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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7. 2021

39주. 조커(2019)

2020. 04. 04. by 감자

총선 전까지는 코로나가 뉴스 1면에서 내려올 일이 없으리라 생각하였는데 3월 24일 새로운 헤드라인이 걸렸다. ‘n번방 운영자 ‘박사’ 조주빈 검거됨’. 그리고 다음날 SBS에서 단독으로 조주빈의 얼굴을 공개했고 우리는 모두 그 뻔뻔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검거된 후 자해를 했다는 기사처럼 목 보호대를 차고 덤덤한 얼굴로 포토라인에 서 있는 모습에는 후회와 같은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자는 “악마의 삶을 멈출 수 있게 해 줘서 감사하다”는 말로 사람들의 할 말을 잃게 하기도 했다.


조주빈의 자의식 가득한 한 마디에 많은 사람들이 떠올린 영화가 있었다. 작년 할로윈 데이의 코스튬을 접수했던 주인공, ‘조커’였다. 조커는 북미에서 개봉되었을 때 ‘루저’ 백인들의 폭력사태를 불러 일으켰을 만큼 반향이 컸던 영화였다. 처음에는 배트맨 세계관의 우스꽝스러운 빌런에 불과했던 조커는 히스 레져의 열연으로 매력적인 악역으로 변모했고, 인기있는 캐릭터는 제작사의 눈에 들어 한 영화의 단독 주인공이 되었다. 영화를 본 많은 관객들은 이 영화를 ‘인생 영화’로 꼽았다. 우리 사회의 소외된 자들에게 좀 더 예의있게 대해야 하며,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의 인격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모두 맞는 말이다. 호평을 날린 관객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실제로 영화는 한 비참한 사람이 사회의 올바른 일원으로 서기 위한 노력이 처절한 실패로만 돌아올 때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러하다. 영화의 배경은 치안이 엉망인 고담시다. 거동이 불편한 홀어머니와 사는 아서 플랙은 광대 노릇을 하며 생계를 연명한다. 직장 동료들은 웃음 발작이 있는 그를 불편해하고 아서는 그 어떤 친목 활동도 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얻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정신적 문제를 안고 있는 아서는 어디에서든 천대받는다. 그는 코미디언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지만 주눅들고 사회성이 없는 그의 영혼은 타인을 즐겁게 하는 웃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의 무대에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냉대뿐이다. 동료의 거짓 증언으로 누명을 쓰고 직장에서 해고 되었던 날, 아서는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술에 취한 세 남자에게 린치를 당한다. 웃음발작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무자비한 발길질에 무참히 당하고 있을 때, 억눌려 있던 아서의 폭력성은 실수처럼 터져 나온다. 그는 가지고 있던 총으로 세 사람을 쏘아 죽인다. 살인 후 허둥지둥 화장실로 숨어들어 간 아서가 자기도 모를 열락에 빠져 춤을 추는 모습은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될 것임을 섬뜩하게 드러낸다. 계속된 살인은 아서를 ‘조커’로 변하게 하고, 조커는 고담시를 파괴하는 폭도들의 추앙을 받으며 더 큰 폭력을 이끌게 된다.


아서는 누가 보더라도 불쌍한 인물이다. 동시에 누가 보더라도 비호감적인 인물이다. 그는 모두에게 거절당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에게도 말이다. 사실 아서와 같은 사람을 가까이 두기는 어렵다. 그의 정신병은 충분한 자본을 들여 치료받았다면 완치되었을 수도 있고 그러면 그는 ‘해피’로서의 정체성을 이어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서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자신만의 망상 속에서만 살아가게 된다.


물론 누군가가 비참한 현실의 아서에게 진심으로 사랑을 주고 관심을 나누었다면 그는 조커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사회가 기피하고 없는 셈 치는 사람들에게 공동체적 애정을 주어야 한다는 주제를 갖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가 그렇게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가 어렵다. 조연 캐릭터에 서사를 부여하여 영화예술적인 성취를 이루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윤리적인 부분에서는 문제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관객을 조커에게 감정이입 시키지 않는다. 그러기에 조커는, 아서였을 때도, 너무나 기괴하고 박복한 인물이다. 오히려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객관적인 태도로 조커를 대상화하여 바라보게 한다. 관객은 아서를 불쌍하게 여길 수는 있지만 거기에는 오히려 남의 불행을 보고 즐기는 관음적 즐거움이 있다. 아서가 ‘나였다면’이라고 가정하면 그 자체로 도덕적인 판단이나, 하다못해 약간의 거리낌이라도 갖게 된다. 하지만 철저하게 대상화된 아서가 괴로워하고 좌절하는 모습은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기보다는 가학적 즐거움을 준다. 그렇기에 아서가 조커로 각성하여 범죄를 저지르고, 그러면서 흥에 겨워 자신만만해 하는 것을 보고는 저 미친 놈, 멋있네. 라는 감상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조커가 얼마나 더 미친 짓을 해서 흥미로운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지 기대하게 한다. 그 시선 속에서 조커는 완성된다. 매력적인 빌런의 탄생이자, 악한 시선의 시작이다.


혹자는 조커를 사악한 영화라고 평했다.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던 아서의 삶은 불행했으나, 살인을 하고 난 뒤 조커의 삶은 행복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영화는 선한 의지를 이어나가고자 하는 것은 불행을 지속할 뿐이지만 악행을 저지르면 행복이 온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평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 둘을 보태고 싶다. 조커는 범죄자나 예비 범죄자들에게 타인의 눈에 비친 범죄자가 매력적으로 보일 거라는 기대를 갖게 하고, 비범죄자들에게는 반윤리적인 행위를 타자화하는 시각을 갖게 한다.


조커를 순진한 시선으로 동경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조커의 행위를 낄낄거리며 볼 사람은 많다. 그 시선 속에서 범죄에 대한 심리적 허들은 낮아진다. 반윤리적 행위는 우스꽝스럽고 병신같으며 쿨한 지위를 획득한다. 그리고 인정지위에 목마른 사람은 그러한 평가를 내면화한다. 조커는 금지된 방식으로 자존감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을 깨닫게 해 주는 영화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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