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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기이택생 Feb 17. 2021

명절이면 보이는 죽음의 형체

‘오래된 베갯잇 냄새를 풍기는 검붉고 둥근 무언가’

여러분은 설을 잘 쇠셨나요?


연휴가 끝난 지 사흘째 돼서야, 제게 처음으로 설 안부를 나눈 사람은 지도교수님이셨어요. 그때 제가 연구실의 그 누구와도 설을 잘 쇠었는지 묻거나 물음 받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죠. 그리고 연구실 사람들은 서로의 설날 얘기를 궁금해하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 생각했어요.


사실 고향에 다녀오는 일이 마냥 즐겁지마는 않은지 꽤 되었거든요. 그도 그럴 게 차로 겨우 두 시간 거리인 제 고향에 양가 친척이 다 모여 사셔서, 종종 가고 뵙다 보니 애틋함이 없어요. 또, 양가 조부모님이 다 돌아가셔서 명절에 뵐 친척분도 별로 없구요. 그래서 명절이면 하루에 양가 큰집을 몰아 다녀오고, 나머지 날은 방에 누워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곤 해요. 주로 어릴 적 북적이던 친척 집의 포근함이나, 조부모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러운 죽음이 무엇이고 어떤 모습으로 찾아오는지에 대해 점차 알아가게 되죠. 몇 번의 생각 끝에 저는 죽음이 ‘오래된 베갯잇 냄새를 풍기는 검붉은 무언가’라고 상상했어요. 그리고 이번 설에는 이에 더해 죽음이 형태도 있다는 걸 알았어요. 죽음은 아스라이 둥근 모양이에요.


외조부모님네는 큰 공장을 운영하셨고 친조부모님네는 생선가게를 하셨다는데, 네 분은 모두 말년을 똑같이 생긴 주공아파트에서 보내셨어요. 15평 남짓한 방이 복도형으로 다닥다닥 붙은 그 아파트는 노인분들이 죽음 번호표를 받아들고 저승사자를 기다리는 교도소 같아요. 그런 아파트에 거주하시는 대다수의 분들은 노부부이신데, 명절이 되면 고요한 아파트 단지에 주차장만 잔뜩 붐비죠. 부모님 뵈러 아파트에 온 그들이 몰고 온 차 중에는, 그 15평 짜리 집보다 곱절은 더 비싼 것도 있어요. 한참이나 헤매며 차 댈 곳을 열심히 찾은 자식들은, 정작 부모님 댁에는 아주 잠깐 머무르곤 해요. 본인들 집에 선물로 들어온 명절 생필품 세트를 그대로 다시 부모님께 선물해드리고, 금세 차를 빼 떠나가곤 하더라구요.

그 아파트는 노인분들이 죽음 번호표를 받아들고 저승사자를 기다리는 교도소 같아요. (사진: 네이버 부동산)


외할아버지께서 주공아파트로 이사를 가신 후에는, 할아버지 댁에 갈 때면 집 문을 열 때부터 죽음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어요. 어릴 땐 그게 할아버지 냄새인 줄 알았고, 커서는 그게 습기 찬 농이나 장판 냄새인 줄 알았죠. 지금은 그게 죽음의 냄새라는 걸 알아요. 외할아버지는 폐암으로 돌아가셨어요. 일본에서는 사람의 숨이나 소변 냄새를 훈련받은 개가 맡고 몸에 암이 있는지 진단하는 연구가 진행 중이고, 그 정확도가 꽤 높다고 하더라구요. 할아버지 댁에서 풍기던 독특한 베갯잇 내음은 폐암에 고약하게 배어든 죽음의 냄새였던 거예요. 언제부턴가 친가에서도 비슷한 냄새가 났었는데, 몇 년 후에는 친할아버지도 폐암으로 돌아가셨죠. 말로 표현하기 힘든, 똑같이 오래된 베갯잇 냄새였어요.


우리 어머니는 별명이 ‘이깔끔’이세요. 외출했다 집에 돌아와서 바로 마룻바닥을 밟으면 채취 발자국이 남는다시며, 꼭 화장실에 직행하도록 가족에게 잔소리하셨어요. 우리 집 신발장 옆에는 수술실에서 쓰는 일회용 덧신 곽이 놓여있었는데, 그걸 신고 화장실까지 가서 발부터 씻어야 했죠. 화장실도 가족 누구나 샤워를 하고 나면 물때가 끼지 않게 온수를 타일에 한 차례 뿌리고, 스크래퍼로 물을 밀어내서 관리해야 했어요. 그런데 지난 설엔 집에 가보니 화장실에 온통 붉은 물때와 검은 물곰팡이 투성이더라구요. 깜짝 놀라서 수세미로 어설프게 닦아내다가, '이 일이 이렇게나 힘든 거였구나.' 하며 좀 울었죠. 어머니께선 '언제부턴가 화장실 청소를 하기엔 힘이 벅차서, 문을 닫아두고 안 보다 보니 그리되었다.' 하셨어요. 죽음은 물때의 붉은색이고 물곰팡이의 검은색이었던 거예요.


이번 설에는 차편을 제때 구하지 못해 고속열차를 타고 어중간한 광명역에 내렸어요. 부모님께서는 꽤 먼 거리인데도 코로나 걱정에 차를 몰고 역까지 마중 오셨어요. 역에 도착해보니 평소 운전을 잘 하지 않으시는 어머니 차가 와 있더라구요. 조수석에서 내리신 아버지는 어딘가 구부정하셨죠. 몇 차례 고생하셨던 디스크가 다시 터져서, 곧게 서 계시지 못하신다더라구요. 집에서도 침대에서는 못 주무시고, 바닥에 누워 잠드셨다가 깨면 어정쩡히 등을 굽힌 채로 앉아계셨구요. 그 등의 굽은 곡선을 보자니 우습기도 하고, 동시에 눈물도 났어요. 눈앞이 번져서 그 굽어진 모양을 제대로 보지 못하겠으니까, 연휴 내내 그저 방에서 눈을 감고 누워 이런 생각을 했죠.


‘아 이게 죽음의 모양이구나, 죽음은 아스라이 둥근 모양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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