타 로봇의 입장도 간과해서는 안 될 일. 철로 된 갈고리손 끝에 실리콘 마개 좀 달았다고, 사람도 종종 놓치곤 하는 미끄러운 종이컵을 로봇이 쉽게 잡을 수 있을 리 없다. 백 년 넘게 사용해온 종이컵을 간단히 집어 드는 일에 사람이 로봇보다 훨씬 익숙할 것은 당연한 일. 그러니까 종이컵의 표면을 거칠게 만든 이유는, 음료를 마시는 사람이 아닌 음료를 만드는 로봇이 쉽게 잡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일 수도.
결국 배려란 게 다 이런 것 아닐까. 물론 배려의 사전적 정의가 ‘누군가를 도와주거나 보살펴주려고 마음을 쓰는 일’이더라도, 배려해주는 사람 없이는 배려받는 사람도 있을 수 없는 법. 내 마음을 써서 상대방을 돕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분명 그래야만 자신의 마음도 더 행복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홀더 없는 컵을 개발함으로써 개발자는 비용을 아끼고, 로봇과 손님은 모두 컵을 쉽게 잡을 수 있게 된 이 모두의 작은 행복. 상대방의 편의를 위해서 내 불편이나 신경씀을 잠시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입장을 모두 이해하여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함께 행복해지는 마음씀이 진정한 형태의 배려일지도.
내가 카페에 쭈뼛거리며 들어서도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점원분의 미소 역시 배려일 것이다. 그런 그의 인사에 반갑게 맞장구치는 것은 힘들지라도, 눈 마주치며 인사를 받아주어 그 인사를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걸맞은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인사에 가치를 더했다는 뿌듯함이 나의 하루에 또 다른 배려의 용기를 심어줄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