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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7. 2021

41주.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2018)

2020. 04. 19. by 감자

살면서 몇 번이고 무용담처럼 우려먹게 되는 경험들이 있다. 내게 그런 경험 중 하나는 7학기 봄, S 언니의 소개로 스크립터로 참여했던 단편 영화 촬영 현장이다. 거창하게 말해서 단편 영화 촬영 현장이지 사실은 그냥 한 영상원에서 3개월 간 수업을 들은 학생 수료작을 만드는 것이었고 감독은 물론이고 배우, 스탭들 모두 그 수업을 듣는 학생이었다. 영상원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내가 그 현장에 참여하게 된 건 정말 그냥 우연이었다. 촬영, 조명, 연출, 제작 모두 최소한의 영화적 지식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기에 몇 안 되는 수료생들은 서로의 수료작을 찍을 때 노동력 품앗이를 했고 그럼에도 일손이 부족했기 때문에 아무 지식이 필요가 없는 스크립터는 그냥 아무데서나 조달해 오게 되었는데, 하필 그게 나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의 사흘 가량의 경험에 무척이나 흥분하였고 그 사흘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영화 촬영 현장의 스크립터가 실제로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르지만 나의 주된 임무는 각 씬의 테이크가 시작되고 끝날 때 카메라 테이프 상의 시간을 기록하는 일이었다. 촬영 후 편집을 용이하게 해 주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촬영 현장의 소품 상황을 사진 찍어 두었다가 한 씬에서 테이크가 여러 번 가야 할 때 소품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체크하는 일, 배우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빨리빨리 조달하는 일, 장비들을 들어 옮겨주는 일 같은, 아주 소소하고 별 거 없는 일을 했다. 그런데도 다시 생각해 보면 꽤 바빴던 기억과 내가 일을 잘하고 있는지 걱정스러웠던 긴장된 감각이 남아 있다.


우리 영화의 감독님은 마르고 조용한 느낌의 나보다 두 살 위인 남학생이었다. 전역한 후 복학 전에 해 보고 싶었던 영화 공부를 한 번 하기로 결심했다던 감독님은 ‘용서받지 못한 자’가 떠오르는 군대 비극 시나리오를 썼다. 완성작은 5분 남짓이었고 주요 등장인물도 한 명뿐인 소소한 작품이었다. 그런데 그 한 편을 찍는 동안 우리는 사흘간 터진 조명을 수습하고 한 숨도 자지 못하는 하룻밤을 보내고 길 가는데 방해가 된다고 행인에게 쌍욕을 먹고 카메라가 먹통이 되어 오토바이를 타고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광화문까지 갔다 와야 했다. 첫인상이 조용하고 점잖던 감독님은 극도로 날카로워져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손짓과 미간만을 이용해 몇 테이크를 찍었고 조명 일을 하던 오빠와 가벼운 주먹다짐도 했다. 비록 촬영이 끝나고 나서는 술을 먹고 눈물의 화해식을 했지만. 영화판에서는 소중하게 다루어야 하는 1순위가 배우, 2순위가 장비, 3순위이자 최하순위가 스탭이라는 얘기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일본에서 초저예산으로 찍었다가 1000배가 넘는 수익을 벌어들였다는 좀비 코미디 영화다, 라고, 일단 소개를 하겠다. 내 생각에 당신이 절대 보지 않을 영화 중 하나인데, 그러니까 이다음 문단에는 시원하게 스포일러를 하겠다. 이 영화는 스포일러가 없이는 소개를 할 수가 없는 영화이므로 부디 이해해 주길 바란다. 만약 이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영화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보는 것이 가장 재미있으므로 여기서 글 읽기를 멈추기를 추천드리는 바이다.


영화는 여자 주인공이 좀비와 대치하는 씬으로 시작한다. 여주인공이 치켜든 도끼와 그 끝에 선 좀비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여자 주인공이 목숨을 잃을 것 같은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컷! 소리가 난다. 사실 그 장면은 현재 촬영되고 있는 좀비 영화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영화의 감독은 여주인공에게 연기력이 형편없다고 화를 내며 진실한 공포를 드러내라고 윽박지르고 다른 스탭들에게도 자신의 열정을 전혀 따르지 못한다며 분노를 터트린다. 그런데 그 영화 촬영 장소에 진짜로 좀비가 나타나고, 좀비는 촬영팀을 습격한다. 결국 여주인공만이 살아남아 좀비를 퇴치하는 것으로 영화가 끝난다. … 는 영화를 찍게 되는 감독과 촬영팀의 고군분투기가 이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의 주요 내용이다. 그러니까 한 영화 안에 세 개의 이야기가 액자식으로 들어 있는 것이다. 영화 한 편 값을 내고 세 편의 영화를 보게 되니 가성비 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로튼 토마토에서 신선도 100%를 받았을 정도로 이 이 영화는 아이디어가 빛난다는 평을 많이 받았다. 실제로 영화를 보고 있으면 ‘야 어떻게 이걸 저렇게 풀어내지?’라는 생각을 계속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사람들에게 생각지도 못한 사랑을 받게 된 이유가 영화 촬영에 대한 메타 영화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메타 영화라는 점이 신선한 아이디어의 시발점이겠지만, 그러니까, ‘영화 촬영’이라는 점에 방점을 찍겠다는 얘기다. 영화 촬영장에서 감독은 자신이 가진 예술적 자아와 현실적 제약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 배우는 명확하지 않은 지시에 몇 번이고 자신을 맞춰야 한다. 스탭들은 한 몸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하지만 그것은 심도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상황과 목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일이고. 다시 말하자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생각지도 못한 사고는 촬영 내내 툭툭 터져 나오고 그것을 막기 위해 촬영장의 모든 사람들은 넋을 놓고 동분서주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그 모든 불협화음들을 극도로 과장해서, 그러나 너무나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영화 촬영장은 이렇게나 엉망진창이고, 그 열기 속에서 현장의 사람들은 순도 높은 열정을 경험하며, 그 열정이 영화라는 매개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크게 성공해서 미국에 판권이 팔리고 올해 후속편도 찍을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제목도 기억이 안 나는 ‘우리 영화’는 수료식 날 학생들과 학생들이 초대한 친구들끼리 연 영상회에서 단 한 번 상영되었을 뿐 그 후로는 다른 사람에게 선보인 적이 내가 알기론 없다. 아마 이 세상에서 만들어진 99%의 ‘영화’라는 이름을 단 영상물들이 우리 영화와 같은 운명을 밟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나는 일민 미술관 건물의 상층 어딘가의 어두운 상영실에 앉아 5분쯤 되는 우리 영화를 보면서 무척 행복했다. 화면으로 보이는 장면 하나하나에서 타버린 조명과 피로와 애틋한 마음의 냄새가 느껴졌다.


영화라는 매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제작 기간 동안 거대한 촌극을 벌였다는 사실을 관객들이 알아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매끈하고 완결된 것 같은 작품은 온갖 소동을 다 집어넣어 겨우겨우 봉합한 결과물이라는 바로 그 사실을. 그리고 그 소동들이 얼마나 초조하고 힘겨우며 또한 묘하게 즐거운 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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