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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Jul 14. 2024

아직 견디는 중

높고 깊은 산중. 하늘에 새 세 마리가 떠있다. 그 아래 나무만 빽빽한 산속에 거의 가려진 집 한채. 집 오른편 봉우리에서 시원한 폭포수가 쏟아져 내린다.

전형적인 중국식 산수화가 그려진 자그마한 청화백자 잔을 바라보는 오초 동안 나는 완전히 잔 속 풍경 안에 존재한다. 일주일 간 실패하는 법이 없던 시도. 신비로운 경험이다.

지난 일주일 새 가장 큰 기쁨은 백차 마시는 일이다. 기쁘려고 아름다운 잔을 마련하고 고급 백호은침과 백모단을 준비했다. 차의 풍미 자체가 큰 쾌감을 준다. 행위 자체로 즐거우려고 큰맘 먹고 청자개완도 갖췄다. 역시 즐겁길래 백호은침 찻잎이 물에 풀리는 시각적 즐거움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유리개완도 주문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잠깐 차 마시는 즐거움에 커피 소비가 다 줄었다.


회복을 위해 내가 해야 할 몫에 대해 지난 주 회사 상담에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이때 매우 큰 힌트를 얻었는데, 그 회복에 필요한 (내 의사의 언어로 하면) ‘즐거운 행위’, ‘자극’은 감각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아, 그래서 의사가 맛있는 음식(후각과 미각이겠지), 전시들(시각일 것이다)을 예시로 권한 것이로구나. 그러고보니 좋은 음악 많이 듣고 좋은 냄새도 많이 맡으라셨다.

내가 좋아하는 활동들은 지력을 소모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기간에 그 활동을 하려 하면 할수록 좌절감이 커지는 게 당연해 보였다. 수영이 일깨운 좋은 기분을 촉각경험으로 해석한 상담사의 역할이 컸다. 업무도 마찬가지로 지력을 소모하는 일이므로 나에게는 감각적인 경험을 보충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제안이 흡족한 상담이었다. 촉감의 일인 데다 절차적인 일인 뜨개가 주는 안정감까지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글을 읽은 감자는 아마 그때문에 평소보다 자주 연락을 준 것 같다. 의사가 친구가 있느냐 물을 때 답하는 단 한 사람인데 나를 걱정하는 게 분명한 연락들에 마음이 뭉클했다. 티내지 않지만 알 수 있는 이런 가까운 사람들의 은근한 안부가 도움되지 않을 리 없다.


한참 전에 주문한 새 키보드를 기다린다. IT업계 종사자이면서 글을 쓰니 좋은(그러니까 엄청 비싼) 키보드 한번쯤 써보는 것도 해볼만한 시도다. 도각도각하다는데 아침에 차를 마시고 도각도각 키보드로 글을 쓰고 출근하면 큰 기쁨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오랫동안 품절이었던 줄리아노 카르미뇰라의 비발디와 소니 전집 입고 알림을 받자마자 주문해두었다. 다음 주에는 방에 있는 플레이어를 거실로 옮겨 더 자주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환경을 바꿔봐야겠다.


지금 찾은 감각적 즐거움이 아마 늘 유효한 정답은 아닐 것이다. 결국 해야 하는 것은 나를 즐겁게 할만한 것에 대한 다양한 지속적인 시도인지도 모르겠다.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 더 좋아질 여지가 있다. 아직 회복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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