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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4. 2024

구근의 봄

한주 사이 무스카리는 10개 꽃대를 뽑아 올렸고 지금 일곱 송이가 만발하는 중이며 한 송이는 지기 시작했다. 매일의 변화가 놀라워서 일주일 새 벌어진 일이라 믿기지 않는다.


아르메니아쿰은 가장 씩씩하게 빨리 꽃을 보여줬지만 다섯 개 구근 중 세 개만 꽃을 피웠다. 판매용 사진처럼 짙은 보랏빛이 나오기에 우리집 베란다는 일조량이 부족한 것 같았다. 그레이프 히야신스라는 다른 이름처럼 한 송이에 매달린 작은 꽃송이들은 포도알 같기도 하고 백설공주의 퍼프 옷소매 같기도 하다. 꽃이 다 피었을 땐 2.4센티 쯤 크기다. 부추같은 이파리가 꽃대 길이만큼 자라서 십오센티 쯤 되는데 무성한 부추 사이에 가녀리게 핀 꽃이 하찮으면서 예뻐서 매일 놀란 후 웃기를 반복한다.

발레리 피니스는 네 개 구근만 발아했는데 여섯 개 꽃대를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웃자란 게 분명한 쪽파 같은 잎과 꽃대가 자꾸만 눕고 있는데 옅은 하늘색으로 피는 꽃은 너무나 아름답다. 아르메니아쿰과 마찬가지로 내년에도 이 친구를 심을 것이다. 아니 추식 구근 시장이 열릴 올해 9월 재빨리 사들여 21센티 팟을 가득 채워야지.

터치 오브 스노우는 레슬링 선수같은 단단한 잎 안에서 꽃대 올리기를 썩 주저하는 눈치다. 한 송이가 피는 중인데 꽃이 작고 색이 선명하지는 않다.


좋아하는 회사 선배는 튤립을 좋아하셔서 네덜란드 주재원 복귀하면서도 튤립 구근을 사왔다 했었다. 유난이라고 생각하며 마곡 식물원에 핀 수선화와 튤립을 같이 봤던 게 삼년 전이던가.

나는 이다지도 유난스럽게 구근을 탐하고 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 할아버지까지 나서서 글라디올러스(주인공 여성이 매년 8월 어머니 무덤에 들고 가는 꽃으로 말하자면 여름에 꽃피는 구근 쯤 된다)와 튤립(저 악마적으로 아름다운 보랏빛 튤립은 도대체 누가 창작한 표지인가!!! 연두 잎사귀와 아프리콧 튤립 색 같은 분홍빛 주황, 노란 달과 띠지에 홀려서 산 책이다)을 내게 권했다.

엊그제 트레바리 시 모임에서 관심을 갖게 된 시집 중에는 성동혁 시인의 <아네모네>가 있다. <6>을 살 수도 있었는데 모스크바 주제가 많이 나타난다는 데에도 끌렸지만 아네모네와 히야신스라는 제목의 시가 있는 이 시집을 택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구근적인 봄. 당혹스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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