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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Feb 02. 2024

영화 ‘패터슨’- 시적인 것

한글로 쓰인 읽을거리 가운데 내게 가장 높은 장벽으로 남아있던 것은 시였다. 본디 책을 능숙하게 읽는 독자인 적이 없었지만 나만의 좋은 소설과 비소설 목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논문이나 이론서를 읽어야 했기 때문에 이 분야의 읽기 경험이 있었고 회사에서는 매뉴얼을 읽거나 만들 일이 많았으므로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눈물을 줄줄 흘리며 결국에는 이런 문서에 익숙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시만큼은 관심이 있어도 어려웠다.


독자로서 내 경험은 작년에 두 가지 시도를 통해 전에 없이 확장되었다. 독서클럽과 사이버대학 문예창작과 편입. 트레바리의 여러 클럽 중에서도 나는 시인이자 편집자이며 출판사를 운영하는 클럽장의 모임을 선택했는데 말하자면 그것은 대단히 문학적인 북클럽이었다. 문예창작과로 말하자면, 나의 (풀타임) (사회학과) 박사진학을 성공적으로 말린 내 의사의 권유였다. 뭔지는 몰라도 내 환자인 이 여자가 뭘 쓴다는데… 라고 생각했을 내 의사는 선생을 만나 피드백을 받으면 시행착오를 많이 빠르게 건너뛸 수 있을 거라는 조언(그녀 스스로가 의사이면서 화가이기 때문에 신뢰할만한 조언으로 들렸다)과 함께 동료 의사 친구가 늦은 나이에 사이버대학 스페인어과를 졸업한 후 통번역시험 합격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읽기보다는 쓰기에 숙련된 나는 처음으로 내 글에 대한 문학계의 평가가 궁금해졌다. 동시에 지금껏 무관심했던 문학 분야 읽기도 긴 인생 어디쯤에선가는 해볼만한 시도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시를 읽고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마치 이론 물리학이나 가장 정제된 수학 분야처럼 아름다워보이지만 접근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던 그것에 말이다. 그런 것치고는 가볍게 시창작기초 수업을 신청했다. 그리고 그 수업은 확실히 내게 완전히 다른 차원을 열어젖혔다. 시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이 친절하면서도 열정적인 수업에서는 중간, 기말고사 각각에서 시집 한권 씩을 읽고 감상평을 써야 했는데 이 모든 경험은 무척 환상적이었다. 내 감상평에 대한 기대이상의 피드백이 그 환상에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여기서 얻은 시에 대한 실마리와 일말의 용기로 두 번째 학기에는 시 합평 수업까지 듣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시가 무엇인지 완전히 깨달았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다만 시를 어떻게 향유할 수 있는지, 있을지에 대한 시도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 매번의 시도와 과정은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다. 시를 읽는 과정은 (나는 정작 하지도 않는) 큐브 맞추기처럼 흥미롭다. 내가 시를 읽고 쓰다니. 인생이 참 신기하고 놀랍다.


오랜만에 영화 ‘패터슨‘을 다시 본 게 이런 새로운 경험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시적인’ 것을 발견하려 하고 있었다. 일주일이라는 단위로 반복되는 형식(기상, 아침식사, 출근, 동료와의 만남, 운행, 점심시간, 퇴근, 아내와의 저녁식사, 개와의 산책, 펍에서의 맥주 한잔)이 그러나 하루도 같지 않게 변주하는 것이 시의 연과 행, 운율 같은 건 아닐까? 패터슨의 초고 시와 퇴고되어 가는 각 버전의 시들은 물론이고 다른 시인들의 시가 직접적으로 낭독되기도 한다. 이 모든 게 시겠지.


그러다 영화 말미에 패터슨이 일본에서 온 시인과 만났을 때, 일본인 시인이 말한다.


“흥미로운 작품세계를 보여준 프랑스 예술가 장 뒤뷔페가 1922년 파리 에펠탑의 기상학자였던 거 알고 있습니까? 아주 시적이죠.”


미술가가 ‘기상학자’였다는 사실이 시적이라니… 아니, ‘파리 에펠탑’의 기상학자였다는 사실이 시적인걸까? 아니면 ‘1922년 파리 에펠탑의‘ 기상학자였다는 사실이? ‘패터슨의 버스운전기사’도 시적이라는데,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썼을 법한 시의 제목이라는데, 시적인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드는 것도 같긴 한데… ‘시적인’ 것은 과연 무엇일까? 영화는 뻔해보이면서도 근본적인, 그러나 아마 그때문에 답을 쉽게 한줄로 정의할 수 없을 질문을 던졌다.


그에 대한 나의 지금의 답변은? 다음 기회에. 오늘은 영화가 길어올린 질문의 사연만으로도 글이 이미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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