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목요일, 트레바리 독서모임에 나갔다. 안온북스 서효인 대표(이자 편집자 이자 시인)의 포토제닉한 사진이 땅 걸려있는 링크를 타고 별 고민 없이 참가를 결정했다. 이참에 다른 (새로운, 회사 밖) 사람들과 모임을 한다는 오래된 숙제도 해볼 겸.
다룬 책은 장정일 작가와 한영인 비평가의 서간문, ‘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 가는군요’였다. 두 저자는 편지 형식의(애틋한 안부인사 사이에) 부드러운 서간체(구어를 닮은 정갈한 문어체)로 서적/사회/정치 등 모든 것에 대해 의견을 주고 받는다. 레퍼런스가 어마어마하고 문학계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저자들이 쓴 내용이다보니 부드러운 문체처럼 부드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부드럽지 않다는 게 흠결은 당연히 아니다. 인간의 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지적으로 도전적인 문제를 원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 적어도 내 뇌는 그렇다). 모든 사안에 대한 내 관점을 정리하려는 노력을 접은 후에도 책은 오랫동안 나와 출퇴근길에 동행했다(열심히 읽었다).
읽는 내내 한국 문학에 대한 부르디외 식 필드 분석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라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모를 뿐 이미 있을 법 하다고 동시에 생각했다. 한국 문학장의 변천사 등등. 오히려 너무 뻔하지 않을까? 분석 결과물의 타당성과 유효성은 다른 문제이지만). 특히 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에서 문학 비평가의 지위에 대해 분석하면 재미있을텐데. 재미있을 뿐 아니라 생산적이고 무엇보다 종사자들에게 일말의 위로를 줄지도 모르는데. 그러니까, 사회학자들은 학문장에서 애초에 누려본 적 없는 권위 혹은 영향력을 한때 어마어마할 정도로 가지지 않았던가? 라든가. 그리고 그 영향력은 어떻게 해서 누가 갖게 되었는가, 라든가(문학 비평가를 위한 자기계발서 용도의 질문은 물론 아니다).
모임에서 논의한 첫 주제는 책 속에서 만난 반가운 레퍼런스였다. 나는 (사실 그다지 비중 있게 언급되지도 않은) 두 사회학자를 꼽았다. 막스 베버의 고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그리고 부르디외의 (아마도) 구별짓기. 그리고 사회학적 관점으로 더 생산적이고 재밌는 분석이나 논의가 가능했을텐데 아쉽다는 뜻을 전하려고 했다, 문학하는 사람들은 베버랑 부르디외를 이렇게 읽나? 라고 생각했다는 말로써 말이다.
내가 간과한 건 ’사회학적’ 관점을 가진 인구 비중이 매우 희소하다는 것이었다. 한병철의 책 ‘리추얼의 종말‘ 제목을 읽은 사회학도 중 리추얼을 사회로 치환하지 않은 자가 있다면 내게 돌을 던져도 좋을 것이다(실제 내용은 논외다. 안 읽었으므로). 사회학에서 리추얼이란 이미 그런 의미를 벗겨내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하나의 학술용어이지 않은가(이쯤되니 질척하게 동의를 구하는 마음이 된다). 이 말에 끄덕여줄 고개는 몇 개쯤 될까? 순수문학 독자 수의 1/10은 될까?
그 자리에 계신 분들이 사회학이 어떤 거예요?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가졌을 때 얼마나 가슴이 떨렸는지 모른다. 세상에서 제일 흥미롭고 모던하며 유용한, 그러니까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이야기이자 분석틀에 누군가 긍정적 관심을 갖는 건 형언할 수 없이 기쁘고 설레는 일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절망감이 찾아오는데 그 좋은 걸 절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리라는 저주에 걸린 왕자님 같은 자기예언적 확신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좋은데, 인류에게 정말 좋은데, 설명할 방법이 없네.
이 마음으로 다시 사회학사 책과 지식사회학 책을 펼쳐든다. 내가 제일 못하는 답변. 사회학이 뭐예요? 다음에 받으면 어떤 영업사원보다 유능하고 어떤 광신도보다 열렬하게 답할 것을 기약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