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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7. 2021

40주.알라바마 이야기(1962)

2020. 04. 05. by 만정

어느새 스무 번째 글이다. 아카이브에 열아홉 개가 쌓이고 보니 나처럼 숫자나 통계에 무감각한 사람조차 경향이라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19개 중 ‘영화 자체’에 대해 분석하고자 했던 노력이 6개, 어떻게든 ‘나 자신’으로 귀결하는 깔때기가 12개였다. 약간이나마-이마저도 결국은 깔때기의 혐의가 짙지만- ‘세계’에 대한 함의를 담은 건 내 보기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나는 반대한다’ 뿐이었다. 코로나로 전 세계가 고통받는 순간조차, 나는 마치 지구의 시민이 아닌 것처럼 코로나를 우회하여 봄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스무 번째 영화를 고르는 어려움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너무 같은 이야기만 지루하게 반복하는 것은 아닌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한결같이 자기 자신만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인가? 물론 당신이 코로나와 조주빈으로 영화와 세계를 연결할 때 조금 부끄럽고 부럽기도 했다.


나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정확히 말해 세계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분명 나와 연결되어 있지만 물리적으로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바로 그 세계. 문제는 나라는 인간의 뇌구조에서 세계란 1/19 정도의 비중을 차지할 뿐이라는 점이다(어쩌면 1/38 일지도 모른다. 아니 1/76?...). 다시 말해, 미천한 지식과 관심과 관점을 가졌다는 뜻이다. 그나마도 세계의 영역이 많이 확장된 결과이다. 예를 들어 정치라는, 세계의 한 조각만 해도 그렇다. 근거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짐작컨대, 내 세대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나 역시 정치에 대해서라면 무관심했으며, 문외한이었다. 언젠가 김어준의 책에서, 정치는 나에게 너무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알아야 하고 참여해야 한다는 취지의 글을 읽었을 때에도 막연하게 그렇겠지라고 생각한 정도였다. 그러다 정치가 내 삶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고 만 것이다. 지난 대선 전후, 거슬러 올라가 박근혜가 당선되었던 그 대선이라는 정치적 사건이 내게 미친 영향이 참으로 심대하다.


대체로 나로 가득한 세계 속에 파묻혀 있는 나는 요즘, 선거라는 세계의 이벤트를 향해 안테나를 세우고 있다. 아테네의 시민들과는 달리 생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핑계 삼아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관심을 쏟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점을 약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여하튼 출마자들의 면면을 보면서 기대에 부풀기도 하고, 고민이 깊어지기도 한다. 내 마음을 기대로 부풀리는 후보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영화 ‘알라바마 이야기’를 생각한다.


‘알라바마 이야기’는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를 영화화 한 작품으로, 1930년대 미국 남부에서 백인 처녀를 범한 죄로 기소된 흑인 남성의 변호를 맡게 된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 이야기가 큰 줄기를 이룬다. 물론 이 영화에 선거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가장 미국적인 영웅’으로 불리는 인물, 애티커스 핀치에 관한 것이다. 그레고리 팩이 자신이 연기한 인물 중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바로 그 사람 말이다. 그레고리 팩이 자랑스럽게 여길 만도 한 것이, 애티커스 핀치는 아이들에게 다정한 아버지이고, 예의 바른 이웃이다. 동시에 정치적인 올바름을 몸소 실천하는 용기 있는 시민으로, 아직 인종차별이 횡행하던 당시에 온갖 위협을 무릅쓰고 흑인 피의자의 무죄를, 사실 그대로 밝히고자 한 사람이다. 이 정도 들어보면 우리는 이미 그가 인간의 탈을 쓴 슈퍼 히어로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그가 정의감에 불타올라 그 사건을 맡은 게 아니었다는 점이 애티커스 핀치를 보다 특별하게 만든다. 그는 피할 수 있다면 이 일을 피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용기는, 자신에게 다가올 협박과 위협과 사회(이웃)의 압박을 알면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점이다. 그렇다. “다만” 할 일을 했다. 즉, 사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매 순간,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법적으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의 용기가 슈퍼맨이나 배트맨에 뒤진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를 들뜨게 하는 몇몇 후보들을 나는 애티커스 핀치 같은 인물로 여기고 있다. 그런지 아닌지, 그렇더라도 언제 아니게 될지를 나는 지금 알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애티커스 핀치처럼 행동했던 과거의 사건들과 같은 다른 상황이 닥쳤을 때 그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에 따라 언제나 열려있는 질문일 뿐이다. 그러나 내가 조직의 가장 중요한 자리로 갈 디딤돌 위에 발을 내디딘 순간에도 조직의 비위를 눈감고 이행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하는 사람, 견딜 수 없어서 자기 미래에 약속된 것조차 단호하게 물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지켜볼만하지 않겠는가. 더 나아가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를 구현하는 도구로서 자신을 사용하려는 신념으로 들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고 나 역시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것이다. 아저씨 또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한 잠재적 영웅들이 그들이 목표한 대로 더 나은 세계에 기여할 수 있기를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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