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의사를 만나 약을 처방받고 치료를 시작했을 때 두려움은 다시는 원래대로 회복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회복해본 경험만이 회복의 가능성을 입증해주었기 때문에 이 의혹과 불안을 해소하는데에는 4년 쯤 걸렸다. 그러나 회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에 이전과는 다른 삶이 열렸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되었다. 나는 삶에 대해 지난 40년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을 마침내 갖게 되었다. 우리는 무너지기도 하지만 완전히 회복하기도 한다. 나는 무너지는 데 관대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회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주는 자신감 덕분이었다.
이 사실이 변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과정을 견디는 일의 지난함은 다른 문제이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데 30분이 걸리고 세탁기와 청소기 돌리기 위해 온 에너지를 써야 하며 무엇보다 읽고 쓸 수 없는 시기를 견디는 문제다.
요즘에는 우울증이 우울한 기분 문제라는 데 대한 인식 개선도 제법 있어 보인다. 얼마 전 정신과 의사들이 만든 유튜브에서 우울증에서 회복하는 (아마도 임상적인) 과정을 설명하는 것을 봤는데 여러 모로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최소한 일상을 가능하게 할) 의욕이 생겨나는 데에도 의사와 나는 투약 후 2주에서 4주를 견딘다. 식욕도 곧 돌아온다고 한다. 다만 내 경우에는 약의 일반적인 부작용인 식욕부진이 나타난다. 의사가 고마운 건 이럴 때다.
선생님, 다 그렇다 치고 식욕이 너무 없어요.
맞아.. 그게 이 약이 그럴 수 있어. 그러면 더 맛있는 음식을 먹어. 그렇게 해서 먹게 하는 거야.
나는 납득이 되어 버렸다. 여전히 식욕저하에 맞서 싸우고 있지만 저 명제를 잊지 않고 주말이면 마트를 돌며 끌리는 식재료 장을 보고 정성껏 밥을 지어 먹이려 노력하고 있다.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유튜브에서 가장 눈여겨 본 점은 집중력과 기억력 회복은 (아주) 오래 걸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문제로 아주 오래 고통받았다. 회사에서 기억력과 집중력 저하가 들키는 건 치명적이다. 적어도 내 업종에서는 그러하다.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의사소통 결과와 과정을 기억하지 못하면 물어뜯겨 금방 너덜너덜해질 것이다. 이건 업계 사람들이 하이에나라서가 아니다. 일의 성격이 유독 그렇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놀랍게도 첫 번째 극복과정에서 나는 약에 힘입어 회사에서 벌어지는 오류와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보완 시스템을 구현해냈다. 라이더 캐롤의 불렛 저널로 나는 구원받았고 나를 구원했다. 기억 프로세스를 잡고 있느라 걸리는 뇌의 부하를 줄이고 대신 노트해 둔 할 일 중 지금 당면한 단 한 개 to-do에 내 뇌 CPU의 가능한 성능 전체를 할당하는 방식이라고나 할까. 여튼 내게는 이 방식이 통했다. 최고의 퍼포먼스는 아니어도 최적의 퍼포먼스는 낼 수 있었다. 우울증이 사람을 괴롭히는 궁극적 인식인 ‘할 수 없어’가 주는 궁극적 감정, 절망감을 극복한 쾌거라고 나는 이 전투를 기억하고 있다.
지금 다시 이 시기를 겪고 견디다 보니 읽고 쓸 수 없는 게 큰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는 상태, 심지어 도파민 중독자를 양산한다는 쇼츠도 유튜브도 내게는 무용지물이다. 읽고 쓰고 보고 쓰고 감상하고 쓰는 게 낙인 사람에게서 이 모든 것을 할 집중력과 기억력이 불충분한 상태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선생님도 우울할 때가 있거든. 그럴 때 좋은 전시를 보면 좀 나아질 때가 있어. 그러니까 힘 내라구.
스스로가 정신과 의사이면서 화가인 내 의사는 글을 쓰고 제법 그림을 보러 다니는 내게 수준 높은 전시와 작품을 자주 소개한다. 이 날, 평소 상담시간을 훌쩍 넘겨가며 20분 넘게 흥미로울만한 전시를 권해주던 의사가 그러니까 힘내라고 말했을 때 이상하게 마음이 뭉클했다. 이 말은 약이 해줄 수 없는 것, 결국 내가 해야 할 것이 있느냐는 내 질문에 대한 긍정의 대답이다. 또한 내 몫인 자기 회복의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자기만의 방법을 예시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 방법을 찾고 확신할 때까지 이어질 시행착오의 시간, 지난할 시간에 보내는 격려인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데 걸린 시간은 한 시간이 안된다. 그러나 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쓰고 싶어 한 지는 일주일이 지났다. 하고 싶어하면서 할 수 없는 그 일주일이 고통의 일부를 형성한다. 정말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제 침대에 누워 보낸 대부분의 시간동안 그 고통은 거의 초단위로 느껴졌고 그걸 견디느라 녹초가 되어버렸다. 쓸 수 있을 것 같을 때를 기다려야 할 때도 있지만 그냥 써버리는 것만으로 나아질 때도 있을지 모르겠다. 후자의 시도로서 20킬로그램짜리 각반을 종아리에 차고 다리를 질질 끄는 느낌으로 글을 써본다. 오늘은 퇴고는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